1. 이미 더 들어서 더 들을 것도 없는 내용을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그러쥐고 다시 속삭였다. 어머니가 흘린 눈물만큼 이미 처해진 운명이 편해진다고만 한다면 아이는 떠나는 길이 힘들지도 쥐어진 손이 떨리지도 않을 것을 그렇게 하염없이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아이는 궁성에 온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약속된 것처럼 마차는 희뿌연 먼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왕은 이제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커다란 대륙 그 금색의 혈통을 이은 골드리안 대륙에서 인간은 서로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정통 핏줄을 이은 왕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후손들은 서로의 피를 요구하며 칼과 창을 서로의 배에 찔러댔다. 여신의 강은 여전히 그 장엄한 물줄기를 내 뱉었고 그 물살을 빨리 했다. 간혹 가다 흐르는 시체의 강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아름다웠을 그 강은 이제 대륙을 나누는 기점이 되었다. 여신의 강은 대륙의 동쪽의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을 가르고 그 땅을 초원으로부터 분리한 지리적 기점이었으나 인간의 싸움은 그 나누어 버린 대륙의 이름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푸르름이 끊이지 않을 것 같은 서쪽평야에는 정통 왕위를 주장하는 골드리안 후예들이 그들의 맥을 이어갔고 끊임없는 암투가 벌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야를 세르판이라 이름짓고 몇 세기에 걸쳐 피를 골라내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열사의 사막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대륙의 정치를 이어받아 작은 나라가 생겼다. 아쉽게도 대륙은 계륵과도 같은 그 작은 땅을 자신들과 분리하지 못하고 대대로 악명을 떨치며 조공을 받기 시작했다. 남으로 산맥에 막혀있고 서쪽으로는 여신의 강의 축복 아닌 축복을 받은 작은 나라 세이카는 그렇게 하루를 한숨으로 살고 대륙의 눈치를 살펴야했다. 건국 시점부터 대대로 이어온 세이카의 왕들은 그리 권력이 강하지 못했다. 나라의 이름을 세이카로 지을 수밖에 없었던 혼돈의 시대에 등극한 세이카이 왕은 밖으로는 악랄하기가 이를 때 없다는 대륙의 황제를 신경 써야했고 안으로는 내정에 신경 써야했다. 그리하여 카오스력 121년에 등극한 세이카의 17대 왕은 귀족정치에 몸살을 앓아야 했고 각기 다른 귀족의 영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었을까?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열사의 사막에 견디는 강건한 체질로 그리고 모두 사내아이였다. 왕은 근심에 쌓였다. 권력의 난투는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자식들간의 난투라면 더 더욱이..) 그리하여 왕은 자식들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였고 세이카에 팽배한 귀족정치를 눈감아 주었다. 왕은 나름대로 평화가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왕궁은 작았지만 아름다웠고 왕의 4명의 아들은 각기 잘 자라 자신의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비단 아이들뿐이었고 평범한 부모 아래 컸다면 가능했을 평화는 - 왕이 바라던 마지막 평화였다. -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귀족의 무리에 그리고 각자의 어미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왕궁은 점점 불씨를 키우고 있었다. 「저런 더러운 녀석이 우리의 형제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궁안에 들어서는 아이를 바라보며 체통도 잊은 체 가이건은 중얼거렸다. 왕의 아들에 대한 예를 갖추어 소년을 맞이하려는 왕자들은 제법 나이가 많았지만 이제 막 들어서는 10살이 조금 넘은 아이를 절대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사막의 국민답지 않게 권력에 살이 찐 큰 형은 자신의 코를 쥐어 잡음으로서 - 사실 들어선 아이는 목욕을 끝낸 상태라 냄새는 나지 않았다. - 그리고 그 우아하게 기른 자신의 긴 머리를 살짝 뒤로 넘기며 눈 꼬리를 치켜 뜬 둘째 왕자도 더불어 차갑게 미소지었고 그 옆에 서 있던 셋쩨왕자도 신기한 동물 바라보는 듯 어린 동생을 위아래로 훑어 봤다. 오직 넷째 왕자만이 아이에게 서늘하게 말을 건냈을 뿐이었다. 「흐음~ 아버지도 능력이 좋으시군. 이 아이가 시녀와 달아났다는 마지막 왕자군.」 처음부터 냉기 서린 말에 아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어머니가 몇 일을 울며 일갈한 내용만 아니었다면 아이는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태세였다. 손을 꼭 쥐며 입술을 꼭 물고 참아내는 모습에 기가 차다는 듯. 첫째왕자 가이건은 헛~ 하고 헛 바람을 삼키고 유유히 사라졌다. *---*---* 「그만하면 되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치는 포즈로 다가오는 궁성 근위 대장의 모습에 나는 허억.. 하고 내몰리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나에게 가르쳐온 5년의 시간이 결코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의 무예를 배우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궁성 뒷마당에서 검을 흔들고 있었다. 한번도 내게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 윗 형제들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들의 눈에 나의 행동이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것이 비단 남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새벽 시간의 수련일지라도 행동을 조심해야했다. 비아냥거리는 웃음 말투. 아직은 그 어느 것도 난 그들에게 반박할 힘이 없었다. 「훗.. 이만하면 됐다는 말은 1년 만에 처음 듣는걸.」나는 검 집에 칼을 넣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땀이 바람에 식어 순간 서늘해졌다. 「욕심이 과하시면 앞으로 있을 수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그럽니다. 아함~~ 사실 꼭두새벽에 왕자님을 가르치는 것이 버릇이 됐다고는 하지만 하암~ 여전히 졸립군요. 에휴... 아! 아직도 역사시간에 일부러 조는 짓은 안 하시겠지요? 친구가 걱정하더이다. 그리고! 왕자님의 형제들이 왕자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시지 않으시겠지요?」 흥! 안 알려줘도 안다. 그들은 나를 후원의 왕자라고 하지. 후원에 사는 그림자 왕자.. 그것이 나를 얼마나 업신여기는 것 인줄 안다만 나는 참을 수밖에 없어. 나는 짐짓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훗... 도발하지마.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형님들의 발치에나 머무르는 것이지.」 나는 어렵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해주었다. 매우 난처한 듯이.. 인상이 찌푸려지는 근위대장의 모습. 그의 친우가 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그는 처음으로 온 궁전에 유일하게 나를 자식처럼 생각하며 돌보아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속이고 싶진 않지만 더 표출되어봤자 좋을 것도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제.. 전 그만 가서 대열을 정비해야합니다. 왕자님.」 「별로 듣고싶지 않아. 그 왕자님이란 소리. 내 인생에는 과분해.」 「무슨.. 전하께서 아들로 인정한 분. 전 제 주군의 말만 듣습니다. 왕자님.」 「그렇게 부른다면.... 앞으로 새벽에 절대 나오지 않을 거야.」 「하하하. 웃기지 마십시오. 새벽에 제가 잠도 못 자게 하고 누워있던 처녀들의 물리치게 한 것은 왕자님이십니다. 전 그래서 아직 장가를 못 가고 있지요. 타이라!」 하하.... 내 이름을 부를 때 은근히 꼬는 그 버릇만 고친다면. 시녀 10명쯤 소개해줬을 텐데.. 쯧~ 그래서 넌 아직도 노총각인 것이다. 나의 고소를 짓는 모습에 그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해댔다. 「사람들이 깨기 전에 이만 가볼게. 그레이스. 여전히 그 칼은 반짝거리네.. 그럼 내일 봐!」 「예. 타이라. 조심히 들어가요.」나의 친우로서 친밀감이 묻어난 말투에 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는 예전의 만남이 살짝 스쳐갔고 그리고 흥겨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난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있을 것이다. 이제 길어져버린 머리도 어머니를 닮아 유독 나만 틀린 금색의 머리도 그들이 늘 더러운 취급하는 나 자신의 하얀 피부도.. 열사의 사막의 전사처럼 짙은 흑색이 아닌 것을 비관하지 않는다. 배불리 살찌우는 그들의 권력에 가담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저 궁에 머무르는 조건으로 어머니의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난 살아 계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참을 수 있었다. 몰려오는 피곤함을 쫓기 위해 차가운 물로 목욕을 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침대에 몸을 뉘었다. 다른 사람들의 방에 가볼 리도 없지만 수군거리는 하녀들의 목소리에 엿들은 내용으로 보 건데 나의 보금자리는 왕자들을 보필하는 하인들의 방보다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왕자는 자신의 옷을 스스로 입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마음에 들었다. 처음 나를 씻기고 어르던 손길은 소름끼치고 끔찍한 추억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놀라며 신기해하는 나의 하얀 피부와 어머니의 혈통에서 오는 그들에게는 없는 머리색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막의 모래 바람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오후. 아니나 다를까 대륙에서 손님이 찾아온다는 전갈이 왔다. 세이카는 작은 나라라고 하였던가... 나의 발로 밟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땅에 이보다 10배는 넓은 초원이 있다는 말에 난 역사선생의 눈을 한참 들여다 봐야했다. 「하하. 타이라님. 그렇게 바라보신다고 있는 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좋아요. 좋아. 당신의 말을 믿는다고 하죠.」 「믿는다고 하죠. 가 아니라.. 이런이런... 그런 불신의 표정은 싫습니다. 역사는 바뀌지 않아요. 여신의 강 서편으로 분명 초원이 드넓은. 아~ 초원은 풀이 많이 자란다고 알려드렸죠? 그 초원이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곳이 나옵니다. 그게 우리가 조공을 바치는 곳. 세르판입니다. 원래 우린 골드리안의 한 핏줄이었어요. 이런이런...」 「그래? 그 조공... 이맘때면 사신이 걷으러 왔지.」 나의 말에 일순 어두워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덩달아 나도 걱정스러워졌다. 「아십니까 타이라? 첫째 왕자님이 그 조공을 남쪽의 우크란에 다 드렸답니다. 한창 전쟁이 나려는 이 시점에..... 큰일입니다. 세르판에서 오신 분들에게 어떤 답변을 주려고 그러는 건지.. 전쟁은 싫은데..」 소곤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우크란하고 세르판이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나의 놀란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슬쩍 미소지었다. 2. 「바보 같은 소리!」 나의 말에 그가 놀란 듯 했다. 「무엇이 바보 같다는 말입니까? 타이라?」 「우린 많은 조공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 그 말에 놀라지마. 당신이 가르쳐준 내용이니까! 아무튼.. 그 조공을 우크란에 준다는 것은 세르판이라는 10배나 넓은 땅덩이의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지. 우크란이 얼마나 전쟁에 강할지 몰라도 우리 세이카 합공 한다고 해도 세르판은 치기 어려울 거야. 그건 틀림없어. 내가 알기로 우크란은 숲이 많아 말을 탈줄 아는 사람이 적다고 했어. 넓은 초원을 걸어서 싸울 것이 아닌 다음에야 기마 부대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크란도 세이카의 낙타부대도 우린 같이 파멸하겠지.」 헉..... 이런.. 제길! 놀라는 눈을 보지 않아도 나는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간 몇 년간을 숨겨온 나의 모습을.. 「헉.. 이건 외운 거야. 미안해. 실수였어.」 음..... 변하지 않는군. 완전히 얼었어. 「타이라. 타이라 맞지요? 제 앞에 있는 것은 왕자님이 맞지요?」 「그래. 맞아. 알면 비밀로 해줘. 귀찮은 형님들의 질문 공세는 질색이야. 이만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 할래. 그럼 쉬어. 당신도 놀란 것 같으니 쉬워줘야지.」 나는 얼어있는 역사선생을 뒤로하고 황급히 달려나왔다. 내가 황급히 달려나오지 않아도 그는 몹시 놀란 사지를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지만. 궁은 모래먼지를 피하기 위해 인위적인 오아시스를 만들어 나무를 심어두었다. 수풀이 우거지지는 못했어도 먼지바람은 나뭇잎을 뚫고 오기 힘들었다. 궁전은 더할 나위 없이 서늘했다. 벽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호리병에 시녀들은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날랐다. 차갑게 식혀준 벽은 안의 공기를 덮혀 주었고 우린 열사의 사막을 나름대로 풍경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여신의 강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뜨거운 대지에서 불어나가야 하는 것 일진데.. 여신의 축복이라고 했던가? 바람은 여신의 강으로부터 불어들어 왔다. 축복의 사막. 열사의 사막. 축복의 세이카. 나의 조국. 비릿하게 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저주하지만 난 이 대륙의 아들인 것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요!? 형님이 책임지십시오.」 「뭐? 뭐라고? 동조한 것은 너희들이었어. 이제 와서 세르판의 대신들이 온다고 해서 너희들이 나를 등 떠밀듯해? 바이건 말해봐. 너도 동의했잖아.」 「바..바보 같은. 왜 나를 물고늘어집니까. 우크란에 조공을 다 줘버린 건 첫째형이잖아요.」 「이런~! 난 너희들의 의견에 따랐을 뿐이야.」 이보다도 더한 참담함이 없다는 듯 세이카의 아들 4명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우크란으로 보내버린 그들의 보석과 그리고 물건들은 세르판에서 조공으로 받으러 올 물건들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죽을 듯 노려보아도 이제 도착할 세르판의 병사들에게 할말은 없었다. 뒤룩뒤룩 찐 살을 잔뜩 부풀리며 가이건은 화를 내기 시작했고 이어서 머리채를 늘어트리며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던 둘째 레이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훗....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사신은 오다가 죽었어. 안 그래?」 무슨 소리냐는 듯 세 명의 왕자들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뚱거리는 첫째왕자가 뒤이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왕자들 중 유일하게 넷째왕자 바이건만 놀란 눈으로 둘째왕자를 노려보았다. 「우..웃기지마. 아버지 허락도 없이 그들을 죽이잔 말이냐?」 「사막은 그들의 땅이 아니다. 바이건. 바보같이 말을 더듬지 마라. 이건 우리들이 하는 일이 아니야 여신이 돕는일이라구.」 자신의 의견이 자랑스럽다는 듯. 레이건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들키면..어쩔건데?」 미덥지 못한 바이건의 입술이 다시 질문했다. 「훗..... 우리는 모르는 일이야. 안 그래? 우리의 철없는 막내녀석이 한 짓이야? 그렇지?」 「하하하하하~~~~~~!!!!!!!!!!!!!」 비계가 울리는 저음의 웃음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세르판으로 바치는 조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세르판은 골드리안 대륙의 주인이 계승한 나라 그 친우와도 같은 세이카를 보호한다.> 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어찌 보면 중요한 말처럼 보이는 그 문구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우리가 주인이니 너희들은 종이다. 우리의 뜻에 따르면 너희를 보호한다. 고로... 어길 시 골드리안의 왕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피의 계약에 불만은 없었고 또한 세르판의 왕은 그렇게 많은 조공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의 한없는 초원에서 나는 것들이 오히려 세이카에게는 도움이 될 정도였으니까.. 단지 우크란이라고하는 골드리안을 배척하는 세력들 - 자신들도 선대의 골드리안의 핏줄이었음을 알면서도 -편에만 붙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아레스. 좀더 달릴까?」 「흠.... 여신의 강을 빠져나오고 나니 믿을 수 없을 만큼 건조하지?」 「허허... 올해는 특별히 따라온다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위로부터 왕의 4기사 중 암기의 기사 길과 신의기사 헤론과 지혜의 기사 아마드의 말이었다. 그들의 말을 듣는 아레스가 대답했다.(그는 무예가 뛰어난 왕의 기사였다.) 「쿡..... 셋 다 처음이면서 아는 듯이 말하지 마라. 나는 이미 한번 왔었어.」 「정말인가?」 「훗..... 얘기하지 않았던가? 여신의 강에서 여신을 봤다고.」 「우....... 그 고리짝 이야기를 또 들먹이는군. 그래서 와본다고 한 건가?」 「글세...... 초원에도 별로 없는 금색의 머리칼이 또 나올지 궁금하군. 여신이 아니라면 그런 머리는 없을걸?」 아레스의 말에 나머지 3명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1000명중 1명이 있을까 말까한 금색의 머리라니...... 약을 다루는 헤론은 자신의 지식을 짜 보아도 이해되지 않았다. 1000분의 1의 확률은.. 혹시 석양 노을에 아레스가 잘못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대화는 점점 빨라지는 네 마리 말의 다리에 묻혔고 이윽고 왕으로부터 1개의 대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뽀얀 먼지를 휘날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흠....... 손님을 맞이하러 온 모양이군. 이럇~!」 검은 장발의 기사가 자신의 말을 재촉했다. 성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래 적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늘 오던 외교차원의 사신들이 아닌 왕의 4기사라 칭하는 무리들이 등장하자 왕자들은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성의 홀 안에 긴 탁자를 놓고 마주 앉은 왕의 기사들과 세이카의 왕자들은 서로 차가운 눈빛을 교환했을 뿐이었다. 「그럼.... 가이언왕자님께서는 저희 말씀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건......」 덩치에 맞지 않게 첫째왕자는 그 넓은 의자에서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왕의 기사들이 온 이유는 조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맘때쯤 걷어 가는 조공이야 없어도 그만인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우크란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첨예하단 사실을 알려주고 더 나은 결속의 방법으로 왕자들 중 한 명을 대륙으로 데려 가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우리의 왕 골드리안께서는.....」지혜의 기사 아마드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초원의 복장이란 의외로 탄탄해 보였고 왕의 기사 중 지혜의 기사는 인자한 얼굴이었지만 왕자들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4명의 왕자님들께 모두 세르판에서 머무실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이카의 국왕전하께서 몸이 불편하신 관계로 골드리안 전하께서는 왕자님들 중 한 분께서 오시면 된다는 너그러운 제안을 하셨습니다.」 우거지상으로 앉아있는 살찐 왕자와 긴 머리의 왕자 그리고 불만을 표시한 왕자와 바들바들 떠는 왕자를 스윽 훑어보며 골드리안에서 온 4명의 기사는 속으로 웃어버렸다. 그들이 보기에 왕자라는 허울만 썼지 그들은 바보 같은 평민보다 못해 보였다. 자신들이 모시는 대륙의 왕의 날카로운 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전히 중재를 못하고 혼동스러운듯 서로만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채신없는 모습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 일지도 몰랐다. 「잠시만. 저희들의 대답을 내일로 미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대답을 한 것은 둘째왕자였다. 어두운 밤..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비가 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라고 종종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때로 여신의 강에서 오는 차가운 바람은 비를 만들었고 오아시스의 인공정원이 아니라 하여도 구름에서 맺힌 물방울들은 대지의 모래먼지를 가라앉혀 주었다. 흠...... 이상하네? 모든 시녀들이 보이지가 않았다. 무엇인가 시키려고 하여도 몇몇 시중드는 시녀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대륙에서 온 손님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공간에 굳이 방밖으로 나가서 그들과 마주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긴 그건 나만의 우려일지도 몰랐다. 궁성이 작다고 해도 -대륙의 궁성은 얼마나 큰지 몰라도- 이곳은 꽤 넓었다. 마주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는 것보다 힘들지도 모른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역시나 비소리만 고요한 공기를 울려줄 뿐이었다. 서재에서 꺼내온 책을 모조리 읽을 것은 뭐람..... 쯧. 불편하지만 난 첫째 왕자의 거처 옆에 있는 서재로 가야했다. 그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었다. 나를 노려보는 시녀들은 가끔 첫째왕자의 오만함을 닮았는지 아니면 둘째 왕자의 비웃음을 배운 것인지 거만하기가 이를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쯧...... 할 수 없지.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후의 긴긴 시간을 아무것도 안하고 보내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후원의 방을 지나서 홀 옆으로 난 계단을 밟고 가급적 아무도 보지 않게 나는 서재 쪽으로 들어갔다. 서재의 커다란 책장 뒤로 원하는 책이 있나 살펴볼 즈음에 다급하게 들려오는 형들의 목소리는 나를 책장 뒤로 숨게 하기 충분했다. 「이런 바보 같은..... 하필이면 왜 4명의 기사야. 왕이 눈치챈 것은 아닐까?」 이건....... 셋째왕자 목소리 군. 「흥. 넌 그렇게 눈치가 없냐? 그랬다면 대군을 대려 왔겠지. 저렇게 4명만 왔을 리가 있냐? 그리고 긴 머리의 기사? 뭐? 무예의 기사? 웃기는군. 그 사람이 무예가 뛰어나 날고 긴다고 한들.. 여긴 사막이다. 사막의 전사는 초원의 전사에게 지지 않는다.」 둘째왕자의 목소리는 흥분한 탓인지 꽤 고음으로 들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아? 형들이 책임져....!」 훗... 막내왕자 바이건인가? 나는 그들의 대화를 숨죽여들었다. 「예정대로 해요. 그 무예의 전사만 힘을 못 쓰면 나머지 세 명의 기사는 별것도 아니겠군. 그 무예의 기사? 검은 장발의 놈에게만 약을 타라고 합시다. 그리고 그들이 못쓰는 3시진 후에 자객을 보내 다 죽이라 하지요.」 헉......! 난 순간 내 숨소리에 내가 더 놀랐다. 수런수런... 그들의 공모는 눈덩이처럼 컸고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공!! 그것 때문에 저리 무모한 짓을.......... 사막의 연회는 특별하게 아름답지는 않아도 은은하고 끈끈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아른거리는 횃불 사이로 여인들의 춤이 아름답고 그리고 그들의 마시는 술은 체액만큼이나 진했다.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무예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세 명의 기사들은 그런대로 즐거운 분위기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휘익~ 둘러본 사내의 모습이 왕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후훗.. 아레스. 그만 눈에 힘을 풀고 마시지 그래? 자네 옆에 있는 여성의 팔이 떨어져 나가겠군.」 흥청거리듯 웃는 아마드의 눈은 이미 풀려있었다. 「쳇. 아마드. 벌써 눈이 풀렸군. 그러면 지혜가 다 어디로 가나?」 「하하하. 은근히 비꼬지마 아레스. 여기 우릴 칠 사람은 없어. 우린 세르판의 용감한 4명의 기사 아닌가! 으음.......... 졸립군.」 은은한 향내가 홀 안을 다 채울 무렵 왕자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반쯤 벗은 여인네들은 사내들의 허벅지로 손을 옮겼다. 벌떡~~~~! 긴 머리를 흩날리며 자리를 박찬 무예의 기사를 나머지 셋이 바라보았다. 「나 먼저 자겠네. 다들 그 손아래 행복하시길..」 「푸하하핫.......!! 자네가 제일 젊은데 이리 사라지면 여인들이 어찌할꼬....」 인상을 찌푸리며 무예의 기사는 방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거처에 다다를 때까지 못마땅한 눈으로 그들을 다시 떠올린 다음 다시 한번 화를 삭혔다. 그래...... 열사의 사막에서는 봐주겠어. 방안은 신기하게도 시원했다. 여신의 강이 흐른다는 것이 실감날 정도로 시원한 공기에 초원을 떠올린 아레스는 곧이어 잠이 멀찌감치 달아났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해둔 탁자 위의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이국의 병에 담긴 술은 그 향내도 매우 좋았고 뒤이어 매끄럽게 넘어가는 술맛은 감칠 날 정도였다. 「쿡....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술잔을 들고 그는 창가에 섰다. 난 마음이 급해왔다. 같이 참여할 수 있었기를 바랬지만 내가 설 곳은 없었다. 처음으로 그림자 왕자라는 별명이 뼈저리게 가슴아프게 느껴졌다. 시녀를 시켜 알아본 바로는 그 안에 무예의 기사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긴 장발의 머리라고 했던가? 아무리 둘러 보라 하여도 없었고 마침내 전해들은 말은 조금 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었다. 제길......... 나는 황급히 그의 방을 찾아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재수 없이 걸렸을 때를 대비한 모습으로 시녀의 복장을 다시 한번 추스르고 입가를 천으로 가려 나의 눈만 천 밖으로 살짝 나왔다. 덮어쓴 터번이 너무 더워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두 번째 층에도 그 기사의 방은 없었다. 맞다! 그 방. 나는 일순 어렸을 적 모르고 들어간 커다란 방이 떠올랐다. 그들이 온 목적에 맞추어 그 방은 아마도 그 무예의 기사를 위해 쓰여질 것이다. 나는 마음이 결정되어진 바 황급히 그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제발 늦지 않기를........... 투욱......... 하고 잔이 떨어졌다. 「쿡..... 싸구려 독은 아니군. 손이 저릿저릿해.」 떨어진 잔을 노려보고 아레스는 혼잣말을 하였다. 슬쩍 웃음이 나왔다가 이내 차갑게 굳었다. 그들이 가진 독이 자신을 잠식하게 두었다는 것이 굉장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하여 지금 들어서는 사람이 누구든 단칼에 베어 내리라고 다짐했다. 「으악.......」 허억 허억......... 내리누르는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다. 약을...먹지 않은 것인가? 형의 약은 순수 맹독! 이리 멀쩡할 리가 없다. 「도..독은?」 「쿡..... 생각 외로 가뿐해. 죽이려고 먹인 것치곤. 아쉽게 되었구나. 손이 저릿해서 단칼에 목을 딸 수 없는 아픔을 제외하곤 그럭저럭 괜찮군.」 「아냐.. 그건 2시진 후에 암살이야.」 「뭐?」 「아니아니..」 머릿속이 혼돈 되어 그의 말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먹은 독은 마취제 역할이고 2시진 후에 당신을 죽일 암살자가 들어온다는 말은..... 그렇게도 허무하게 허물어져갔다. 「누가 보냈나?」 그가 묻는 서늘한 어투가 나의 대충 얼버무린 말을 유추한 듯했다. 「전. 혼자 왔습니다.」 「계집이 홀로 돌아다닐 정도라..... 세이카의 왕이 죽을 때가 되었군.」 「무......무슨....헉!」 대꾸하려다 서슬 퍼런 대검이 목을 스쳤다. 「쯧.... 말하지 않았나? 손이 저릿하다고. 한번에 명줄을 따지 못하고 이리저리 쿡쿡 쑤실지 몰라......후훗.」 장....장난이 아니야! 「해독제가 있어요. 놓아주세요.」 그는 나의 말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훗...... 거짓은 아니군.」 오....다행이야. 그는 바로 일어나서 탁자 옆에 놓은 의자에 나를 앉혔다. 당기는 팔의 힘에 나도 모르게 푸욱 안겨버리고는 이내 다시 털썩 앉혀지자 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꼭 팔이 묶인 것만 같았다. 「이...이거. 이건 그 독약에 잘 듣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독약은 마취제가 아니라 진짜 독약.. 바로 즉사했겠지만 기사님은 독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으실 겁니다. 2시진 정도 버티시겠죠. 그게 다입니다. 이것을 드시면 바로 풀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며 굉장히 빠르게 말했다. 그가 알아들었나? 「후훗....... 계집치고는 지식이 해박하구나. 그 독을 네가 만든 것처럼....」 두 번째 난관에 봉착한 난 이윽고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3. 「후훗....... 계집치고는 지식이 해박하구나. 그 독을 네가 만든 것처럼....」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커다란 방안의 공기가 모조리 증발한 것처럼... 흡사 가만히 노려만 보는 그가 나의 목을 조르는 것처럼 나의 몸은 스며들지 않는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둘러쳐진 터번을 찢어버리고 그 앞에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그를 살려준 것은 나이지만 그 의심의 화살이 이렇게 꽂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들어설 때쯤이면 기사는 이미 마비상태에 빠졌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큰 오판이었다는 듯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노려보는 흑색의 눈동자를 보면 오히려 더 날카로운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수..숨이 막혀.!!! 「그것만을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독에 대해서 알고있는 이유는....」 왜.. 내가 그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하였던 12살 때의 일을 설명해주어야 믿을 텐가? 라고 그를 올려다보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오래 바라보고 있기 심히 고달팠다.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기사의 발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그냥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그 대신 내가 사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훗.... 세이카의 왕이 골드리안을 배반하는군.」 그가 낮게 읖조렸다. 「아니야!」 그의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눈빛을 내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보아주었다. 그의 길고 긴 검은색 머리가 가지런히 얼굴을 스치듯 출렁였다. 그의 고개가 약간 기울었다. 「악......!!!!」 거칠게 잡힌 손목이 아파 왔다. 「넌 누구지?」 「기사님께 설명드릴 수 없는 제 심정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오만하다고 할 나의 대답에 피식 하고 웃음을 날렸다. 이상한 밤이 계속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의자에 보이지 않은 결박으로 묶여있었고 그는 잠도 오지 않는 밤 길동무와 이야기하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이라도 시킨다면....... 아니. 무엇인가의 틈이라도 보인다면 도망이라도 치련만 그는 철옹성과 같았다. 움직이지 않는 고목처럼 그렇게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눈이..... 이상한 색이구나!」 그는 숲 속에서 처음 이상한 생물을 발견한 듯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 「하하하!!!」 의문의 웃음소리 너무도 호탕한 웃음소리에 나는 놀라서 그가 나를 자세히 관찰하는 지도 모르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좋겠지. 어차피 네가 누군들 관여치 않는다. 그 터번아래 얼굴이 보고 싶군.」 히익-------!! 얼굴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면 이리 둘둘 말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곤란한 눈빛을 포착했는지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즐거워하는 눈으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그만 두세요. 자...자객이.....」 「관계없어. 달리 무예의 기사 칭호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생명의 은인의 얼굴쯤은 봐둬야 하지 않을까?」 「안 돼!!!!」 다급함은 주위 환경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난 15년 만에 처음 알게 되었다. 난 내가 이곳에 몰래 들어왔다는 생각도 그가 힘으로만 제압한다면 나 같은 어린 소년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쯤은 하얗게 잊어버렸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에는 난 너무 초조했다. 「살려주세요~~!!!!!!!!!!!!!!!!!!!!!!!!!!」 나의 커다란 소리와 동시에 터번을 쥔 손이 휘익~ 하고 허공을 갈랐다.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쿵! 쿵! 쿵! 「아레스! 무슨 일인가! 들어간다.」 말과 함께 뛰어들어온 사람은 방 한 구석에서 터번을 손에 쥐고 멍하니 서있는 기사와 얼굴을 푸욱 가리고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나를 두고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였다. 「아........아레스!」들어온 사내의 외침이 들렸다. 모래바람 속에 뿌연 풍경처럼...... 어지러운 형상이었다. 뛰쳐 들어온 사내에게 사막의 보주라 불리는 밤의 이슬의 향이 지독하게 풍겨왔으며 그 또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드....드디어 찾은 건가!?」 무..무엇을? 찾았다는 거지? 나는 이상한 공기의 흐름과 더불어 멈칫하는 그들 사이에 이상한 대화를 들을 겨를이 없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고 그가 나를 잡기 전에 재빨리 뛰었다. 내 생에 가장 빨리 뛴 날을 든다면 아마도..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속도로 방문을 박차고 재빨리 뛰어나갔다. 터억~~~~~~! 문 앞에서 부딪힌 사내에게 눈길도 주지 못했고 나는 후다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악~ 방금 뭐야?」 방안에 들어선 길은 멍하니 서있는 아레스와 아마드를 보고 잠시 상황을 판단한 다음 방금 뛰어나간 사람과 연관지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상황을 판단했고 그리고 넋이 나간 것 같은 사내들에게 단숨에 물었다. 「아레스가.. 여자를 건드린 거야?」 그 말을 기점으로 흑단의 기사 옆에 서있던 아마드가 웃었다. 「푸하하하하!! 너다운 해석이다 길. 안 그래도 나도 여자 비명소리에 달려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자는 앉아 있고 아레스는 서서 감상하고 있더군. 아마도 아레스 녀석은 보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체질인가보다. 푸하하하하. 그래서 그렇게 황급히 연회장에 빠져나간 게로군.」 아마드는 웃다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훗... 방심했다. 그 머리칼에 속았어. 그리고 아마드 계속 헛소리한다면 그 혀가 다시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잘라주겠다.」 헉... 하고 아마드는 입을 꽉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아레스의 대거가 입을 헤집을 것만 같았다. 하긴.. 그가 마음먹어서 안된 일이라고는 없었으니.. 털썩...... 하고 흑단의 머리를 흩날리며 아레스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꼼짝없이 앉아만 있던 시녀의 의자에 앉았다. 「아마드! 세이카에는 금발이 많은가?」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나 아레스의 눈은 무엇인가 서운함을 담은 듯하여 길은 그 옆의 바닥에 주저앉아 아레스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 마라. 금발이 아니어도 세이카에는 미녀가 많다고 하더군. 그렇게 서운하면 찾아볼 수도 있고....」 「후훗... 길. 그대나 여자들을 찾아라. 난 그 시녀에게 볼일이 있다.」 아레스는 자조적인 웃음을 띄고 길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들어선 헤론이 뭉쳐있는 자신들의 동료를 보고 의아한 듯이 말했다. 「별일이군요. 다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하십니까?」 그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병으로 눈을 돌렸다. 약사의 본능으로 놓여있는 병을 집어 들면서 혀끝으로 살짝 맛을 보기 시작했다. 「으음..... 의외로군요. 이곳 사람들은 특이한 술안주를 먹나 봅니다.. 읍.. 매우 쓰네. 해독제인가?」 「그래. 해독제다.」아레스의 대답에 나머지 사내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허억....허억...... 순간적인 체력소모가 큰 탓으로 침대에 눕자마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다시금 그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의심을 샀지만 왕궁에서 아무도 모르는 후원까지 누군가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더구나 난 그림자왕자라 불리는 만큼 존재 감이 없기에 긴장은 더욱 빨리 풀어졌다. 훗.....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던가? 1시진까지만 하여도 난 그림자 왕자라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말이지. 사지가 녹을 것처럼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흑발의 사내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 생각과 동시에 몸이 살짝 떨려왔다. 그래도 대륙의 사내들이 죽지 않았음을 안도했다. 왕궁 안에서의 살인은 빠르나 느리나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줄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목숨을 건 보람을 느꼈다. 난 아버지의 나라 그리고 나의 조국 세이카를 버릴 수가 없었다. 추억처럼 난 그 독을 먹었던 때를 생각했다. 12살 아버지의 몸이 그리 나쁘지 않았을 때 수시로 나를 데리고 왕궁 밖을 나서곤 하셨다. 다른 왕자들과 달리 왕궁을 답답해하는 나를 배려했던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은 다른 형제들의 질투심을 치솟게 만들었고 그 날 저녁 난 물대신 독을 먹어야 했다. 손발이 저리는 것은 그 독의 초기증상. 그때 당시 난 독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하며 3일을 뜨겁게 오르내리는 열과 살을 찢는 아픔에 뒹굴어야했다. 해독제는 있었다. 다만 내가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을 보는 순간까지 아무도 내게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씁쓸한 기억은 마음에 남아 그 뒤 난 매일같이 독을 먹는 연습을 해야했다. 손발이 저림 현상을 극복하는 과정은 독에 익은 몸이 얼마나 견디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것은 육체를 여러 번 죽이는 것과 같았다. 눈물이 쉴 세 없이 흘렀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는 겨울 아버지는 몸져눕기 시작했다. 왕의 부재란 나라로 보면 큰 손실이었지만 귀족정치에서 왕의 부재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서로 나서려는 귀족과 나의 형들 사이는 팽팽한 줄로 연결되어 있어서 가까스로 버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아무도 아버지를 쾌차시켜 평화를 찾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크란은 찾아왔다. 아마도 달콤한 언약을 했겠지........ 대륙의 왕을 치고 대륙을 지배하자는.. 밤이.....길었다. 실패한 일. 그리고 그 후환이 두려운 일. 왕자들은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가뿐히 웃음을 날리는 세 명의 기사들을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중의 한 명 날카로운 사내의 눈이 훑고 지나갈 때면 왕자들은 그냥 무릎을 꿇고 단번에 죄를 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왕자들의 마음을 모르는지 아는지 기사들은 시원한 웃음을 날리며 담소를 나눌 뿐이었다. 「우크란의 손길이.......... 안 미치는 곳이 없군.」 무예의 기사의 목소리는 식탁 위에 퍼져 가까스로 식사를 하는 왕자들의 목에 돌을 삼키는 효과를 안겨주었다. 「쿨럭......쿨럭...... 예에... 안 그래도 잦은 암살이 계속되어 왕이 위태롭습니다.」 눈치를 살피며 첫째왕자가 말을 이었다. 「흐음....... 그런가요? 우크란의 암살자들이 독을 쓴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소?」 「무..무슨 소리입니까. 골드리안의 후예들이여. 전 우타크의 독은 처음 듣습니다.」 당황한 둘째왕자는 정중히 술을 마시는 아마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식사는 간결했지만 왕자들은 모두 구토를 일으킬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대륙으로 가는 건 바이건을 보내겠소.」 첫째왕자의 목소리에 아레스는 웃었다. 기뻐 웃는 웃음이 아닌 서늘한 냉기를 품고도 미소를 띌 수 있는... 그건 아레스만 가능한 것이었다. 「훗...그럼 돌아가는 길은 바이건왕자님을 보필하게 되겠군요.」 그들의 대화에 울음을 삼키며 바이건은 일어났다. 「난. 죽을 거야.」 바이건은 형들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암살이 실패한 후 아침에 내린 결론에 바이건은 팔딱 팔딱 뛰었지만 세력으로 보면 가장 미약한 존재였고 자신이 가지 않아도 금방 세이카를 치고 들어올 것이 틀림없으니 차라리 외국으로 도피하란 대책도 없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왜.......왜 내가 가야해?」 「흥..... 그럼 누가 간단 말이야?」 둘째왕자의 목소리에 바이건이 울 듯 한 표정이 되었다. 「왕자라고 했어. 누구라고 지목한 것도 아니야!」 「뭐?」 「우리만 왕자는 아니지!」 왕자들이 제각기 말하는 것 중 하나는 뜻이 통했다. 세이카에는 왕자가 5명이었다는 사실. 「지금껏 아무 일도 없이 빈둥빈둥 왕자의 자리에만 앉아있는 녀석이 있어 형. 난 차라리 그 녀석을 보내놓고 그동안 우크란과 계획을 짜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걸?」 둘째의 말에 나머지 왕자가 제각기 기쁨을 표현하였다. 밤은 깊어져왔고 약속한 하루는 줄어들고 있었다. 4.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모호한 정신 속에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는 방안으로 밝은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벌떡~ 놀라서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아파도 늘 상 새벽녘에는 눈이 저절로 떠지곤 했던 내가 눈을 부시게 할 만큼 태양이 하늘에 올라있는 데에도 잠을 잤다는 것에 나 스스로 황당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차차!. 오전 수업을 빼먹었다고 그 덩치만 좋은 근위대장이 나를 찾으러 다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흠..... 어쩔까나? 난 이상하게도 고요한 성안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침대 근처에서 어젯밤 변장을 위해 둘렀던 옷가지들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휴...... 시녀가 들어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러고 보니 이 시간이 되도록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스럽게 느껴졌다. 이대로 세안을 마치고 그레이스를 찾아갈까 라는 생각으로 옷가지들을 치워놓았을 때 방안에 들어서는 시녀들의 무리에 나의 눈동자는 커다랗게 커졌다. 「왕자전하. 시중을 들어드리려 왔습니다.」 시종장으로 보이는 나이가 짐짓 들어 보이는 시녀 하나가 무리들 속에서 한 발자국 걸어나왔다. 「새삼스럽게 시중을 받을 생각은 없다. 모두 물러가라.」 「저...... 의장을 갖추게 하시라는 가이건왕자님의 명령이 계셨습니다.」 「뭐?」 「그럼 뫼시겠습니다.」 으아아.. 하는 사이에 여자들의 무리에 이끌려 나는 온몸에 물을 첨벙 써야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창피함이 밀려와 사람들을 밀쳐내려 했지만 솔직한 나의 육체는 따뜻한 물에서 팔 하나도 들 수 없었다. 「아앗... 이건 뭐야?」 그들이 머리에 덕지덕지 바르는 검은색의 가루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종장은 줄 곳 시녀들에게 연신 무어라 명령을 했고 그 시종장의 목소리에 맞추어 일률적인 손놀림은 금방 나를 지치게 하였다. 「귀족들이 모이는 건가?」 이런 일은 1년에 두 차례 정도 있었다. 나를 부끄러이 여기는 세이카 왕국을 위해 나는 검은머리로 물들이고 - 아마도 같은 형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을 - 단정한 옷차림을 해야했다. 아직....... 그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 손가락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귀족들의 연회장은 앞으로 1달 가량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나를 귀찮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시녀들은 하나둘 자신들이 만든 작품에 만족한 듯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한데 뭉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으아~~~~~~~ 답답해!!」 한껏 포장이 된 듯한 답답한 기분으로 난 그레이스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검술 장이나 건초더미 속을 뒤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종종 건초더미를 잔뜩 묻히고 잠이 들곤 했었다. 「왕자님! 어디 계셨습니까!」 그렇게 헐레벌떡 뛰지 않아도 달아나지 않는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그에게 주먹을 꼬옥 쥐어서 보여주었다. 「헉헉....... 좀더 찾아보고 찾을 수 없다면 병사들을 풀 작정이었습니다.」 「뭐?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이렇게 답답한 옷을 입힌 이유를 묻고 싶었어.」 「으헉~~~~~ 왕자님. 그러고 보니 머리..머리는 어찌된 겁니까?」 「모른다니까! 나야말로 자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귀족녀석들이 나와 내 형제들을 구분하지 못할까봐 그렇다고는 하지만... 냄새도 역하고 죽을 맛이야. 무슨 일인지 빨리 끝내고 씻고싶어.」 나의 빨리 끝내고 라는 말이 나올 때에 그레이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 그도 나만큼이나 머리색이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아.... 아무튼. 타이라. 그 머리와 복장으로는 어디간들 웃음거리가 될 것 같군요. 터번이라도 두르던지.... 쯧.」 「뭐야? 내가 여자들처럼 눈만 내놓고 다니길 바라는 거야!」 어제도 했으면서..... 난 열을 올리며 그를 노려봤다. 「푸헛... 생각 외로 잘 어울릴지 누가 알겠습니까? 타이라? 혹시나 청혼이 들어오면 결혼......으헉!!」 한 대 걷어차인 정강이를 들고 팔딱 팔딱 뛰는 그레이스를 젖혀놓고 난 이 상황에 대해 좀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나의 스승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수군거리는 소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흘끔거리는 눈 빛.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난 걸음을 빨리 했다. 전통의상이란 한 두 가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길고 긴 천 하나로 치마처럼 보이는 그것은 여러 겹으로 둘러놓은 가지각색의 천의 물결이었고 단단하게 가죽끈으로 묶은 허리에는 주렁주렁 보석을 달아야했다. 훗.. 그러고 보니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재산은 이 옷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검은머리위로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지만 전통의상의 완벽성을 가하기 위해 머리 위에는 터번을 둘러야했다. 남자들은 순수하게 머리만 살짝 둘렀고 여자들은 그 눈을 빼고는 모조리 가리는 비능률적이지만 사막에서는 가장 능률적인 옷이었다. 하지만 굳이 덥지도 않은 오아시스 속에서 이런 옷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전반적인 생각이었다. 「왕자전하?」 「아아....그만. 됐어 그 뒤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 「그.....그래도.」 「알아. 됐으니까.. 내 묻는 말에 간략하게 대답이내 해줘.」 들어서는 나를 보며 읽던 책도 떨어트린 불쌍한 레스터에게 난 손을 흔들었다. 그레이스가 아버지 같은 면으로 나를 보살핀다면 - 그는 총각주제에 정말 부성애를 느끼는 듯 하나부터 열까지 위엄을 갖추려했다. - 레스터는 그 점잖은 성격을 잘 활용하여 나를 괴롭히는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있었다. 뭐... 쉽게 말해 잔소리라고 하면 알 것이다. 「흠.. 대신들의 낙타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오늘은 무슨 날이죠?」 어라? 레스터도 모르는 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눈을 마주보며 그가 근심을 담아 물었다. 「왕자님도 모르시는 겁니까? 그 치장을 주렁주렁..... 허허. 아무튼 그 머리에 보석 띠를 달아줄 때라도 물어보지 그러셨습니까? 거참.. 달랑달랑.. 이쁘긴하군요.」 흐흐..... 레스터. 은근히 비꼬는구나! 「뭐.. 나야 달면 이쁘기나 하지. 레스터가 달면 얼마나 끔찍하겠어. 그야말로 괴물에게 귀걸이를 달아주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아~ 이제 저를 괴물이 어쩌구저쩌구 하셔도 화 내지 않겠습니다. 흠흠! 자 책 펴십시오. 오늘도 예외는 없습니다.」 저....괴물. 어찌되었던 수업은 하겠다는 레스터의 단호한 목소리에 난 그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책을 펼쳐들었다. 오늘은 혼자 떠들게 두고 싶은 심정으로. 레스터가 다시 무구하고 장엄하고 그 위엄이 끝이 없다는 우리의 세이카의 10대손 왕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이냐!」 들어서는 시종에게 나는 위엄을 담아 물었다. 「왕자님. 가이건왕자님의 전갈을 가져왔습니다. 지금 급히 오시라는 말씀이십니다.」 무슨 일일까.... 그가 들어서는 순간에 맞추어 심장이 이렇게 고동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레스터. 아무 말도 안 묻는 거야? 다 알 것 같다는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마. 무슨 일이야? 나의 이 모든 궁금증을 담은 눈빛을 그는 바라 봐주지 않았다. 난 조용히 책을 덮고 나를 기다리는 시종을 따라 나섰다. 「다녀올게 레스터. 다음페이지는 그 무구하고 장엄한 왕이 왜 죽었나 들려줘.」 「예............... 꼭. 들려드릴게요. 다녀오세요.」 등뒤로 따끔한 시선을 느끼면서 난 나를 기다리는 가이건왕자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이유도 없이 불렀던 예전보다도 더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오~ 나의 동생. 왔구나. 여전히 아름답구나!」 반색을 하며 나를 반기는 첫째형의 모습 옆으로 미소를 띄고 나를 바라보는 형제들이 보였다. 한번도 내게 이런 웃음을 지어준 적이 없었기에 난 당황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도 나처럼 정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 사교계의 파티라도 당장 열릴 분위기였다. 「타이라 세이카. 형들을 뵙습니다. 어인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일단 앉거라!」 자신들의 맞은편에 나를 앉게 하고는 그들은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첫째형의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하였고 그 비꼬기만 일삼는 둘째형의 입술도 살짝 미소를 띄고 있었다. 「음.. 말하자면 길지만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다. 나의 동생아!」 이런 적이 있던가? 저들의 입에서 나의 동생이란 말이 나온 적이 있던가? 나의 온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너를 세르판에 보내기로 했단다.」 오.......! 신이시여.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나의 성격상. 난 울어야했다. 그리고 애원해야했다. 보내지 말아달라고 형들과 같이 있고 싶다고 그들의 발아래 엎어져야만 했다. 「이런. 이런. 울지마 나의 동생아. 좋은 일이란다.」둘째형은 선심 쓰듯 말을 내 뱉었다. 「왜.. 왜 제가 그곳에 가야하죠?」 억지 눈물도 나오지 않고 식어버린 나의 가슴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볼모를 보내는 것쯤이야 내가 바보처럼 굴지 않아도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사실. 그것이 나 라는 것은 그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크란의 밀약을 아직도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난 형의 목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당신들만 죽는 것이 아니야! 라고..... 울부짖고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앞에 모인 4명의 형제들에게는 그것은 미쳐버린 막내의 헛소리로 들릴 뿐이란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난 소리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언제 출발하는지.... 알려주세요.」 처음으로 난 형의 품에 안겼다. 보고싶을 거라며 나의 등을 두드릴 때는 그 허리춤에 장식용으로 달린 칼을 뽑아 찔러버리고 싶었다. 방을 나올 때 수런거리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나만 한 공간에 격리된 것처럼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 쌓였다. 정신 없이 걸어서 간 곳은 아버지가 누운 병상이었다. 여전히 그 미약한 숨만 내쉬는 아버지의 모습에 난 그 옆에 주저앉았다. 흐흑......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셨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전........ 이 나라를 지키지 못해요. 홀로 외따로 있어도 외로움 따위 다 거짓이라고 혼자 되새기고 되새겨도 전 외로웠어요. 아픈 어머니는 생을 마감할 날이 다가오고 아버지 마저 이렇게 되셨을 때........ 전 죽을 결심을 했답니다. 아니요..... 대답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는 것도 조국 세이카를 사랑하시는 마음도 모르지 않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나설 때에는 시종이 문 밖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난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걸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멈춘 발걸음은 연회장으로 쓰는 왕궁의 홀이었다. 아차! 하고서 뒤돌아 나가려는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첫째형이었다. 「마침 오는군요. 이리 오거라. 나의 타이라.」 아주 애 띤 소년이었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헤론만 아닌 듯 - 중년의 나이인 헤론은 그 품위가 매우 고귀하다고 대륙에서 소문이 났다. - 나머지 기사들은 숨을 삼켰다. 「타이라 세이카. 외국에서 온 손님을 뵙습니다. 저희 왕국........ 세..세.. ..」 「됐다!」 타이라의 말을 자른 것은 흑색의 기사였다. 그는 홀 안의 한편에 앉아 있었으며 맞은편 왕자들의 하얀 의상에 대조적으로 전신을 검은색으로 둘렀다. 흡사 그 머리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안될 것 같은 신념을 가졌는지 그가 신고 있는 신발과 장신구조차 모두 흑색이었다. 「그대들이 말하는 왕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난 이제껏 세이카에 5번째 왕자가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다.」 흑색의 기사의 말에 왕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저의 신분은 근위대장 그레이스가 증명합니다. 기사는 본디 자신의 명예를 걸고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심을 품으신 기사님도 알고 계시는 사실이시리라 믿습니다.」 푸하하하... 하고 검은 고수머리를 휘저으며 길이 웃었다. 거의 표정이 없기로 유명한 아레스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희기 현상을 목격하는 나머지 세 기사 - 헤론. 길. 아마드- 들은 의외로 총명하게 대답하는 사내아이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훗. 맹랑한 꼬마로고...」 일 국의 왕자에게 감히 하대하는 표현에 왕자들은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빳빳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동생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외교법상 제가 갈 때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전 고귀하고 지엄하신 세이카 폐하의 다섯 번째 아들이고 그 피는 진실 됨을 세이카의 기사가 대신 증명합니다. 제가 볼모로 가는 위대한 나라 세르판이 저희 일개소국인 세르판에 해줄 수 있는 약조를 듣고 싶습니다.」 놀란 것은 왕자들이었다. 우둔하고 멍청하여 울기만 잘한다는 그들의 동생이 또박또박 한치의 흔들림 없이 기사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모습에 그들은 중재하기도 지켜보기도 힘든 가는 신음만 내뱉으며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하하하........ 멍청한 자들 속에 진주로고. 약속하건데 그간의 우를 모두 잊고 우린 새로 세이카와 평화로운 대지를 지킬 것이다. 만에 하나 흑심을 품는 날에는 볼모는 죽을 것이고 세이카는 잔인하게 불태우리라. 사막의 모래 속에서도 흔적도 없어질 만큼 티끌조차 없이!」 흑색의 기사는 낮게 그리고...... 서늘하게 왕자들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그것이 왕자로서 타이라의 첫 대면식이었다. 5. 헤론은 아까부터 식사도 하지 않고 상념에 빠진 아레스를 보면서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레스의 오른손이 탁자를 또옥 또옥 두드리는 리듬에 맞추어 길은 눈동자를 굴렸다. 「하핫. 아레스 그만 속상해 해. 어차피 그 녀석의 마지막 발악이지 뭐. 세르판에 가게 되면 제깟 녀석이 힘이라도 쓰겠어? 제 형들의 울타리만 믿고 그러는 거지.」 자신을 위로하는 말에 아레스는 사색하던 얼굴을 들어 길을 바라보았다. 「훗.. 제 형들과는 다른 녀석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지. 그것보다도 왜 그들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왕자를 볼모로 보내는지가 더 중요하다. 어차피 그 어린 녀석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의 왕이 우리를 이곳에 보낸 것은 세이카와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왕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이 나라를 언제 쳐야하는가에 대해서.!」 서늘한 어조로 말을 남긴 아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기사들은 우울해하였다. 식사의 대부분을 남기고 사라진 아레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길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투덜거렸다. 「헤론! 폐하의 명령대로 저 녀석과 같이 있는 것까지 좋은데.. 도대체 아레스 녀석은 나이가 몇 살입니까? 대관절 1년 전부터 저 녀석에게 휘둘리는 것은 못 참겠단 말입니다. 볼모가 나타났으면 데려가면 될 것이고 그 판단은 폐하께서 하면 되는 것이지 일일이 생각하고 복잡하게...으구.........」 머리를 박박 쥐어뜯으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길을 바라보며 헤론은 살풋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그 또한 왕으로부터 서신을 받아 세르판을 위해 일하게 된 연고지 없는 외로운 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왕의 기사들은 모두 가정이나 친족 그 무엇과도 연결이 되지 않은 고아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란 것이 생각났다. 하물며 저 불만을 말하는 길 조차도 왕궁수비대에서 소문난 말썽장이로 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왕의 기사칭호가 내린 것에 놀랐다고 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여기 모인 그들은 서로의 깊은 내면은 모르는 셈이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타난 무예의 기사는 가장 냉혹한 판단과 무서운 검술을 자랑하는 실력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헤론은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은 노장이면서도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혈기 왕성한 길이 두어 번 덤볐다가 아주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은 뒤로부터는 길은 아레스에게 섣불리 덤비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간혹 가다 명령처럼 내 뱉는 그 말들에 상처받은 자존심이 울컥거려 뒷소리만 해댈 뿐이었다. 「그러데 말입니다. 헤론. 그 왕자란 녀석 말입니다. 굉장히 미인 아닙니까? 그 또랑거리는 목소리만 들으면 영락없는 계집인데 말입니다. 아레스 녀석이 바들바들 떨면서도 대꾸조차 못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하하핫. 아~ 결혼하고 싶어라!」 「하하하. 발톱 있는 고양이일세. 잘못 건드렸다가는 얼굴에 손톱자국이 난무할 걸~」 그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아마드는 꾸역꾸역 밥을 다 먹었다. 「그레이스! 이봐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근위대장이 훈련복을 벗다 놀라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둘러보았다. 「여기! 레스터하고 같이 있어요. 빨리 와요.」 소리가 나는 방향은 건물 왼쪽의 창문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년의 손의 움직임을 잠시 주시했다가 그가 자신의 어린 왕자임을 알게 되었다. 부리나케 갑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친우가 머무는 방으로 뛰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는 근위대장을 보며 타이라는 벌떡 일어났다. 초조한 기색으로 들어서는 근위대장을 잡아끌고 문을 꼬옥 닫은 다음 걸어 잠궜다. 「길게.... 있을 수가 없어요. 형들이 무척 화가 나서... 아무튼. 급해요. 빨리!」 「악!」 그레이스는 작게 비명을 내지르는 어린 소년을 바라보았다. 순간 자신이 잡은 소년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리는 것이 보였다. 희미하게 번진 그 핏자국은 하얀 의상에 점점이 피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벗어봐!」 「곤란해요. 시간이 없어. 그레이스. 앗....... 그만둬요.」 부욱.......찢기는 옷 아래로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심하게 내리쳐진 자국을 보건데 가죽 채찍인 듯싶은 그 자국은 붉게 부어올라있었고 점점이 피도 났다. 「헉.... 이 상처는 다 뭡니까!」 「흐읍... 만지지마. 아냐. 별다른 일 아냐. 레스터. 아까 하던 이야기....앗.. 손대지 마. 아파. 아프단 말야!!!!」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던 듯 소년은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중요한 것은 내 등의 상처가 아니야. 이건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야. 레스터 저번에 말한 당신의 말 기억해? 왜 여신의 강..」 「여신의 강을 이용한 병법이요?」 「응. 그걸 자세히 설명해줘. 그레이스. 잘 들어둬.... 앞으로 조만간 우리나라는 큰 전쟁에 휩싸일 거야. 조금이라도 선량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길 바라지만 쉽지 않을 것 같아. 뭣하면 내가 시간을 벌어볼 수도 있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 할 거야. 형들이 있다면 말이지.」 「......」 「뭘 보고만 있어?」 「......」 「아~ 알았다고. 난 타이라 맞고 당신들이 그동안 봐온 타이라 세이카야. 그 엉덩이에 반점 아직도 가지고 있지? 그레이스?」 「허억...... 레스터 날.. 꼬집어줘. 내가 요즘 몇일 뙤약볕에서 훈련했더니 드디어 헛게 들리나봐.」 「아니. 그레이스 저 분은 우리의 타이라 맞네. 아마도 자네와 날 감쪽같이 속인 여우같은 녀석인지는 몰라도 진실 된 피를 가진 타이라지. 훗.. 일설하고 중요한 이야기부터 하세. 우리의 시급한 논제는 일단 이것이 아니니까.」 어안이 벙벙해진 그레이스는 소년과 친우가 번갈아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우려한 방향보다 더 컸고 그리고 혼란한 상태는 그 이야기의 절반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결국.... 우린 전쟁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로군.」 씁쓸하게 내린 결론에 세 사람은 울적해졌다. 하하하. 그레이스의 그 놀란 얼굴이라니... 하하하.........하하......흐흑........... 웃음이 눈물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샘이 고장이 났는지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가해지는 매보다도 무서운 귓전을 때리는 말들. 그 혐오스러운 욕설들. 이를 악물고 그 매질에 견디는 것은 치욕이었다. 둘러보고 수군대는 형들이 시종들의 눈과 마주칠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그 방에서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 분간 정신이 혼미하였고 입혀진 옷도 한참 후에야 다시 추스릴수 있었다. 등이 화끈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 시진 만이라도 잠을 자두어야 할 터인데 생각보다 괴로운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잠은 오지 않았고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야심한 밤이었다. 그래서 난 왕궁에 꾸며진 정원으로 가기로 했다. 답답한 머리를 씻어 내고 흐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나면 조금은 개운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오아시스의 규모는 컸다. 그래서 대대손손 이어 내려온 왕궁의 건축가들은 그 오아시스를 멋있는 폭포의 정원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정원의 한편으로만 본다면 이 땅의 대부분이 사막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레스터의 말을 빌자면 우크란의 숲 속과 같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이건 대단한 규모임에는 틀림없었다. 시원한 물줄기를 계속 맞다보니 걸친 옷자락이 치적치적 불편했다. 전통의상은 벗어 던진 지 오래였지만 그렇다고 알몸이 아닌 이상 옷가지에 묻은 물은 꽤 무겁게 느껴졌다. 하늘에는 달이 이지러진 모습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달님.. 은은히 빛나는 고귀한 빛이여. 해는 원치 않는 자에게도 빛을 내립니다. 그 광활 한 빛은 구석구석 퍼져 때로 빛을 필요치 않은 사람에게는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달님.. 당신은 은은하게 빛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 어두운 밤 자락을 필요한 이에게만 빛을 나누어주는.. 전 당신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훗.. 그건 권력의 이야기인가! 요정이여......!」 「누구냐!」 「인간의 대지를 밟은 자는 태양의 따뜻함을 깨우치지 못하지. 그 커다란 빛을 물결 속에 당연한 듯 그것을 받지만 자신이 그 빛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요정이여. 그대는 빛이 강한 태양이 왜 자신을 우러러 보지 못하게 환하게 타는지 모를지어다.」 검은 밤. 나를 내려다보는 바위 위의 사내를 바라보며 사지가 굳기 시작했다. 그는 형체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한 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0년 전 즈음 대지를 밟고 돌아다닐 때에 아레스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폭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넓이와 굽이치는 물결을 자랑하는 물을 보았을 때. 그것이 대륙의 끝 인줄 알았다. 그 물이 여신의 강이라는 말을 듣고 오묘한 기분으로 그 주위를 돌아다닐 때에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강 주변은 의외로 복잡하였으며 그리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무리들과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석양의 빛에 휩싸인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 출렁이는 물살은 금빛으로 보였고 반사되는 빛은 더 찬란한 색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강의 어귀에서 긴 금발을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등 뒤의 금색의 물살과 굽이치는 머릿결의 금빛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리들이 자신을 찾는 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리고 뒤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아레스는 엄청난 실망감을 느꼈다. 그 자리에는 강물만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달아날 텐가!!」 「.........」 몸을 일으키고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놀란 타이라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늘 자주 오는 공간이었건만 자신이 서있는 정원의 구조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망가야 해! 누군지 알 수 없는 이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것도 어두운 한편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사람이라면 더 더욱이! 「다가오지 말아요.」 첨벙.... 사내가 바위위에서 물속으로 발을 옮기는 소리에 기겁한 타이라는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제법 빠른 몸놀림은 치렁거리는 옷자락에 제 속도를 내지 못했고 다급한 마음에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으악......... 노.....놓으세요.」 「훗.....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질지도 몰라.」 「무슨소리하는겁니까!」 「날개도 없는데 잘도 사라지더군.」 「놔. 당신 뭔가 착각하지 마. 멀쩡히 사는 사람을 괴물취급하지 말라고.」 기세 좋게 바라보던 사내의 몸이 살짝 굳었다. 「사람? 사람이라고?」 「그래! 난 사람이야!」 「........」 사내의 손에 잡힌 손목의 힘이 느슨해지자 타이라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내의 손에 힘은 더 강해졌고 반동으로 돌려세워진 순간 타이라는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따뜻한 숨결.. 입술을 덮는 부드러운 입술과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혀. 처음 겪는 이질적이고 소름끼치는 감각.! 동작을 마비시키는 부드러운 손길...... 「아........!」 「쿠쿡..... 인간이 맞구나. 그 입술이 따뜻한 것을 보니.」 쫘악~~~~~~~~~~~!!!!!!!!!!!!!!!!! 「손길도 매서운걸.」 얼굴이 화끈해지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부르르 떨리는 손과 가쁜 숨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나....난.............」 「무엇보다 기쁘군. 환상이 아니라니.」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면서 퍼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레스! 큰일 났다! 어디있냐~~~~~~~! 아레스.」 낮은 욕설을 들은 것도 같았다. 사내가 잡은 손길을 풀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타이라는 죽을 만큼 빠르게 사내를 밀쳐버렸다. 자신의 가슴팍까지 차오른 물속이었으니 그 깊은 물속에 빠진 사내는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푸학~~! 길! 중요한 일이.... 이런! 사라졌다.」 물을 헤치고 나오면서 그는 자신의 왼편 허리춤에 있는 장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댄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으.....으아~ 아레스! 그......... 그렇게 말하지 마. 농담 같지 않잖아! 으악~~~ 헤론!!!!!」 궁성안의 고요했던 정원에 사내의 비명이 울렸다. 이른 아침 왕의 4명의 기사는 위엄을 갖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카의 왕자들과 귀족들에게 짧은 인사를 한 다음 말을 출발시켰다. 그 뒤를 이어 궁성의 마차가 뒤를 따랐다. 세이카는 마차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마차 안에는 15년간을 후원의 작은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았고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는 전통의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그 손은 잠시 마차의 창을 살짝 어루만졌다. 분명 눈물이 떨어질 듯한 커다란 눈동자였는데도 그는 입술을 깨물고 울지 않았다. 안녕....나의 조국. 부디 강건하게 오래도록 남기를..... 소년이 하늘에 소원을 빌었고 마차는 그 빠르기를 더해 궁성에서 더욱 빨리 멀어졌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한참을 달리다 한 사내의 목소리에 나머지 세 명의 사내가 뒤돌아보았다. 달리던 말을 멈추고 그는 말의 머리를 돌려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아레스. 한가하지 않아. 빨리 가야한다고. 어두워지면 강을 건널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아레스. 우린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아쉬움을 가득 담은 기사는 말의 머리를 돌려 그들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난 나중에 갈 테니 일단 먼저 출발하도록 해라. 이 일에 대한 중요도는 내가 폐하께 직접고하겠다.」 검은 옷의 기사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무리에서 멀어졌다. 먼지를 잔뜩 일으킨 그 말이 점이 되어 사라지자 남은 사내들은 몸을 움직였다. 「출발합시다. 이러고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럇!」 세르판의 기사가 세이카에 온 7일째 날이었다. 6. 마차로 달린다고 하나 그 길은 궁성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길이 끊겼고 호위하던 마차의 일부 병사들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선두로 달리던 단초롭기 이를데없는 세르판의 기사들은 마차를 세우라 지시했다. 「왕자전하. 이제 저희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그 마차는 더 이상 모래 길을 달릴 수가 없습니다.」 헤론은 마차 문 앞에서 세이카의 왕자에게 말을 건냈다. 그러자 마차 문을 열고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이 내렸다. 아마 울고 있을 거라고 길이 아마드에게 소곤거리듯 말했지만 오히려 소년은 마차 밖의 풍경을 휘익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마차로 가실 수가 없습니다. 여신의 강으로 가는 길은 험난해서 더 이상 마차가 견디질 못합니다. 조금 쉬었다가 말로 출발하겠습니다.」 헤론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투로 약간 고개를 숙인 채 하얀 옷의 소년에게 말했다. 길은 신기한 듯 말에서 그 둘을 내려다보았다. 헤론의 말투는 언제나 깍듯한 예를 갖춘 말이었고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안겨주었지만 그가 굳이 일개 소국의 왕자에게 그것도 볼모에게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지금 여신의 강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일대가 험하다고 하셨나요?」 가늠하듯 소년이 주위를 둘러보자 길은 웃음이 났다. 다시 돌아올지 말지 모를 곳으로 가는 사람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풍경이나 논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마드를 바라보며 소년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웃기는군.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녀석이 여유로운데?」 찌릿..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자 길은 그 눈빛에 움찔 하고 놀랐다. 굉장히 노여워하는 얼굴이었고 그리고 바로 이어서 화사하게 미소를 띠며 자신을 바라보자 길은 의아해했다. 「아~! 제가 깜빡 했군요. 훌륭한 기사님은 주변을 바라볼 때 놀이터로만 보는 법인 것을 잊었습니다. 흠.. 길이 익숙하지 않아 실례를 끼칠지 모르겠습니다. 헤론님. 헤론님이 맞으시죠?」 헤론은 소년의 웃음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길은 은근히 비꼬는 말에 얼굴을 붉히고 궁시렁거렸고 아마드는 그 모습에 마구 웃었다. ? 보통이 아닙니다. 아레스. 당신의 말이 맞는지도.. 하하! ?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내는 모습에 헤론이 방긋 웃었다. 그 모습에 길은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내리 치고는 말에서 내렸다. 잠시 동안의 쉬는 시간이었지만 소년은 부지런히 주변을 둘러보고 그 발아래 흙을 집어 날려보고 그리고 발이 닿는 곳까지 걸었다. 아마드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 뒤를 쫓으려 하자 헤론은 그를 말렸다. 「그냥 두게나. 고향이 그리울텐데..」 「도망가면 어쩝니까!」 「허허. 마차도 돌려보냈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소년이 걸어서 갈까? 영특한 아이네 그냥 저리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냥 두게나.」 헤론은 느낄 수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걸어간 소년이 울고 있었음을.. 「조금만 말을 타고 가시면 여신의 강이 나옵니다. 그곳을 건널 겁니다. 그러면 왕자님을 맞이할 사절단들이 있을겁니다. 거기부터 도성까지는 여정이 멀지만 편하게 가실 수 있으실겁니다.」 「고맙습니다.」 짧은 대답을 하고 타이라는 말에 올랐다. 익숙하지 않지만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니라 자연스럽게 말에 올랐다. 뒤에서 이죽거리는 길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타이라는 여신의 강을 향해 말을 재촉했다. 여신의 강이 다가올수록 길이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바닥은 고운 모래가 아니라 자갈이 섞여있었고 울퉁불퉁해서 말이 가끔 투레질을 하기 시작하면 덜컹 하고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노련한 기수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 발을 빨리 했고 뒤쳐지지 않으려고 말을 모는 타이라는 힘이 들기 시작했다. 서늘한 기운이 몰려오면서 바람에서 물내음이 났다. 그때 기사들이 발을 멈추었다. 중년의 기사 헤론이 말을 멈추고 하얗게 사색이 된 소년을 뒤돌아보았다. 「그 말은 길에게 끌어오라고 하고 아마드의 뒤에 타십시요.」 「괜찮습니다.」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어두워지면 범선이라고 해도 말이 놀랍니다. 강에는 다리가 없지요. 말과 함께 수영하실지도 모릅니다.」 길은 낄낄 웃었다. 모래성에서 산 놈이 별수 있겠냐고 키득거렸다. 「그럼. 저 기사분의 뒤에 타겠습니다.」 길이 놀란 눈으로 헤론을 바라보았다. 「엥? 내 뒤에?」 「그렇다는군. 길. 왕자님을 잘 모시게.」 그래서 타이라가 타고 있던 말은 아마드가 줄을 이어 끌고 가게 되었고 선두에는 헤론이 그 제일 뒤에는 타이라를 태운 길이 달렸다. 한참을 달렸을 때였다. 태양은 이제 붉게 변하여 석양의 노을을 만들었고 바람은 이제 강물의 차가움을 담고 얼굴을 쓸어 내릴 때였다. 「으아아아악~~~~!」 「무슨 일인가!」 길의 비명에 앞장서던 헤론이 놀라서 말을 멈췄다. 멈추는 말 다리 사이로 자갈이 튀고 아마드 또한 놀라서 그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이 자식이~ 머리를 잡아당겨요~! 도저히 못 참겠네. 아마드~」 헤론은 말에서 내려 길의 뒤에 앉아 있는 소년을 안아 내렸다. 「기사님이. 제 허벅지를 더듬었습니다. 참을 수가 없었어요.」 「..!!」경악하는 헤론. 「으헉!!」신음을 내뱉는 아마드. 「무..무..무슨소리하는거야!!!」버벅거리는 길.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우는 소년을 바라본 두 명의 기사가 길을 바라보았다. 흡사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세 버릇이 도졌군! 궁성에 가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기사망신 다 시키는 녀석 같으니라고!!」 「무..무슨 소리야! 이 앙큼한 녀석 말을 믿는거야? 헤론~! 말해봐요.」 「흠흠.. 자네 버릇이 어디 가겠나.」 「으아아아악~~~~. 미치겠네.」 궁시렁 궁시렁.. 쭝얼쭝얼 거리는 길을 제쳐두고 헤론의 뒤에 탄 타이라와 뒤를 이은 아마드는 말을 제촉했다. 멀리서 범선의 돛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올 광경이었다. 강물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푸르렀고 그 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으며 그 물결은 잔잔하기 이를데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타이라는 자신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었다. 호수처럼 잔잔해 보이는 물결위로 햇살이 내려 눈이 부실정도로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황금의 물결 같아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에 헤론이 웃었다. 말을 범선에 끌어올리고 기사들이 배에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소년의 손을 잡아 끈 헤론은 배의 앞부분에 소년을 앉혔다. 「잔잔한 물결에 속지 마십시오.」 「네?」 「물 속에 길이 있습니다. 중심으로 갈수록 배가 흔들릴 겁니다. 조금 후에는 배 안쪽으로 오셔야 할겁니다.」 「아....! 그래도 괴.....굉장해요.」 순수한 감탄은 커다란 눈동자에 실려 헤론은 그 모습에 살그마니 미소지었다. 소년의 눈이 몹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헤론이 말을 진정시키러 가자 길이 뚜벅뚜벅 걸어와 타이라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흥~. 촌 녀석이 이렇게 큰 강을 보기나 했겠어?」 「......」 「너!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 「......」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강을 바라보는 타이라의 등을 거세게 친 길은 그 다음 슬로우 모션처럼 떨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경악스럽게 바라보았다. 풍덩........!! 「으아아악~ 헤론!!! 꼬맹이가 빠졌어요!」 아마드가 물에 뛰어들어 타이라를 건져 올리기까지 배 안은 정신이 없었으며 기사를 호위하던 병사들도 정신이 나간 듯 소년이 빠진 물가로 모여들었다. 건져 올려진 소년의 얼굴이 창백했다. 「빨리! 마른 천을 가져와!」헤론의 지시에 병사 하나가 천을 들고 왔다. 「으.......추..추워!」타이라는 낮게 신음했다. 「그 두건을 다 벗겨. 젖은 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 헤론의 말에 아마드는 반쯤 쓰러진 소년의 머리두건을 잡아 벗겼다. 「헉...!」 「우아~~」 소년의 머리는 길고 긴 금발이었다. 그 머리를 땋아내려 등까지 내려온 두건 속에 조심스럽게 숨겨놓은 머리칼은 젖었지만 아름다웠고 그제야 헤론은 소년의 눈의 색이 이해가 되었다. 아름다웠다. 「길. 자네에게 실망했네.」 「헤론..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살짝 쳤는데 빠질 줄...」「시끄럽네.」 「그러나 저러나..... 저 머리는.. 머리는.....」 「금발이네.」 「네. 헤론. 신기하네요. 저 녀석은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아마도 미움을 사겠지.」 「네?」 길은 왠지 모르게 굉장히 미안해졌고 기분이 씁쓸해졌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소년은 의외로 밝아 보였다. 길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미..미안..」 「흥.」 으헉.. 하고 놀란 것은 길이었다. 새침때기 계집애들처럼 콧소리까지 내며 짐짓 삐진 척을 하는 소년의 모습에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용서해줄게요.」 「정말?」 「네.」 「하핫.. 사실 내가 말야......」「대신 나중에 제 소원 하나 들어주세요.」 「하..하지만.」 「제 목숨을 노렸다고 세이카에 전언할까요? 아직 세이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 알았다고! 근데 넌 몇 살이냐?」 「흠.... 지엄하신 왕자께 반말하는 기사라~」 헉.. 하고 길은 낮은 신음을 뱉었다. 「몇 살이십니까. 왕자전하.」으드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15살이다. 기사여. 이제 그만 쳐다보라고 저들에게 전해줘라. 뚫어지겠다.」 「푸하하하핫~」길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올렸다. 그 나름대로 졌다는 항복의 표시였고 따라 웃는 타이라의 매끄러운 웃음소리가 선 내에 퍼졌다. 그리고 그들은 육지에 도착했다. 도착한 강의 반대편에는 굉장한 군사가 깔려있었다. 군복을 입진 않았지만 타이라의 눈에 비친 그들의 정렬방법은 군에 있는 군사들의 몸놀림과 비슷했고 익숙한 대열이었다. 그리고 세간의 눈을 두려워한 타이라의 머리는 다시 터번이 올려져 있었다. 아마드가 조잘조잘 떠드는 길을 바라보고 물었다. 「길. 언제 친해진 거냐?」 「후훗... 웬만한 여자보다 이쁘잖아!」 뜨악~ 하는 표정으로 아마드가 길을 바라보자 길은 털털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생명을 빚졌거든. 잘해주지 않으면 내가 죽게 생겼는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길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인파 속에 묻힌 타이라는 주변을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시종하나도 붙여주지 않은 형제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들은 흘끔거리며 자신을 바라보았고 신기한 동물 구경하듯 수군거렸다. 왕의 기사들은 각자의 말로 돌아갔고 마차는 우아하게 대지를 밟기 시작했다. 여전히 모래 와 자갈이 많은 곳이어서 마차는 쉼 없이 덜컹거렸다. 한참을 달리자 마차의 덜컹거림이 멈추었고 공기의 냄새가 향긋하게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차를 멈추고 내리고 싶을 정도로 푸르른 대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축복 받은 대지. 그 아름다운 땅이여.. 낮게 탄성을 지르며 눈동자는 그 푸르름에 현혹되어 정신 없이 빛났다. 저만치 가던 길의 말이 조금 뒤쳐지더니 마차 옆으로 붙었다. 「훗~ 고귀하신 왕자여. 신기하지요?」 「........」 「하하핫. 완전히 넋이 나갔구나!」 「세르판은 축복 받았구나. 억지로 심지 않아도 이렇게 푸른 풀이 땅에서 나오다니..!」 비꼬고 싶던 기분이 달아난 길은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막의 왕자가 처음 보는 풍경과 그리고 길의 더듬거리는 설명은 빠른 마차 속에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타이라는 나름대로 흡족해했다. 밤이 깊어졌고 더 달릴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들 무렵 마차는 작은 마을에 섰다. 「내리십시오. 왕자님.」 헤론이 내려서는 왕자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고 오랜 여행에 지친 타이라를 이끌었다. 마을의 가장 큰 대신의 집에 머물게 된 타이라는 고즈넉한 방안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몹시 이상한 기분. 그리고 사라진 기사. 도대체 그는 무엇을 하려고 사라진 걸까... 밤이 깊어오면서 몸은 더욱 피곤해졌고 반면에 잠은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가 문득 그가 생각났다. 긴 검은머리와 날카로운 눈동자. 그리고 서늘한 말투. 그리고 그가 하는 말에 아무도 의의를 달지 않은 이상한 무리들. 그리고..... 입맞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이 화악~하고 붉어졌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의 입술에 잡힌 손목과 안겨진 순간이 떠올라 흠칫..하고 놀랐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하염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들어서는 사내는 짧은 고수머리의 길이었다. 「이봐~ 왕자님. 잠이 안 오지?」 「......」 「너도 어지간히 말이 없구나.」 「자장가라도 불러줄 셈인가요?」 「하하하. 내 노래 들으면 잠이 더 안 올텐데.. 술이나 한잔 마시라고 가져왔다. 잠이 잘 올거야.」 의외로 상냥한 성격을 가진 길은 타이라의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감은지 오래 되지 않은 머리가 초원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고 창으로부터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공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즈넉했다. 잔에 술을 따라 부어주며 건내는 길의 옷은 편한 복장이었다. 무장은 그대로인 것이 의아스러워 그를 바라보자 길은 자신의 허리춤의 검을 한번보고는 피식 웃었다. 「검사란.. 늘 검을 아내같이 여기지. 자 단숨에 마시고 빨리 자라 꼬마야!」 「그..... 무예의 기사는 어딜 간 거지요?」 「아~! 맞다. 그 녀석 저번 밤 궁성 뒤 정원에서 날 죽이려고 했었어.. 으드득!」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길이 이를 갈며 자신의 잔을 비웠다. 「몰라. 무슨 금발인가............헉! 그러고 보니 너도 금발이네?」 「아........! 우린 어머니가 다 달라요. 유일하게 제 어머니가 금발이죠. 이 머리도 국왕폐하가 애원해서 자르지도 못하고... 이제 잘라야겠어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라는 말은 목에 턱하니 걸려 타이라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우아~ 무지 쓰다. 밤의 이슬보다 더 독해..우웃.」 「하핫. 그렇지? 머리는.... 자르지 마라.」 「........」 「그렇게 보지마! 잘되면 돌아갈지도 모르잖아.」 길은 마셔버린 잔을 다시 뺏어들고는 일어났다. 독한 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온 전신에 퍼지자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잘자라... 내일 오후면 궁성 외각에 다다를 거야.」 대답을 듣지 못한 길이 잠든 소년의 이불을 덮어주고 나온 밤은 시원한 초원 바람이 대지를 간질이는 초봄이었다. 7. 초원은 넓고 그 대지는 따뜻했다. 새벽녘은 서늘한 기운이 약간 돌았을 뿐인데도 그 추위로 인해 잠에서 깬 타이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아직 어두운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대륙의 사내들에게는 익숙한 따뜻함이었을지 모르나 사막의 더운 열사의 기후에 익숙해진 몸은 아쉽게도 추위를 탔다. 서늘한 기운에 몸을 파르르 떨리자 타이라는 팔을 들어 몸을 꼭 끌어안았다. 웅크린 몸 아래로 따뜻한 이불이 발치에 걸려있었다. 문득 간밤에 다녀간 길이 생각나 타이라는 피식하고 웃었다. 대개의 반응 중 두 번째 반응을 목격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사람들에게서 호감이라는 것을 얻는 것에 대해 매우 겁을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 때는 모두 적으로 보였고 상당히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잘 하면 그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조금 가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레이스와 레스터 같은 친구는 될 수 없겠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친절한 헤론보다는 편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술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 두통이 왔다. 지끈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제법 견딜 만 했다. 조금 추운탓이겠거니 하고 발치에 걸린 모포를 잡아끌었다. 신기한 나라였다. 땅은 부드러웠고 온통 푸른색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는 신기함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슴 한편에 억눌린 무거운 일들이 생각나 기쁨으로 웃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을 침대에 웅크리고 있다가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느 곳에서 보든 그 태양은 밤을 가르고 찬란한 빛을 뿜으며 하늘의 한편을 붉게 만들었다. 아침식사 시간은 매우 조용했다. 왕궁의 기사들의 옷차림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를 대하는 귀족은 쩔쩔매고 안절부절못했다. 헤론은 웃으며 편하게 말을 했지만 그 말끝마다 성의 주인은 ?예? ?예?를 연발하며 장황한 답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곁눈으로 타이라를 바라보면서 매우 신기해하였다. 성안에서는 터번을 두를 수가 없어서 타이라는 아침부터 긴 머리를 풀어놓은 상태였다. 머리를 땋아줄 시녀가 없었고 누군가를 부리기에는 마땅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조금 덜렁거리는 길에게 부탁하기도 민망스러워 타이라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조심히 걸었다. 타이라의 머리를 감탄스럽게 보면서 길은 그 주위를 뱅뱅 돌았다. 보다 못한 아마드가 길을 잡아서 나갈 때까지 길은 그 머리칼이 신기하다는둥 만져보면 안되겠냐는둥 호들갑을 떨었다. 칭찬으로 듣고 싶었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은 가루를 가져오는 건데 라고 생각한 타이라는 헤론에게 묻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 하려던 질문은「언제쯤이면 도성에 도착하겠습니까?」라고 바뀌었다. 헤론조차도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타이라는 낮게 한숨지었다. 「아.! 오늘 하루 쉬지 않고 달리면 도성외각까지 그러니까 수도까지 갑니다. 그리고 수도 안으로 들어가면 하루 더 쉬었다가 또 하루를 가야합니다. 알현 후에 바로 쉬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지요?」 「휴우..... 멀군요. 아뇨. 머리를 가릴 것이 필요한데.. 그냥 터번을 두르겠습니다.」 「네. 그럼 조금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헤론은 그렇게 말하고 출발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떴고 남겨진 타이라는 자신의 방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둘러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왕자전하. 무슨 생각하시나요?」 길이었다. 아마드가 말리는 것에도 불구하고 길은 자신의 말을 마차 선두에 묶더니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긴 여행길에 말동무도 없어 심심하던 차에 타이라는 기뻐서 그를 안아주었다. 「아앗....!」 길은 타이라의 포옹에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정말 고마워. 오늘도 하루 종일 창 밖만 바라봐야 한다면 잠이라도 자려고 했어.」 순수하게 기쁨을 표시하는 얼굴에 길은 얼굴을 돌려버렸다. 자신의 눈에 비친 소년은 천성이 밝아 보였다. 「하긴. 나도 세르판을 여행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요?」 「왕궁 수비대였어. 어느 날 갑자기 기사칭호 받고 궁성 안에서 훈련했지. 그때 헤론은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아마드도 기사칭호를 받았지.」 「그럼. 그 무예의 기사는?」 「그 녀석은 몰라. 우린 다 떠돌이야. 그래도 우리 중에 그 놈이 가장 극비리지. 어디 소속이었는지 무엇을 하는 놈이었는지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 검술 하나는 높이 산다. 머리도 좋은 놈 같아. 가끔 제멋대로만 아니면 좋을텐데...」 「뭐하던 사람인지 몰라요?」 「글세..... 여행을 많이 해본 것 같은데... 흠흠. 왜 그놈한테 관심 있냐?」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라고 강하게 부정하여 보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없어 서운하다. 날카로운 기를 가진 사내. 그 검은 머리칼.. 자신과는 사뭇 대조적인 흑색의 눈동자. 「.......는......................거야.」 「....?!!!」 「내말 안 듣고 있었지!!!」길은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미안해.」 언제부터인지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길의 나이는 23살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에 맞지 않게 가끔 토라지는 모습은 타이라에게는 충분히 만만한 상대로 보였다. 「당신은 무슨 기사인가요?」 「하하핫~ 난 대륙에서 가장 멋있고 용감한 암기의 기사지.」 「암기?」 「응..... 난 정통 검법보다 암수에..」 「에이~ 그건 약은 짓이네!」 「뭐야? 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 줄 알아? 정통 검법으로만 적을 쓰러트리는게 아냐!」 매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길은 자신의 손으로 검을 잡는 시늉을 하면서 푸욱 찔렀다. 그 손끝의 매서움이 느껴져 타이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길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일 만만해 보이는 길이 대단한 검사인 것을 알게 된 타이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과연 자신이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남겨진 그레이스와 레스터가 얼마나 버텨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길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도 모르고 타이라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드믄드믄 풀밭에서 노니는 가축들의 모습이 신선했다. 점심을 간편하게 마무리하고 마차가 신나게 달린 결과 밤늦게 그들은 도성의 외각에 도착했다. 꽤 많은 시간을 달려왔고 그 광활한 대지를 달렸다고 하나 아직 하루의 여정이 남았다는 것에 그 넓은 대지에 놀랐지만 무엇보다 몸이 버티질 못했다. 안 아픈 곳이 없었고 굉장히 피곤해진 타이라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 다다른 곳은 굉장히 큰 성이었다. 「여기가 수도인가?」타이라가 물었다. 「아니. 여긴 스테론공작가 성이다. 여기서 하루 머물고 내일 바로 입궁 할거야. 혹시 아픈거야?」 길이 하얗게 질린 소년을 보고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들쳐업고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치형의 나무문은 육중하고 그 두께도 두꺼운 듯 했고 그에 어울리게 끼이이익 하는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차는 빠르게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서는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그 성의 규모는 타이라가 살던 왕궁과 맞먹었다. 아니 좀더 큰 지도 몰랐다. 타이라는 피곤함에 재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이 자신을 떠 안듯 부축하고 걸을 때에도 몸에 힘을 넣지 않고 끌려갔다. 헤론이 말에서 내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나이 먹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자 하인들이 금방 타고 있던 말들을 끌어갔다. 타이라는 눈이 감길 듯 졸음이 몰려왔다. 옆에서 부축해주는 길이 아니었다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중간중간 희끗희끗한 머리가 섞인 사내가 나타났다. 넓은 홀의 오른편에서 나온 그는 헤론을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이런! 반가운 손님이군. 그간 잘 지냈는가!」 「예. 스테론공작님. 중요한 손님이 있어서 잠시 머물기를 요청합니다.」 「허허. 그런 예는 그만두게.」 공작은 헤론의 뒤로 서 있는 일행을 보았고 그 중 하얀 옷의 소년을 보고는 헤론에게 말했다. 「황제폐하의 라나인가?」 「아닙니다. 세이카에서 오신 왕자님이십니다.」 「아...!! 드디어 왔군.. 그래. 피곤할테니 들어오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몹시 지친 타이라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두 기사는 공작의 말에 움찔했다. ' 황제의 라나. '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길은 순간 노여움에 휩싸였다. 길이 화를 내던 말든 아마드가 그 주린 배를 고파하던 말든 헤론이 공작과 이야기를 하던 말든 다 좋았다. 어디든 씻고 누울 공간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에 언제 나타났는지 한 귀부인이 타이라의 일행을 보며 말했다. 「이런. 무심하신 분들. 당신들이야 말 타고 하루 종일을 달려도 이상 없을지 몰라도 저기 계신 분은 쓰러지겠군요. 빨리 이리로 부축해 와요.」 웃어보려고 했지만 웃음이 나지 않았다. 길이 놀라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어깨에 화악~ 들쳐맸다. 순간 놀라서 비명을 터트렸지만 그 뒤는 키득키득 웃는 하녀의 치맛자락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녀의 세심한 손길에 몸을 맡기고 몸단장을 마친 타이라가 방에서 쉬고 있을 때에 방안으로 소녀 한 명이 들어왔다. 머뭇머뭇 하는 기색이 보여 타이라는 소녀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이 바라보는 신기한 사람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한달음에 타이라가 누워있는 곳까지 뛰어왔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밥 먹으로 안 가나요?」 「피곤해서요. 그러시는 공주님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나요?」 자신의 대답에 소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이는 10살이 갓 넘어 보이는 귀여운 아이였고 그 의복을 보건대 공작의 성에 사는 귀족이라고 생각되었다. 타이라는 소녀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으음.. 전에 왕궁에서 본 그 아이보다 당신이 더 예쁘다.」 「고마워요. 공주님.. 당신도 굉장히 아름다워요.」 「우아... 혹시 라나가 되려는 거야?」 「라나요?」 「응」 소녀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보려던 타이라의 질문은 소녀를 부르러 온 하녀에 의해 막혔고 그렇게 소녀가 떠나고 난 뒤에 타이라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그 날 밤에는 독한 술도 길의 말도 필요 없었다. 굉장히 피곤한 하루였다. 그리고 다음날 소녀의 배웅을 뒤로하고 타이라는 또 마차에 올랐다. 도성까지의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나면 입궁 할 수 있다고 했다. 멀찍이 소녀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길이 피식피식 비웃었다. 「뭐가 그리 웃겨요?」 「하하하. 그럼 안 웃기냐? 저 여자애가 너한테 언니라고 하잖아. 우하하핫~」 「훗~ 유치하긴. 나한테는 길을 보고 고릴라 같은 사람이라고 하던걸?」 「뭐야!!! 저 계집애를 그냥~ 확~! 하긴 제 부모 권력에 오냐오냐 큰 공주일텐데 뭘..」 「그래? 착하던데요. 오냐오냐 큰 것 같지는 않은데..」 「훗.. 우리가 머문 곳이 어딘 줄 알아? 황제폐하의 혈족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궁성 안에서도 그 꼬맹이는 자주 볼 수 있지. 서운해하지 않아도 조만간에 또 보게될걸.」 길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수도가 가까워서 그런지 마차 길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느라 타이라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풍요로운 도시에 햇살이 저무는 모습은 감명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살던 세이카의 왕궁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참을수록 가슴한구석이 턱 턱 막히고 숨이 갑갑해져왔다. 잘 지내고 있을까. 두고 온 고향이 그리워졌다. 드디어 도착한 궁성은 골드리안의 후예답게 금색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은 보통의 높다란 성과는 다르게 넓게 지어졌고 그 건물이 여러 채였다. 왕의 기사가 지나가는 길에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시종들이 길을 터 주었다. 마차는 궁성 터의 널따란 땅위에 섰고 많은 병사가 그 앞에 섰다. 「내리십시오.」 헤론은 자신이 보필하는 왕자를 마차에서 내려주고는 주위에 둘러서 있는 병사 중 직위가 높은 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사내는 소년을 호위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의 옷은 하얀색 그리고 머리에 얹은 하얀색 긴 터번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날렸고 이국의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웅장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우린 해산입니까?」길이 헤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예전처럼 다시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짧은 몇 일간 그새 정이라도 들었는지 길은 매우 아쉬워했다. 아마드는 이제 쉴 수 있겠다며 나직이 속삭였고 헤론은 궁성으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사라졌다. 「이 곳은 어디입니까?」타이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물었다. 궁에 들어온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고 알현하겠다던 왕은 만날 수도 없었으며 이상한 골방에 처박힌 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답답했고 초조했다. 그래서 기다리던 끝에 저녁을 들고 들어오는 시녀를 잡고 물었다. 시녀의 얼굴은 금새 붉어졌으며 고개를 잔뜩 조아리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방안의 유일한 출입구인 육중한 방문은 쿵~하고 거세게 닫혀졌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본디 외국의 사신이 와도 이렇게 대접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되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방 한구석은 단조로운 침대가 하나 놓여있었고 그 멀찍이 장식용으로 탁자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장식용이라 비싸진 않았겠지만 깨지면 소리가 크게 날 항아리 병은 타이라가 써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챙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항아리의 소음에 밖의 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으헉!」 타이라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들어오는 사내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리고 쓰러진 사내의 목에 사내가 들고 온 칼을 들이밀었다. 「무..무슨 짓이오.」 「너희들의 왕에게 안내해라. 난 이런 취급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오지 않았다.」 「허헉...... 제..제 맘대로..」 「난. 인내심이 길지 않아. 빨리 안내해!」 타이라의 고함에 병사가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자신보다 더 커다란 포로를 끌고 가기 힘들었지만 타이라는 검술을 멋으로 배운 것이 아니었다. 사내가 주춤거리며 밟을 옮길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걷는 방향으로 걸었다. 「꺄아아아아악~」시종하나가 타이라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머지않아 타이라의 주위에는 병사들이 쭈욱 깔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병사들 사이를 헤집고 관리인 듯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나이가 많았으며 이상한 복장이어서 단숨에 그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의 왕과 이야기 하고싶다.」 타이라의 말에 그가 타이라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타이라의 검이 병사의 목에 스치자 붉은 선혈이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으아아악.. 살려주세요. 라는 비명이 들리자 그 관료는 귀찮은 일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일단 검을 내려놓으시오. 폐하께서는 황궁에 없소이다. 지금 잡고 있는 인질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소. 서로 피곤한일은 만들지 맙시다. 왕을 만나게 해드릴 테니 그 병사를 놓으시오.」 사내의 말은 단조로웠으며 그리고 무미건조했다. 타이라는 그를 믿어야 할지 말지 고민되었다. 그리고 딱히 그를 믿지 않아도 타개점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잡고있는 사내의 목에 칼을 살짝 치우고 물었다. 「왕을 만나게 해준다는 말 진심인가!」 「쯧... 만나게 해준다고 하지 않소.」 타이라가 가진 칼이 땅에 철크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동시에 뒤에서 병사들이 덮쳤다. 「이 나쁜 놈아! 놔라!」 타이라는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힘은 강해서 양팔을 포박한 체 눌러대는 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라나의 궁에 넣어라. 거기 있으면 폐하를 만나겠지. 그리고 인질로 잡혔던 저 병사는 죽여라. 별 쓸모도 없는 놈 같으니.... 쯧.」 그 늙은 관료는 귀찮은 일을 해결했다는 표정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놔아~~~~~~~~」 바둥거릴때마다 악을쓸때마다 몸이 파르르 떨렸고 사내들의 압박하는 힘은 더욱 거세어졌다. 「놔아~~~~~~ 나를 데려온 기사들을 데려와. 길을 데려와~~ 으흑~」 그것은 하나의 광경이었다. 시종들은 긴 금발을 흔들며 바둥거리는 소년을 보며 신기한 구경거리 하듯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타이라는 사내들에 손에 잡혀 한참을 끌려갔다. 궁이 하도 넓어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에 떡 하니 또 다른 문이 보였을 때는 타이라는 더 이상 반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갔고 그리고 맥이 탁 풀린 상태였다. 「비열한 세르판의 종들. 내 나가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낄낄낄...... 폐하를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 꼬맹아. 니 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에 보내준다는데 왜이리 바둥거려. 조용히하지 않으면 보내기 전에 두들겨 패줄테다.」 「흥.! 약조도 모르는 것들... 나쁜.........으헉...」 타이라는 뒤통수를 가격하는 거센 힘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한참 후에 깨어난 곳은 어두컴컴한 복도였다. 어디가 문인지 창문인지 심지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타이라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아...아파.!」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도 복도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복도를 뛰어가 보았으나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빛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겨우 벽을 밝히는 촛불로 어딘지 구분해 놓았을 뿐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기억이 안 날 즈음. 굳건히 닫힌 방문하나를 열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주 어렸을 적 읽었던 책의 내용처럼 귀신이나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어둠에 적응되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한참을 들여다 본 후에 그곳이 작은 방임을 알았고 그리고 더 한참 후에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보였다. 「누구니?」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순간 타이라는 기절할 뻔했다. 「거기.....누구 계십니까?」 「이런. 사람의 목소리가 맞구나. 넌 여기 시종도 아니구나.」 「어떻게 아시죠?」 「여기 시종은 발소리를 내지 않아. 넌 꽤나 시끄럽더구나.」 타이라는 한참 후에 그가 상당히 긴 검은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란 것을 알았다. 흡사 귀신같은 그 모습에 타이라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사내는 자신이 앉아 있는 침대 옆을 툭툭 두드리며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처음이니?」 「어딘지..... 몰라요. 이곳이.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요?」 「휴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그 사내의 숨결에 타이라는 흠칫 놀랬다. 그는 자신이 옆에 있는데도 바라보지 않았다. 「시력을 잃고있어. 폐하를 모신지 10년이 넘었거든. 넌 여기사정을 모르는 것을 보니 팔려왔나 보구나. 그래도 가히 나쁘진 않을 거야. 너같이 어린 아이는 사랑을 받을 거야.」 「무......무슨 소리하는 거예요!」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타이라는 되물었다. 「어머. 황제폐하의 라나가 아니니?」 「안 그래도 그 소리 여러 번 들었어. 난 그 소리가 뭔지 몰라요.」 「라나....」 「라나....」 「라나....」 그는 작게 세 번을 중얼거렸다. 「황제는 다른 후사를 두지 않아. 그건 골드리안 후예의 정통파를 골라내느라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초원의 맹수로 자라기 바라지. 그래서 싸움을 할 여지를 만들지 않아. 그럼..... 왕은 후사를 하나만 두기 위해 아내를 하나만 만들 것이고 첩은 둘 수가 없지.... 권력에는 색욕이 따라다녀. 여긴 폐하의 애첩들이 기거하는 곳이지. 나도 대 황제를 모셨을 때는........... 아름다웠는데... 훗.. 젊었다는 소리야. 놀라지마. 너 같은 어린아이였어. 여긴 10살부터 들어오는 아이도 있어. 한번도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만 종국에는 눈이 멀어 그리고 늙어죽지.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이 향.. 이 실내에 감도는 향은 굉장히 좋지 않아. 오래 살수가 없어. 하아........ 힘들어. 그만 나가 줘.」 라나......... 이런 더러운......! 흐윽........ 타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은 황제의 노리개가 될 수 없었다. 「나가는 길을 알려줘..!」 「몰라..... 나도 내 눈이 안 보인다는 것 말 안 했니?」 「안 돼~~~~~~~~~~~!!!!!!!!!!!!!!!!!!!!!!!!!!!!!」 찢어질 듯한 비명이 라나의 궁전에 울려 퍼졌다. 「뭐? 어디에 있다고?」 길은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아레스의 눈빛에 오금이 저려왔다. 한 번 본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살수를 가지고 아레스에게 달려들 때 딱 한번 저런 눈빛을 보인 적이 있었다. 「라나의 궁에 있다고 했어.」 길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칼을 목에 들이대고 묻는데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왜. 황제의 명령도 없이 거기에 넣었지?」 서늘하게 아레스의 목소리가 다그치지 시작했다. 「몰라. 나도 어제 알았어. 하도 난리 난리를 쳐서.....으힉.. 칼..칼 좀 치워 줘. 내가 넣은 것도 아니잖아. 아..아무튼 그래서 늙은 대신 하나가 거기 처넣었대. 나도 꺼내오고 싶었지만 한번 들어가면 왕의 명령 없이는 데리고 오기 힘들어.」 「젠장!」 길은 자신의 목에서 사라진 칼을 보고는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긴장한 뒷목이 빳빳해 왔다. 「앞장서라 입궁한다.」 「뭐?」 「아니다. 혼자 가겠어.」 「아냐. 어차피 같이 가려고 했어. 헤론과 아마드도 연락해볼게.」 굉장히 빠른 말이 바람을 일으키며 궁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흑발의 사내는 다른 사내들이 말릴 세도 없이 터벅터벅 궁의 안뜰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곳은.... 금지구역입니다. 아레스님.」 「비켜라. 내가 네 명줄을 끊고 가길 바란단 말이냐?」 「그렇지만...... 폐하의 명령 없이는.....」 스릉........ 쿠욱.......... 단칼에 베어지는 사내의 목은 슬로우 모션처럼 떼구르르 굴러 목에서 토하는 피의 강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의 모습에 다른 기사들은 주춤했고 그리고 병사들은 흑발의 기사로부터 멀찍이 달아났다. 라나의 궁 입구에 보초병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아레스의 눈빛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으히히힉.........」 물러나는 병사들 뒤의 문을 열고 아레스가 뛰어들어갔다. 「그래서..... 이 공기는 좋지 않아요.」 「하아..........하아...... 그.. 그렇지만 기...기분이 이상해요...... 죽.....아읏......」 나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방방 뛰다가 끝내 자신의 목을 잡은 소년의 손이 점점 풀리는 것을 느끼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안돼.........난.......나가야해........」 띄엄띄엄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소년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타이라 세이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멀찍이 느껴졌는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기운이 몰려오면서 타이라는 쓰러질 것만 같았다. 투욱......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벌컥..하고 방문이 열린 것은 순간이었다. 「폐하?」 사내의 목소리가 반가움에 얼룩졌다. 흑단의 기사는 누워있는 소년을 안아들었다. 그리고 뒤쫓아오는 사내를 한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문 밖으로 사라졌다. 헤론과 아마드 길은 라나의 궁 문밖으로 나오는 자신의 동료의 모습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괜찮은거야?」길은 다급함에 물었다. 팔 안에 축쳐진 소년이 꿈틀거렸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헤론과 아마드는 길을 끌고 가라 모란의 방으로 간다. 그 방안에서 어떤 소리가 나도 들어오지 말아라. 라나의 궁에는 최음제를 섞은 공기가 돌아다닌다. 익숙치않아서 괴로울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하얀옷의 소년을 안고 궁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한참 후에 그 뜻을 알아들은 길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아마드와 헤론의 팔에 질질 끌려갔다 8. 모란의 방이란 이름에 걸맞게 방안은 흐드러진 꽃이 만발했다. 그 꽃들은 계절에 맞게 때로 모란꽃이 아닌 아름다운 생화로 꾸며졌고 그곳은 예로부터 골드리안중 신분이 높은 여성이 기거하던 방이었다. 그들의 계급은 황족은 골드리안이라 칭해졌고 직계황족이 아닌 귀족들은 실버리안이라 불려졌다. 각자의 실버리안도 자신들의 가문을 대표하는 성으로 불려졌지만 그것은 대개의 평민들에게는 어려운 일인지라 보통 가문을 대표하는 공로를 세운 사람의 이름에 실버리안을 붙여 부르는 것이 다반사였다. 아레스가 놓여진 침대에 소년을 내려놓았다. 상태를 보니 분명 라나의 궁에서 어지간히 뛰어다닌 듯했고 매우 흐트러진 옷차림이었다. 왜 시녀들이 발소리를 안내고 걷는지 그들의 움직임이 적은지 소년을 몰랐으리라.. 하얀 옷의 허리에 묶인 줄을 풀어 입혀진 옷을 느슨하게 해주는 아레스의 손길에도 소년은 죽을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아.......앗..........ㅅ......앙....」 아레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렇게 소년을 안고 나면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담겨진 여인을 더럽힐 것만 같았다. 아레스의 신경은 마치 팽팽한 줄처럼 금방이라도 툭. 소리를 내며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 세르판까지 건너가서 확인하고 싶었던 그 한 자락을 놓치기 싫었다. 「아.............아........앗..... 물...물을 줘요.」 라나의 궁에서 나온 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타이라의 숨결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텁텁한 공기가 폐 안 가득 자신을 누르는 것만 같아 맑은 물로 씻어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아레스는 나직이 한숨을 한번 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탁자 위에 놓인 호리병에서 물을 따라왔다. 물이 담겨진 그릇을 한 손에 들고 타이라를 살짝 받쳐들었다. 「으...음....」 붉게 상기된 얼굴로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사내를 올려다 본 타이라는 그가 입에 갖다 대준 그릇의 물을 먹기 위해 손을 뻗쳤다. 그러나 파르르 떨리는 손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고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극도의 흥분상태가 오면서 타이라의 육체는 사내의 손길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움찔하고 떨려왔다. 그 손길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웠다. 「소.....손..치..치워..아......앗.......응.....」 말과 동시에 밀쳐내는 손짓에 물은 입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침상위로 다 흩어졌다. 차가운 물이 옷에 쏟아지고 사내는 젖은 옷을 벗기기 위해 또 타이라와 실갱이를 해야만했다. 「참기 힘들면 자위를 해도 좋다.」 놀란 눈이 커다랗게 떠졌고 소년은 파르르 떨면서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무슨소리 하는......거야.. 나..나가.」 「물은 필요 없나?」 「아....아냐. 무......물 줘.」 일어나기 힘들었다. 솔직히 일어나면 그에게 추태를 보일 것만 같아 타이라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겪어보지 않는 느낌이었고 흥분된 기분이었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라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해주려는지 아무것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 당황스럽고 창피할 뿐이었다. 「할 수 없군.」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물병을 들고 온 사내는 타이라의 옆에 앉았다. 침대의 한쪽이 기울면서 타이라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사내의 손이 반쯤 쓰러진 타이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쓰러질 듯한 타이라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살짝 안긴 자세로 그에게 안겨진 것까지는 참을만했다. 그가 그 긴 손가락을 자신의 머릿속에 묻지만 않았다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흉한 짓은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무슨...짓이야..........응.....읏..」 「쉿!」 아레스의 긴 손가락이 머릿속을 감미롭게 간질이고 고개가 약간 젖혀졌다 그리고 사내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읍........!」 그리고 들고있던 병의 물이 아레스의 입에 그리고 타이라의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감기는 혀가 부드러웠고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듯한 느낌에 타이라는 계속해서 그의 입술을 어미젖 빨 듯 빨아댔다. 감고있던 손은 어느새 치워져 이미 옷섶을 다 벌려도 타이라는 그 손길에 흠칫 흠칫 놀랄 뿐 제재하지 않았다. 「하악...........하악..........」 거친 숨을 내쉬며 타이라가 사내의 손에 흔들렸다. 사내는 이제 반쯤 흘러내린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거칠게 살아있음을 호소하는 타이라의 페니스를 거머쥐었다. 「울지마라.」 귓전에 들리는 소리는 한번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자신의 신음도 흔들리는 침대의 리듬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온 피가 한곳으로 몰리는 듯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난 뒤 타이라는 투욱.... 팔을 떨어트리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타이라의 눈에 비친 모습은 긴 흑발을 한 사내가 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읽는 모습이었다. 침상에 늘어져 있는 하늘거리는 천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던 타이라는 몸을 일으키려다 기겁하여 다시 돌아누웠다. ? 누..누구지? ? 분명 자신은 이상한 복도에 놓여있었다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 그래. 긴 머리를 가진 남자였어..... 그래.. 라나라고 했어.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던 타이라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거의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마주보아주었다. 「호....혹시..」 선 듯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그리고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알지도 못하는 사내의 품에 안겼다는 것 자체로도 충격이 왔다. 멍해진 타이라를 바라보던 사내가 무표정의 얼굴로 말했다. 「라나의 궁에서 너를 데려왔다. 세상모르고 잘 자더군.」 「잠들었던가요?」 「그래. 강물에 빠트려도 모를 만큼.. 그 곳 궁안의 공기는 무겁지. 환상이 보였을 거야.」 「환상?」 「그래.」 사내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환상이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앞으로 음란한 생각 따위는 다시는 안 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말하고 사내가 사라진 후에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시종들이 몰려들어왔다. 불편한 곳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픈 곳은 없는지 물을 때는 굳게 다짐한 마음이 흔들리며 집에 가고싶다고 말할 뻔했다. 「괜찮습니다. 사람들을 물려주시고 기사 중에 길을 불러주십시오.」 하명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사라진 시종들을 바라보고 타이라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그리고 왜 갑자기 대우가 좋아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의심할 수 없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장식까지도 그대로 달려있었고 사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물병은 그대로 있었으며 방안은 생소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던 타이라가 몸을 움직이려 할 때 길이 들어섰다. 험한 인상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길이 자신을 바라보며 김빠진 웃음을 지어 보이자 타이라는 안심이 되었다. 「어이~ 잘 지냈냐?」손을 흔들며 길이 시원스럽게 물었다. 「보고싶었어. ......그...그리고.....이.....상한 일을 겪었어.」 타이라의 말에 길의 얼굴은 잠시 놀란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금방 아무렇지 않게 피식 하고 웃은 사내의 얼굴에 타이라는 안도했다. 「허허... 피곤해서 그럴꺼다. 하긴 그 난리를 쳐대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조금 기다렸으면 고생 안하고 폐하를 알현할 수 있었을 거 아냐.」 「아르키사트 골드리안?」 「어? 이름도 알아?」 「훗.... 일국의 왕자가 멋으로 되는 줄 알았나?」 「신기하군. 세르판의 사람들도 그 이름을 잘 모르는데... 흠... 아마 신성시해서 그럴거다. 후사가 한 명이니 암살범도 많을테고 얼마나 조심해야겠어. 그러고 보니 페하도 힘들겠군. 늙겠어.」 「늙겠다고?」 「그럼 사람인데 안 늙겠냐?」 「늙겠단 말은 본적이 없단 소리야?」 「그럼..당연하지 신성시한다고 안 했냐? 여기 폐하를 직접 알현한 사람은 내무대신 정도일거다. 우리 같은 기사는 명칭만 그럴 듯 하지........ 아. 그러고 보니..」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을 머리를 긁적이던 길이 벌떡 일어났다. 「무..무슨 일이야?」타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널 데려 오랬다. 헤론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거든.」 생각지도 않은 싱거운 대답에 타이라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표정이 잔뜩 어렸다. 길의 눈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지만 더 알고 있는 것도 없었다. 타이라는 위험하지만 무엇인가 궁금증을 다 해결해 줄 것만 같은 무예의 기사를 생각했다. 그라면....... 알 수 있을지도. 작게 속삭이는 타이라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길은 벌떡 일어나 탁자에 놓인 물을 마시고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나가자! 굶어죽겠다.」 그래서 따라간 곳의 분위기는 안타깝게도 몹시 어색했다. 즐겁게 식사를 단촐하게 할 줄 알았던 타이라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타이라를 안주 삼아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인사를 나누고 할 겨를도 없었다. 털털한 길은 이름을 한번 불러주고는 그것이 소개의 다인양 널려진 음식을 향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에 열중했고 의외로 조곤조곤 살피던 헤론은 몇 마디 인사만 건내고 식사에 열중했다. 아마드는 처음처럼 말이 없었고 유일하게 그 모습이 보고싶은 무예의 기사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아마 성에 기거하는 기사가 아닌 듯 했다. 「헤론. 그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정중한 어조로 식사를 마무리했음을 알리고 일어난 타이라를 보고 길은 거의 남긴 밥상에 우울해했다. 식사하는 그들을 두고 성의 정원을 걸으며 그 푸른 잔디에 매혹되었을 즈음 헤론이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타이라의 옆에 섰고 여전히 인자해 보이는 미소로 타이라를 바라보았다. 「답답하진 않으실 겁니다. 폐하께서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궁안에서는 자유롭게 다니시길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수행원을 대동하면 궁밖 출입도 가능하며 필요하시다면 시종도 편히 부리시도록 어명하셨습니다.」 「왜. 만나주지 않죠?」 「그건....... 왕자님이 아직 타국의 왕자이고 흠흠.. 우린 세이카와의 약조를 전적으로 다 믿기 곤란하다는 대답이면 되시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볼모에게 얼굴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흐음.. 황제는 내게 무기도 주지 않으면서 나를 두려워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글쎄요. 제가 맛본 해독제를 누군가 들고 있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독약은 황제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놀라서 바라보는 타이라의 눈을 직시했다. 잠시동안 헤론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전운이 감도는군요. 우리들 기사들이야 신나게 칼을 들면 좋지만 무구한 생명이 다치길 원치 않습니다.」 그는 경고하듯 말하고 사라졌다. 울적한 기분이 들었고 그리고 그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푸른 초원을 편안한 마음으로 밟아 볼 수 없는 것이 매우 슬프게 느껴졌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길이 다가와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에 길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성큼성큼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긴 머리의 끝을 잡아 손가락으로 흐트러트렸다. 「헤론이 겁줬지?」 「아니. 맞는 말을 했어.」 「킥킥..... 얼마나 무섭다고. 달리 노인네가 아냐. 아마 저 잔소리에 여자도 못견딜거다.」 「훗.. 그래? 궁안에서 자유롭다고 그랬는걸. 궁이나 안내해 줘.」 길은 신이 나서 반보 앞장섰다. 이미 퍼진 소문에 자신들을 돌아보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있었지만 그 소문이란 것 때문에 이제 타이라는 굳이 터번을 두르지 않아도 좋았다. 전처럼 대놓고 수군거리는 사람은 없었고 그리고 오히려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은 그만큼 처음 보는 것에 대한 경외심에 두려움을 가졌다. 구석구석 구경시켜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길은 별것에 다 관심을 갖는다며 성안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지만 타이라는 조심스럽게 그 방의 위치나 성안의 생김생김 그리고 문의 방향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이 짜증을 낼 무렵에는 성안에는 어둠이 물들었다. 길은 투덜거렸으며 밥을 먹기 위해 사라졌고 굳이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로 남은 타이라는 다시 한번 궁성의 구조를 답습하며 돌기 시작했다. 꽤 넓었고 그리고 무척 고요했다. 성의 여러 체의 건물은 흡사 살아있는 커다란 동물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의 구조를 알 수 없게 짓는데 도사인지도 몰랐다. 「이래서는 황제 방을 찾을 수가 없겠는걸....」 「왜. 황제궁을 찾으려하지?」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면 커다란 굉음일 것이 분명했다. 심장의 두근두근거리는 소리가 자신의 귓전에도 들릴 것만 같아 타이라는 낮게 호흡을 갈랐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나요?」 어두운 구석에 검은머리의 사내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훗. 어두운 밤에도 돌아다니라고 황제가 허락하던가?」 「무엄하도다.」 타이라의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사내에게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대에게 하대하라고 한 기억이 없다. 난 이 나라 왕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난 국빈의 자격으로 왔고 그리고 시종을 부릴 권한을 가졌지. 그건 네 나라 왕이 준 권한이며 이건 너에게도 해당한다.」 「?!!....하하하하하~! 딴에도 그렇군. 실수했어.」 그는 통쾌하게 웃고는 타이라가 서있는 곳으로 한발한발 다가왔다. 무엇인가 좋지 않은 예감에 타이라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무..무슨 실수..........읍!」 타이라는 갑자기 밀쳐진 아픔과 동시에 깨물린 입술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이.......이......」 다음 말은 화가 나서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만 사라져드리겠나이다. 왕자전하. 절대. 어두운 길에서는 늑대를 조심하십시오. 밤의 궁전은 사막의 모래성과 틀리나이다. 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빈정거리는 인사를 남긴 그가 사라지자 타이라는 다리가 탁~ 풀렸다. 화가 났다. 그렇지만 그가 잡은 팔목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더욱 열이 받았다. 젠장.........젠장!!!!!!!!!!!! 혼자 욕찌꺼리를 내뱉고 타이라는 궁전의 가장 어둡고 기슭한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품안에서 작은 나무를 꺼내었다. 입술에 대고 힘차게 두어 번 불자 휘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이라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삐익.......하는 소리가 또 다시 울렸고 여전히 그 하늘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 나서려는 순간 하늘 저편에서 커다란 새가 상공을 선회했다. 빙빙 두어 번 도는 그 모습에 타이라가 팔을 뻗자 우아한 날개짓을 하며 새는 사뿐히 소년의 팔에 앉았다. 새의 발목에는 작은 편지가 있었고 타이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9. 「란! 있었구나. 다행이야!」 타이라의 팔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어깨위로 앉은 새의 머리가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타이라는 새의 발목에서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혹은 작은 종이에 적힌 작은 글씨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필시 근위대장이 꼼지락거리며 썼을 소중한 내용이었다. 안부를 묻는 짧은글은 더없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다. 별 내용이 없다 하여도 란의 발목에 묶인 편지만으로도 타이라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그것은 고향의 내음이 묻은 소식이었다. 「그래그래. 너를 데려갈 수 없어. 알지? 아직은 내가 이곳에 나의 자리를 잡지 못했단다 란. 그래도 이 숲은 그 모래땅보다는 좋을 것 같구나. 날아가렴. 아~ 그냥 가면 그레이스와 레스터가 걱정하겠지. 어디 보자..」 타이라의 손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글을 적어낼 종이도 펜도 하물며 표시를 남길 천 조각도 없었다. 타이라는 자신의 하얀 옷을 내려다보고 옷의 장식으로 달려있는 반짝이는 장식의 한 부분을 투욱 뜯어냈다. 발목에 묶는 과정은 조금 어려웠다. 고리가 있지도 않은 그 장식을 치렁치렁 잘 엮은 후에 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자 란은 가볍게 푸드득 날개 짓을 하였다. 「좋아. 가려므나 란. 조심해.」 알아들었다는 듯. 상공을 휘익 선회하고는 새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허공을 바라본 타이라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어두웠고 그리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공기는 싸늘했다. 자신의 거처에 돌아와서야 아주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찾는 궁인들이 보였고 그리고 상급 관리인 듯한 사람이 나와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불만을 가득 담아 말을 건내자 그때야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되었다. 자유로운 몸이 아니란 것을.. 이곳은 보이지 않은 감옥이라는 것을.. 한동안 타이라의 일상은 매우 무료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 겸 궁터를 돌고 나면 몇몇의 기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 이후는 자유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할 일이 없게되면 주로 길과의 잡담으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꼬박이 먹는 길의 손에 이끌려 저녁을 먹게되었다. 「여기 온지... 몇 일이지?」길은 무엇인가 골몰하는 듯 하면서 타이라를 향해 물었다. 「흐음.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 「이상하군. 왜 폐하는........ 아니다.」 말끝을 흐리는 짓은 길답지 않은 대화법이었다. 궁금해진 타이라가 올려다볼 때까지 길은 무슨 생각인가에 빠져 타이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마는지 몰라도 다 알려주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 「푸훗.. 솔직히 왕자님. 내가 왕자님과 만나주는 거 아닌가?」 「글세.. 그렇다고 말하면 내가 너무 서운하잖아.」 커다란 눈망울에 담긴 슬픔에 길은 손을 들어 타이라의 금발을 흐트러트렸다. 「세이카가 의외로 조용하다고 생각돼서. 그리고 폐하는 왜 아무 말도 없을까.. 언제까지 왕자를 볼모로 잡고 있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자유롭게 궁을 거니는 볼모도 없거니와 아무도 제약하는 이가 없을뿐더러 만나주지도 않은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이상했다. 남겨진 왕자들은 조용하게 일을 벌이는 스타일들이 아닌 것은 알고있었다. 자신에게는 닿지 않지만 란이 계속적으로 상공을 선회하는 것은 아마도 별로 좋은 조짐은 아니란 것을 감으로만 알뿐이었다. 「왕을 알현할 수 있을까?」 「폐하를?」 「응. 묻고싶은 것이 있는데...」 「글세.. 난 별로 찬성하지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헤론에게 물어볼게. 아차차.. ! 난 그만 가봐야겠다. 검술장에 또 안가면 아마드가 잔소리할거야.」 길이 사라진 뒤에 할 일이 없어진 타이라가 궁성 터에 넓게 깔린 잔디 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궁성은 여러 체의 건물이 있었고 둘러본 결과 많은 궁인들과 병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궁의 규모는 자신이 살던 세이카의 건물을 몇 게 합쳐놓은 것만큼 컸기에 한달 간을 둘러보았지만 그 쓰임새를 다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과 친해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궁인들의 입은 너무 무거웠다.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는 길마저 없었다면 미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때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레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볼 때마다 서늘한 말을 내뱉는 그가 왜 머릿속에 남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타이라의 사념의 일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이상한 입맞춤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마는 자신도... 무심결에 자신이 밟고 있는 곳은 금장이 쳐진 잔디 위였다.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곳의 풀밭보다 그 풀의 느낌이 좋았고 그리고 발목을 간질이는 느낌은 흡사 물위를 휘젖는 느낌 같았다. 신고있던 신발과 발을 감싸던 천을 제거하고 맨발로 사륵사륵 땅을 밟았다. 그 느낌은 모래를 밟을 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부드러움과는 다르게 땅의 서늘한 기가 느껴지면서 몹시 좋은 기분이었다. 「후훗.. 신기하다.」 「흠.. 신기하군.」 메아리처럼 대답하는 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 동안 볼 수 없었던 고귀한 인물인 만큼 놀라움보다 오히려 반가움이 든 타이라의 입매는 방긋 하고 올라갔다. 「아레스?」 「이런. 이렇게 반가워할 줄은 상상도 못했군.」 「어디갔다 왔어요?」 「훗.. 그곳에서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충고를 미리 해주지.」 「네?」 「그 아래에는 시체가 있다.」 「으아아아악~~~~~~~~~~~~~~」 폴짝 하고 뛰어나오는 모양을 그리고 달려드는 소년을 받쳐 안은 사내의 검은머리가 출렁였다. 「시..시체? 무덤인가요?」 「후훗...」 놀라서 바라보는 소년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찌푸려졌다. 「음.. 내 충고를 안 듣는군. 궁터에는 늑대가 살지. 그 늑대는 잡아먹은 나머지 시체를 이 아래 파묻어.」 아레스의 눈은 매우 어두웠고 표정을 간파하기 어려웠다. 그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타이라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읍!!」 잡혀진 손목에 힘이 들어가고 그리고 손목이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타이라의 입술을 부드럽게 물어버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악............하.......... 왜....... 나한테 왜..........그러는거죠?」 「글세. 돌아다니지 말라는 내 충고를 무시한 결과다.」 자신의 손목을 놓고 사라지려는 사내의 옷깃을 황급히 잡았다. 「잠......! 잠시만요!! .......가지 말아요.」 돌아본 사내의 눈썹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올라갔고 얼굴이 빨개진 타이라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물어볼 것이 있어요.」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여긴 어디지? 둘러본 곳은 그의 집무실인 듯 했다. 그의 성큼거리는 발걸음을 따라 황급히 종종거리듯 따라왔으나 시녀하나도 없는 커다란 건물 안쪽으로 자신이 그가 내어준 의자에 앉을 동안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횡횡하게 사라졌다. 「무엇이 궁금하지?」 이 나라의 전통 차인가? 담갈색의 색을 띈 그 차는 향이 은은했고 따뜻한 김이 서려 추워하는 자신에게 참으로 알맞은 음료였다. 방안의 내 귀퉁이에 이상한 모양이 자리잡아 시선을 어찌 둬야 할지 난감한 타이라에게는 시선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찻잔이기도 했다. 「찻잔 구경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고 뭐가 궁금하지? 두 번 묻지 않겠다.」 「아......!」 본능적으로 그가 두려웠다. 속을 알 수 없는 헤론보다 무서웠으며 커다란 덩치의 길보다 무섭고 아무런 말없는 아마드보다 말을 건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궁금증을 대답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라면 아레스 이외에는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 매번 스쳐지나가듯 사라지는 그를 놓치기 싫은.. 왜인지 그는 자신의 물음에 답변을 해줄것만 같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폐하를 알현한 적이 있나요?」 그는 뒤로 느긋이 기대어 타이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너무 날카로워 타이라는 죄진 것 마냥 몸이 움츠러들어 들고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흐음......... 예전에는 황제궁을 찾으려 하더니 이제는 내게 이상한 것을 묻는군.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지?」 「그래요. 하지만 알고싶어요.」 「왜?」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훗.. 황제를 만나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말은 할 수 있겠죠. ..........최소한 이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지는 않겠죠.」 「그대는 좀 특이하군.」 한참 후에 들려온 대답이었다. 그는 식어 가는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리고 얼굴색도 변하지 않은 체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통은 이런 처지를 비관하면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아니면 그대처럼 편안한 생활이라면 자신을 팔아버린 나라를 위해 그렇게 동분서주하지는 않아.」 무... 무슨 소리야? 「그렇게 끊임없이 궁을 돌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작은 머리로.. 후후훗..」 타이라는 일순 자신의 얼굴에 아무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밤마다 궁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풍경을 구경하면서 그 모양을 눈에 새기고 있음을 간파한 듯한 말투였다. 「무슨 소리죠?.」 「훗. 그건 그대가 더 잘 알지 않나? 이런 이야기보다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싶군.」 「.......!!」 「쿡... 어려운가? 비밀이 많은 왕자여.」 그 길로 뛰쳐나왔다. 그를 떠보려는 자신의 생각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음을 물론이거니와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직도 등뒤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허억......허억......」 얼마만큼 달렸을까? 돌아보니 신기하게도 자신이 오늘 아레스를 만났던 풀밭 위였다. 휘휘 둘러보다가 멀찍이 달려오는 길의 모습에 안도했다. 「어디갔다온거야!」 「아!....... 아레.... 아니. 주위를 둘러보았어.」 「으힉. 너 여긴 왜 들어가 있는거야!」 「여기가 어딘데?」 「라나의 무덤....」 「.......!!」 '.................늑대는 잡아먹은 나머지 시체를 이 아래 파묻어........' 순간 아레스의 말이 생각났다.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뼈를 내서 뿌리는 정도야. 무덤이라고 말하기는 거창하군. 그래서 여기 풀은 잘 자라지.. 흐익~ 내가 말하고도 기분 나쁘군. 하긴 라나의 궁에는 한해에 여러 명이 죽어 나와. 아.... 그리고 헤론이 폐하를 알현하는 것은 어렵다고......」 그래. 그 생각을 못했다. 라나. 라나. 라나. 그 방법이 있었다. 「고마워 길. 도와줘서 고마워. 나 먼저 가볼게.」 길은 황급히 사라지는 소년의 모습에 황당해하며 멍하니 서있었다. 그는 재빨랐으며 잡을 새도 없이 점으로 사라졌다. 세 번째의 편지가 왔다. 그리고 란의 발목의 묶여있는 그 내용은 타이라를 더욱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길게 쓰지 못합니다. 우리가 의논했던 세 번 째 작전을 써야할지도 몰라요. 타이라. 이런 어려운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타이라의 무운을 빌어요.' 이번에 날아온 세 번째 편지에는 레스터의 고상한 문체였고 그만큼 세이카는 다급한 상황이란 것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듯한 자신의 생활에 그나마 소식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가지. 란의 편지뿐이었다.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못한 듯 했다. 밤이 찾아왔고 타이라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품안에 갈무리한 작은 단도 하나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깊이 심호흡했다. 성의 중간중간 병사들이 보초를 섰지만 자신이 꾸준히 익혀온 그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병사들의 눈을 피했다. 금색이 빛나는 머리가 거추장스러워 타이라는 검은 천 아래 자신의 머리를 가려놓고 옷도 검은색의 천으로 빛을 흡수했다. 조급하게 뛰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자 타이라는 긴 머리 체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보초병 앞에 당당히 섰다. 의연하게 걸어오는 소년의 모습에 보초병은 의아한 듯 소리도 지르지 않고 자신의 허리춤에 검 자루를 손에 쥐었다. 「넌 누구냣!」 「아앗. 기사님~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 마세요.」 「넌.... 그때의 그 꼬마아니냐?」 「아하핫.. 기억하시는군요. 저도 기사님들을 잊지 못해서 왔답니다. 이런 여긴 너무 트였어요. 아......따라오세요.」 머리칼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사내들을 홀리는 웃음을 지으며 손짓을 하자 보초로 선 두 명의 병사는 서로를 마주본 뒤 타이라를 따라 궁의 뒤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킥킥.. 어린 녀석이 대담하구나. 킥.. 하긴 라나가 되려는 녀석이었으니 그 허리 놀림은 사내를 후리고도 남겠지. 이봐 자네가 먼저할거야?」 수풀사이 궁성의 뒤편으로 들어온 사내 둘은 서로의 바지를 내리며 반쯤 나무에 기대선 타이라를 보며 침을 삼켰다. 병사들의 욕망이 서린 눈과 그리고 부풀어 오른 바지춤을 본 타이라가 재빨리 그들 뒤로 섰다. 순간 자신들이 풀어놓은 검 집을 들고선 소년의 긴 장검이 보였고 그것이 병사들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흥.. 너희들 목이 달아날까 고하지도 못하겠지. 쯧.. 이렇게 해이해서야 원~」 자신이 사내를 홀릴만한 웃음을 지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체 기절한 사내들을 밟고 조심스럽게 라나의 궁앞에 섰다. 「흡.......」 숨을 멈추고 돌아보기에 좁고 어두운 궁 안은 너무 복잡했다. 그랬다. 미약한 이상한 향으로 자신이 괴로워했던 기억이 났다. 타이라는 준비해온 허리춤의 천을 풀어 자신의 팔목 중간쯤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어 들었다. 「흐읍......!!!!!!!!」 눈물이 흐르는 수준이 아니었다. 단도에 베어진 촛불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팔에는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선혈의 고통만큼 자신의 정신은 날카로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자..... 빨리 찾아보자.」 다짐을 하듯 옛 기억을 더듬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미궁..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던 궁전. 하인조차 발소리를 내지 않고 그리고 앞도 보이지 않는 라나의 궁. 그래서인지 검은 천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숙이며 걷는 자신을 아무도 놀라워하지 않았고 마주친 두 명의 하인조차도 고개 들어 소리칠 생각도 하지 않는 이상한 곳이었다. 두 번의 방을 스쳐지나가 잠시 열린 방안에 교태스러운 신음소리를 지나 자신도 모르게 벌개진 얼굴을 숙이며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에 그가 있었다. 방안은 여전히 탁한 공기였지만 그 공기에 비해 팔의 상처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미 묶어둔 천 아래로 피가 고이기 시작해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지?」 「당신께........묻고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너....넌? 그때 그 꼬마구나.!」 「네. 시간이 길지 않아서 길게 이야기 할 수 없음을 용서하세요.」 「아니야. 피곤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니 좋아. 사람을 본지 몇 년 되었어. 여기 하인들은 도대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발소리도 안나. 꼭 귀신같아. 넌 살아있구나..........어머. 피가 나니?」 「아.. 이건 신경쓰지 마세요. 조금 다쳤답니다.」 「그래? 흐음....... 치료할 약이..... 하인을 불러야겠......」「아뇨! 빨리 나가봐야 합니다.」 「왜?」 「이곳.....공기는 좋지 않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아.....맞아. 약이 섞여있어. 나야 익숙하지만.. 후훗. 여기 처음 오는 사람들은 모두 안기고 싶어 안달하지..... 너도 그랬지?」 대답할 수 없었고 시간이 촉박했다. 붉어진 얼굴은 이미 핏기가 가셔 하얗게 변하고 있었고 현기증이 돌기 시작했다. 「폐하가......어떻게 생겼지요?」 「쿠쿡.........넌 바보로구나.」 「.....??」 「그것을 알고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 어두운 곳에? 이 지옥 같은 곳에?」 「중요한일이예요.」 「비밀로 되어있는 것을 알면 목숨이 위험해져. 왜 라나가 어두운 곳에 갇혀있는지 모르는 게로구나.」 「말해주세요.」 「후훗..... 그래. 말해주어도 좋겠지. 네 피 냄새가 옅어지기 전에.....」 「폐하는 골드리안의 후예. 검은머리의 아름다운 사람이지. 아니. 때로 냉혹한 눈을 하고 있어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다더구나. 하지만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어. 이번 폐하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선대의 왕께서 그를 너무 아껴서......... 라나의 궁에도 들이지 않았기에 나는 선대의 왕을 모셨고 그 후에 즉위한 현왕의 얼굴은 몰라. 내가 모신 왕이 검은 머리였으니 그 또한 검은머리라는 것 밖에는........」 「이럴 수가. 당신이 모셨던 왕이...... 죽었다고? 그럼 아무도 그를 모른단 말야?」 「아........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여행을 많이 했다는구나. 그래서 그의 견문은 넓고 그의 검술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하인들이 떠들었어.. 하아........ 모두 자신을 기다리며 여기서 죽어 가는 것도 모르는 매정한 분.」 아........어지러워.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우리의 세 번째 계획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세이카여! 그 뒤로 돌아 나오는 타이라의 팔 아래로 고인 피가 흘렀다. 이미 입은 옷자락을 적셨고 현기증은 소득도 없는 행동에 사기를 잃은 타이라에게 더 크게 덮쳐왔다. 「으흑.... 마지막 방법도 불가해. 이젠 어떻게 해......흑..」 숨어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혼미한 정신을 추스려야만 했다. 그래서 택한 곳은 성의 서편 라나의 궁아래쪽 궁벽이었다. 궁의 처마 밑의 어두운 그림자 속이라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곳이었다. 하아........... 얕은 숨을 내쉬며 호흡을 조절하였지만 탈진한 상태로는 모란의 방으로 가기 힘들었다. '잠시 눈을 붙여야겠어. 한 시진만 자고 나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거야.' 누구지? 볼을 매만지는 느낌에 눈을 뜨고 싶지만 의외로 눈꺼풀의 무게는 무거웠다. 들려지는 느낌도 안겨서 이동하는 그 흔들림도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펄쩍 일어나서 뛰어내릴 만큼 기운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따뜻한 느낌에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코 끗을 스치자 저녁부터 굶은 타이라의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배...고....파.....」 「살아있군.」 「.......!!」 희미해진 시야에 보이는 것은 검은머리의 사내. 아레스였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내였다. 「여긴...」 「너의 방이다. 어제는 길을 잃었나?」 「흠... 다 알면서 비꼬지 말아요. 그래요 탈출할 길을 외우고 있었어요. 여기에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누가 너를 죽인다는 거지?」 「난... 라나가 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말하는 가치 있는 볼모도 되지 않으니 종국에는 죽겠죠. 아직 내게는 지켜야할 것도 있고 살아야 할 명분도 많아요. 내 행적을 당신의 왕에게 고할 건가요?」 「왜 그래야 하지?」 「밤마다 돌아다니는 것을 들켰잖아요.」 「그건 나와 관계없어.」 「......!! 당신 황제의 기사 맞아요?」 「훗........ 배고프다는 녀석이 주절주절 말도 많군. 심심치는 않아.」 「아앗!」 「잠시만 상처를 더 봐야겠다. 깊이도 그었군.」 사내의 매끄러운 손이 팔을 스치고 감아놓은 천을 벗기자 아직 다물어지지 않은 팔의 상처가 드러났다. 눈이 찔끔 감겼다. 「쿡.. 겁도 많아 보이는 눈이군. 용기도 가상하지 아팠겠군.」 「아아...앗... 만지지 말아요.」 「마음에 들어. 내가 제안을 하지.」 여전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왕과 만나게 해주겠다.」 「정말인가요?」 「대신 내 것이 되라.」 그가 서늘한 미소를 띄고 말했다. 10. 「그렇게 바라볼 것 없다. 말 그대로이니까. 내가 원하던 바를 해주려고 한다. 그 대가로 너 하나 내 것으로 하는 것. 너로서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겠지.」 「무슨 의미죠?」 푸근한 깃털배게 위에서 머리를 때어내고 싶은 심정은 없었지만 그의 말은 놀라웠고 타이라는 궁금함에 미칠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휘청이는 등을 살짝 받쳐주는 아레스의 손길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내게.....뭘 원하죠?」 「흠........ 상처는 당분간 조심해라 치료는 해두었지만 흉터는 남을 것 같군.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어. 후후.... 생긴 것은 계집아이들보다 여리면서 생각 외로 독하군. 너의 그런점이 날 자극한다.」 「말해요! 뭘 원하죠?」 「내 말에 대답부터 하는 법을 배워라. 넌 내게 두 번씩 질문하게 하는 취미를 가졌나 보지만 난 두 번씩 대답하는 취미가 없어. 뜻이 없다면...」「아! 잠깐... 당신 말대로 할게요.」 그 짧은 순간 머릿속을 넘나드는 고민은 다급함에 타이라를 궁지로 몰았다. 그는 무엇인가 확신을 가진 어투로 제의했다. 그것이 작은 일은 아니란 것을 본능으로 느끼고 대답하기까지 타이라는 초조함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대답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냉혈하게 보였던 그 얼굴이 밝게 변할 수 있음이 놀라워 타이라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쿠쿡.. 그럼 넌 내 것인가?」 「자.......잠깐만........이익........!」 아프지 않은 반대편 팔을 잡아 끌어당기자 타이라는 놀라 소리쳤다. 그의 입술이 숨결이 스치듯 부딪혔다. 놀라움에 저항할 생각도 잊지 못하고 따뜻한 입술을 받았다. 장난치듯 스쳐오는 전과는 달리 진지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우러나올 때까지 그는 꽤 긴 시간을 타이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하........아..........이.....이제 말해줘요.」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허억거리는 숨 사이로 말을 내뱉는 타이라의 얼굴을 그가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타이라의 머리칼을 쓸어 내렸다. 「왜......날 자극하지?」 긴 손가락이었다. 맵시 있는 손가락이 머릿속을 스치며 이내 스르륵 미끄러져 나갔고 그 손 끝에 자신의 머리칼이 걸려있는 모습이 눈물로 얼룩진 눈에 희뿌옇게 보였다. 「울지마라. 그렇게 울면..... 죽은 내 모후가 생각나.」 사내는 걸터앉은 침대 위에서 일어나 탁자에서 차를 가져왔다. 그 담갈색의 차는 아니었지만 따뜻했고 그리고 향기로운 차였다. 「마셔라. 아직도 추위를 느끼는가보군. 적응이 될 줄 알았는데...」 당신 때문에 떠는거야............ 난..........난 몹시 추워.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를 이곳에 보내놓고 너희 형들은 우크란과 도모했다. 처음부터 너를 이곳에 보낼 때부터 그들의 아니 세이카의 운명은 정해졌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 한 자락을 잡은 것이 있었지.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한번도 발견한 적이 없는 이상한 느낌. 널 두고보았어.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매 밤마다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는 네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지. 너 혼자 세이카를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그렇다면 당신은 황제에게 세이카를 구할 수 있는 진언이라도 해준다는 소린가요? 어..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자신의 말에 그가 차갑게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움찔하며 떠는 어깨를 다잡으며 그의 머리칼이 얼굴에 스쳤다. 그의 머리가 귓가에 살짝 다가왔고 그가 귀에 속삭였다. 「난......한 명의 라나면 족해.」 한 명의 라나? 라나? 그..그럼...........헉! 「아악~~~ 아르키사트 골드리안!!!!」 「영광이군. 이름도 알아주다니......」 그 다음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곧바로 정신을 잃었으니까. 허기지고 힘든 자신의 몸이 그동안의 단련된 체력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큰 사실을 알아버렸기에 타이라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모란의 궁에는 시종이 많이 늘어났다. 굶주렸던 뱃속은 아우성쳤지만 정작 입안을 넘길 수 있는 음식은 없었다. 둘러보아도 그는 없었다. 라나......!! 눈물이 흘렀다. 그와 한 약속. 세이카를 전쟁에서 구해줄 수 있는 확답은 이미 들었다. 조급하게 근위대장인 그레이스와 자신의 스승인 레스터와 의논하면서 꾸몄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다 쓸모 없게 되었다. 「흠....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나? 왜 다 남겼지?」 「............」 「달라질 것은 없어. 그렇게 보지 말아라. 머리가 좋은 듯 하니 주의사항을 알려주지 않아도 잘 알겠지. 난 마른 장작을 안는 취미는 없으니 거르지 말고 먹는 것이 좋을 거다. 앞으로 드나드는 시종의 말을 잘 따라라. 난 선대의 왕들과 틀리니 내 말만 따르면 그리 갑갑한 인생은 아닐 것이야.」 「라나의....궁에 가둘 건가요?」 「훗........ 그 궁에 들어가고 싶은가?」 「라나는 라나의 궁에 있어야....」 「아니. 지금처럼 아무도 나의 존재를 모르게 지낼 것이다. 그러니 너도 평상시처럼 지내면 된다. 오늘 세이카에 있던 병력을 방어수준으로만 남기고 철수 시키라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왕자. 오늘은 몸이 아프다며!」 들어서는 길은 자신의 눈에 뜨인 두 명의 사람을 보고 의아해했다.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자신의 동료 아레스와 그리고 금발의 왕자가 보였기에 놀라웠다. 「어? 아레스가 여기 웬일이야?」 「흠.... 시끄러운 녀석이 왔군. 난 가보겠다.」 「저.............」 타이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사라졌다. 「으악.. 얼마나 아프길래 운거야. 혹시 아레스가 괴롭힌거야? 이런...」 「아니..... 아니야. 나.. 나 혼자 있고싶어.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와 줘.」 「그렇지만............ 휴~ 알았다. 그럼 푹 쉬어.」 홀로 남겨진 방안에서 타이라는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최소한... 난. 죽지는 않아. 시도해볼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거야. ' 그가 자신을 라나로 지명했으니.. 그리고 한동안 아무 변화도 없었다. 우려했던 일처럼 아레스가 찾아오지도 않았고 자신이 라나궁에 잡혀가지도 않았으며 변화가 없는 일상을 보냈다. 그래서 때로 아레스와 나눈 이야기가 혼란한 틈에 자신이 주어들은 헛소리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신에게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려 말을 했다. 「타이라님. 오늘 저녁에는 외부 출입을 금하신다고 폐하께서 어명하셨습니다.」 「왜죠?」 「파티가 있을 것이라 궁내가 복잡하다고 괜한 의심을 살 행동은 조심하라고 전하셨습니다.」 「파티요?」 「네.」 시종장이 사라지고 난 후에 타이라는 생각에 잠겼다. 오늘쯤이면 란이 돌아올 것인데 자신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세이카는 어찌되었는지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필이면 오늘 외출금지라고 하니 마음이 갑갑해져왔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는 습관은 늘 남아있어 새벽녘이면 눈이 떠지곤 했기에 타이라는 이미 밖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고민 끝에 시종장을 불렀다. 시종장은 못내 못 미더운 얼굴로 타이라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불쾌한 얼굴로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도 확신하기 어려웠던 일이 시행되려는 듯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어.. 어라? 「파티에 참석해도 좋으시다는 허락이 내려왔습니다. 의복을 갖추시고 준비하시라는 어명이십니다. 저희가 돕겠습니다.」 으....으아~ 타이라는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 쌓였다. 그들은 평상시 시종들과는 틀렸고 머리에 하나씩 장신구가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상급 시녀들인 것 같았다. 그들이 말하는 옷은 세르판의 전통의상인 듯 했다. 세르판의 의상을 입어본 적이 없던 타이라는 그들이 갖춰주는 대로 의복을 입어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하지 말라고 그들의 손길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여성들의 키를 약간 넘어선 호리호리한 체격의 소년에게 입혀진 옷은 평민들이 성인식 때나 겨우 입을 고가의 천이었다. 그 비단결 같은 천 위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있었고 그 꽃을 딴 문양은 걸쳐진 옷단의 하단에 둥글게 자리잡고 있었으면 같은 문양으로 소매와 허리춤에 쭈욱 둘러있었다. 세르판은 소년들의 머리가 길지 않았기에 타이라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잠시 난감함을 표시했다. 의식이나 파티 때에 여성들을 제외한 남자들은 긴 머리체를 풀어서 흐트러트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머리사이에 색 끈을 넣고 땋기 시작했다. 그 땋는 중간중간 들어가는 색색의 끝은 머리를 다 땋고 나니 금색의 머리와 어우러져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소년의 귀에 귀걸이를 걸어주자 그때서야 타이라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입혀진 옷도 머리도 그들의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귀걸이는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의 장신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셔야 합니다. 직접 하사하신 물품입니다.」 「누가요?」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옵니다.」 그래서 귀에 걸린 그 금색의 아름다운 장신구는 그대로 귀에 걸린 채 타이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오전부터 치장이 꾸며졌기에 점심을 먹으러 갈 때 무척 불편하였다. 「우아....... 여기 다 모여있군요?」 늘 보이던 길을 제외한 헤론과 아마드 그리고 아레스의 모습에 타이라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도 그들은 궁성파티 때문에 이곳에 모여있는 듯 했다. 그들의 시선이 한동안 자신에게 머물자 타이라는 조금 어색해졌다. 「흐흠..... 여기 의상이래요. 아무튼 저도 오늘 파티에 초대받았어요.」 「잘. 어울리는군.」 길이 흡족한 듯 웃었다. 그들의 소년시절에도 입었던 옷이지만 의외로 이렇게 중성적이고 여성적인 느낌이 난적은 없었다. 무엇인지 형용할 수 없는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킥.. 오늘 그 옷 하루만 입지말고 매일 입어. 예쁘네.」 「흥. 길.. 이 달랑거리는 귀걸이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걸?」 「앗... 귀걸이?」 「응. 세르판 국왕이 하사하셨다고 하던걸.」 그 때 타이라의 말을 끝으로 헤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대편에 앉아 있는 타이라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 고개 숙여 타이라의 귀에 걸린 귀걸이를 유심히 보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혹시...... 라나가 되셨습니까?」 「네?」 「라나에게 내리는 귀걸이입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도.......... 아무도 당신에게 해를 가하지 못합니다. 최소한 그 귀걸이가 사라질 때까지는.. 어떻게.. 볼모에게 이런 일을..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아니... 그래서 세이카에서 병력을 물리신 건가? 당신은 폐하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뭐~? 뭐라고 헤론 무슨 소리야.」길이 헤론의 말에 크게 소리쳤다. 헤론은 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 함부로 다니지 마십시오. 귀걸이가 지켜줄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해를 가하는 무리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의 질투는 무섭습니다. 황제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지만 최소한 당신은 안전합니다. 최소한..... 그렇지만 귀족들 중 딸을 가진 이들은 당신을 꺼려하겠지요.」 「왜...... 하지만. 전 이것을 해야된다고 시종장이 말했기에 했습니다. 이곳 귀족들에게 위험한 인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빼야겠군요.」 타이라가 손을 들어 귀걸이를 잡아 빼려고 할 때였다. 「그냥 두어라.」 아레스가 말했다. 「세이카에 병력을 뺀 뒤로 넌 표적이 되었다. 그 대신들의 미움과 귀족들의 원망이 너에게로 화살을 달리했다. 최소한 그 귀걸이는 황제의 라나로서 널 지켜주겠지. 여자들의 질투라면 알아서 처신하면 된다. 그것조차 갈무리 못하고 밤마다 눈물이나 흘리는 바보 같은 녀석이 된다면 자결하는 쪽이 세상에도 도움이 되겠군. 훗.... 어떤 의미를 담든 그 귀걸이는 잘 어울리는구나. 저녁에 보자. 그 파티에는 나도 초대를 받았으니 보게되겠지.」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는 아레스의 등뒤로 길이 펄쩍펄쩍 뛰었다. 「야아~~! 잘나신 아레스녀석. 라나가 안전하다고? 누구한테서 황제한테? 아니면 이 나라에서.!!! 난. 왕자가 이곳에 볼모로 있는 것도 싫은사람이야. 왜 이런 치장을 달아주면서 까지 이 아이를 감싸는거지? 불쾌해. 왕자. 혹시 황제를 알현했어? 어떻게 너에게 라나의 칭호를 내렸지?」 「그만해라 길. 황제의 뜻에 이의를 다는 것은 반역이다.」 아마드가 조용한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리고 헤론이 타이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찌되었던 왕자는 우리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 되었군요. 몸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 정도는 배우셔도 될겁니다. 우린 황제의 기사이고 이례적으로 라나궁이 아닌 이곳에서 라나를 모시게 되었으니 몸을 지킬 검술정도는 알려드려야겠죠. 오전이나 오후 편하신 때에 저희들을 보러 오십시오. 시종장에게 이르시면 궁성의 훈련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검술을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 살수는 아니지만 방어는 가능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타이라는 차려진 식탁 위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길이 투덜거렸고 조용한 아마드 조차 인상을 찌푸렸지만 헤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약속한 파티에 가기 위해 타이라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발걸음을 옮겼다. 꽤 멀찍이 걷고 나서야 파티장에 다다랐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에 시선을 준다는 것 그리고 병사인 듯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이카의 왕자이신 타이라 세이카이 왕자전하 이십니다.」 웅성거리는 소리들 그리고 귀족부인들 틈에서 길이 뛰쳐나왔다. 그제야 자신의 눈에 보이는 한 무리의 귀족부인 속에 황제의 기사들이 둘러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아~~~~~~~ 살았다. 매번 겪는 거지만 지독한 향수 냄새야. 으아~ 하하. 널 뚫어져라 보는군. 그 머리 때문인지 몰라. 하하하. 답답하지만 조금 있다 나가자. 여긴 영 정신이 없다.」 「아. 좋아. 일단 참석했다는 사실만 알리면 되니까.」 「그래? 너도 나랑 뜻이 맞는구나. 그래도 왕자쯤 되면 이런 장소에 익숙하지 않나?」 「.......... 난. 이런 파티에 초대받지 못해. 아..... 그건 그렇고 시선집중이 되지 않는 곳으로 갈 수 없나? 정말 뚫어지겠다. 으구.」 「네가 예쁘니까 그래.」 「......??」 길에 의해 이끌려 간 구석진 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는 피할 수 없었지만 한동안 조용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웠고 그리고 우아했다. 풍요로운 물자를 자랑하는 듯. 그 옷가지들도 화려했다. 「나가자.」 빨개진 얼굴로 길이 앞장섰다. 타이라는 재빨리 그를 따라 나섰다. 한참을 궁안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길은 신이 난 듯 했다. 연신 쉼 없이 조잘거리는 소리에 그가 정말 기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만 돌아가야 해.」 꽤 늦은 시각이었음을 알려주듯 하늘의 별만 초롱거렸다. 길이 돌아가지 않은 이상 란을 볼 수도 없었다. 빨리 그를 보내고 란을 본 뒤에 거처로 돌아가야만 했다. 「..............해....」 「뭐라고?」 「타이라. 널 좋아해.」 「무슨......」 「날 쑥스럽게 하지마.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난 황제의 라나야.」 「아니야. 넌 라나가 아니야. 타이라. 황제의 라나는 라나궁에만 있어. 넌 라나가 아니야. 무엇인가 잘못된걸 거야.」 「미안. 길. 약속했어. 앞으로 조국을 떠나면서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그 여신의 강에 약속했어. 미안...........아앗......」 길의 성급한 손길은 소년의 옷깃을 찢어 내렸다. 부욱~하는 마찰음과 함께 찢겨진 옷자락이 너덜거렸고 드러난 어깨가 달빛에 반사되었다. 「이..이러지마.」 「미안. 계속 이러고 싶었어. 네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럴 수밖에 없다.」 「하지마아!!!!!!!!!!!! 흐흑................흑............ 길... 하지마.」 길은 손을 들어 자신의 품에서 흐느끼는 소년을 감싸 안았다. 성급하게 이리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황제의 라나가 되었다는 말에 자신이 감정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불모지 사막에서 그 여신의 강가에서 모래먼지를 날리며 서있는 소년은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뜨겁고 아프다는 것을...... 보내야하겠지만 보내기 싫었다. 어렵사리 등에 얹혀진 손을 떼어내고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에 그렁진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아 내어주고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다. 타이라. 그래도 내 옆에서 널 지켜줄게..... 앞으로는.. 이런 짓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놀라게 해서 미안해. 아직 내게.... 아니다. 가... 오늘은 돌아가.」 후다다닥.... 뛰어가는 소년을 보내면서 길은 흐를 수 없는 감정에 아파했다. 마음 같아서는 소년을 데리고 궁을 나가고 싶었다. 「무슨 일 있었나?」 「아니.......아무 일도 아니에요.」 모란의 방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타이라는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런 말은 찢어진 옷을 여미고서라도 하지.」 「핫!」 타이라가 놀라서 벌어진 옷깃을 여몄지만 찢어진 옷이 붙을 리 만무했다. 그가 일어나서 성큼성큼 다가왔고 놀란 타이라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방안에 그가 다가와 손목을 잡았고 그리고 잡혀진 손목 아래 길이 이미 성급하게 잡느라 만들어놓은 멍 자국을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타이라를 끌어 침대 위에 앉혔다.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욱........... 찢겨진 옷은 커다란 소리로 분해되었다. 그래서 그 팔목에 묶인 천이 드러났고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벌어진 상처 때문인지 천에는 붉은 물이 들어있었다. 천의 매듭을 푸르고 상처를 살펴보던 손길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묶던 끈을 푸르고 상처를 다시 감기 시작했다. 아팠지만 커다란 소리로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어의를 부르고 싶지만 조금만 참아라.」 「네?」 「그 보다 너를 먼저 안고 싶어.」 커다래진 눈을 마주 봐주며 사내의 눈이 웃음을 띄웠다. 그제야 타이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라나란 황제의 애첩..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절감하면서.. [완결/장편] 후원의 왕자 11-15 11. 여신의 강 주변에 깔린 그 끝이 보이지 않던 병사들이 사라진 후에 레스터는 근심에 빠졌다. 전해들은 소식과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금실의 장신구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들이 병력을 뺐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장에 발등의 불이 꺼졌으니 자신의 친우인 그레이스가 변방에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고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어두운 밤이 되자 사막은 몹시 추워졌다. 그 열기가 다 식기도 전에 온도차가 큰 땅덩이에는 추위가 몰려왔다. 강바람이 불어오며 저 멀리 말 한 필이 보였고 혹여 눈에 익은 그 모습이 자신의 친우이길 바라며 레스터는 궁 밖으로 걸어 나왔다. 히히히히히잉~~~~~~~~~~~ 긴 울음소리를 내며 말이 그 다리를 멈추었고 말의 안장에서 내리는 거장의 모습을 보며 레스터가 반가움에 그를 맞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어떤가!」 「말도 마라. 그 먼지 속에 쉴새없이 들이밀던 군사들이 갑자기 사라졌어. 무슨 연유인지 알 수가 없군. 란이 어제 왔다. 이게 그 편지야.」 전사의 모래먼지 묻은 손을 거친 작은 종이조각을 건내받은 레스터는 어두운 불빛 속에서 열심히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다른 내용은 없군.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나라 사정을 묻고 있어. 어떻게 대답해 줄텐가. 사실대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해주어야 하나? 갑자기 사라진 병력을 어떻게 설명하지? 아~ 이런 내 생각이 짧았군. 일단 들어가서 쉬게나. 우리의 어린 왕자는 잘 해나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지금 보니 자네가 먼저 죽겠군.」 「그래. 말 잘했어. 죽을 것 같아. 달리는 길이 짧다고는 해도 그 내리쬐는 볕에는 당할 제간이 없네. 자네의 병법이 맞아서 손실이 적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그 대군이 몰고 왔다면 내 목은 벌써 땅에 떨어졌겠지.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야. 우크란의 병사들도 다 도망가는 마당에 왜.. 그들은 우세하던 병사를 다 물렸는지.......」 그리고 성안에 들어선 그레이스가 레스터에게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보고를 드리고 와야겠네. 가이건 왕자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시겠지?」 「시종에게 여쭈어보겠네 일단........ 맞다! 큰일났어. 정신이 없어서 그 이야기를 묻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무슨 이야기?」 「편지에 우리의 세 번째 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레이스!! 왕자가 잘 지내고 있는게 맞아? 다시 그 편지 줘보게.」 다급한 마음에 레스터는 다시 한번 편지를 정독했다. -- 둘 다 잘 지내고 있죠? 종이가 작아 다 못쓰겠네. 난 잘 지내요. 세이카는 지금 어떤가요? 형들은 아직도 우크란과 도모중인가요? 궁금한게 많아요. 꼭 알려줘요. 이왕이면 나라 안팎 사정을 모두. -- 잘 지내고 있으리라고 레스터는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자신과 그레이스 그리고 어린 왕자와 의논한 세 번째 계획은 황제의 암살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궁과 황제의 생김을 알아야했는데 자객은 보내더라도 일단 그 생김을 알고 계획을 짜기에는 내부에 인물이 필요했다. 그 어린 왕자가 말했다. 「걱정 말아요. 시간은 많고 어차피 난 조국이 없으면 그곳에서도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겁니다. 죽지 않을 거예요. 레스터와 그레이스 둘 다 날 너무 아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 할거야. 신께서 날 데려가면 둘이 내 복수를 해줘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였고 레스터와 그레이스의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무거워졌다. 그렇게 떠나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레스터의 마음은 어두운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왕자전하 신 그레이스 이번 전투에 대한 보고를 드립니다.」 뒤룩거리는 살을 흔들며 가이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잘 준비를 하려했다가 깼는지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였지만 가이건은 전투에서 그의 실력을 얕볼 수 없기에 그에게 함부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수고했노라. 말해보라.」 「예. 적의 병사들이 여신의 강 밖으로 모두 물러갔습니다.」 「뭣이? 그럼 우리가 이겼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왕자전하. 그들이 병력이 우세함에 불구하고 그 병력을 모두 후방으로 뺐습니다. 저로서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라 혹시 함정이 아닐까 걱정하였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그건 우크란과 우리 대군의 기에 밀린 것이 아니더냐. 계속 앞으로 치고 나가야지 대장인 그대가 돌아와서야 되겠는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여신의 강을 넘어 계속 전진하라!」 「하지만 전하. 그들은 강합니다. 무고한 사람이 계속 죽어나갈 것입니다.」 「바보 같은.. 장군이란자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물러가라! 보기 싫다.」 「예.」 늦은 밤이 되었다. 사막의 밤은 궁전이라도 예외 없이 어둠의 신의 손길아래 놓여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레스터는 궁성의 환하게 켜진 불빛과 그리고 성 아래 펼쳐진 풍경을 훑어보고 몸을 움직였다. 레스터가 친우인 그레이스의 방에 찾아갔을 때에 탁자 위에 어지러이 널린 술병과 만취한 친우의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 재빨리 탁자 위의 술병을 한 손에 들고 그레이스 앞에 놓인 술잔을 치워버렸다. 「이리 주게.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왕자전하께서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은 간다만.. 자네가 이런다고 해서 세이카가 무사하다면 나도 같이 마셔주겠어.」 「하하하하하..... 내일부터 또 무고한 젊은 병사들이 죽어나갈 거다. 그럴수록 우리의 왕자는 그 감옥에서 더 숨이 막혀가겠지. 구해올 수 없을 것이고 언젠가는 다 죽을 거야!」 「아직 희망은 있네. 너무 상심 말게......」 「흐흐흐흑......... 흑........ 레스터. 난 난..... 아들처럼 키운 녀석을 잃고 싶지 않아. 그 녀석은 왕자들의 매질에도 더러운 욕설에도 한번도 내게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속상해 할까봐...... 혹여 왕자들에게 대어들다 죽을까봐.... 난. 타이라가 떠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게 병에 걸린 왕비전하를 부탁한다고 하고 사라지는 녀석을......... 그 녀석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흐흐흑.... 레스터......... 흐흑......... 끄윽.........」 커다란 사내의 어깨가 들썩였다. 레스터의 눈에 눈물이 맺혔으며 그리고 그 투명한 물이 조용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만약..... 그레이스. 왕자들이 계속 전쟁을 하려한다면...... 내가 우크란으로 가겠다.」 「뭐?」 「걱정 마라. 내겐 아니.. 난 우크란 국왕이 사는 궁전에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레스터의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술 취한 그레이스의 귓가에 울림처럼 퍼졌다.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졌다. 레스터는 자신이 밟았던 그 땅을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를 떠올렸고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일말의 타결방법이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갖고. 「자.... 잠시만요!」 아르키사트 골드리안이라는 골드리안의 정통 황제는 자신의 앞에서 당황해하는 소년의 모습에 웃음을 참고 있었다. 소리내어 웃지 않았지만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팔이 아픈가?」 「아....... 아뇨.. 아니 아파요.!」 「관계없다.」 자신이 내뱉는 짧은 말 한마디에 하얀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아레스는 간만에 흥이 나기 시작했다. 침대 끝의 더 갈곳도 없는 곳을 두리번거리고는 소년은 머리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문 뒤를 넘겨보았다. 아마도.. 한달음에 달려나갈 궁리를 하는 것이겠지. 「그..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지 마세요. 팔이 아프다니까요.」 「흠. 내 팔이 아픈 것도 아니고 죽을 고비는 이미 넘겼으니 위험하지는 않겠지.」 「하...하지만.」 「쿡..」 「그렇다면.. 술을 마시게 허락해주세요.」 술을? 아레스는 잠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왼손으로 오른팔에 묶여진 천을 누르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질려있는 모습에 약간의 술을 주어도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여봐라. 거기 아무도 없느냐!」 자신의 목소리에 시종장이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하명을 기다리는 그 시종장을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은 참으로 절박해 보였다. 후훗........ 신선하군. 간만에 즐거워. 「세이카에서 올린 술을 가져오라.」 「예」 시종장이 나가자 소년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종장은 탁자 위에 술병과 술잔 그리고 약간의 다과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원하던 술이 왔군.」 그리고 아레스는 탁자 위에 올려있던 술병과 그리고 술잔을 들고 두려움에 질린 소년의 앞에 올려놓았다. 쪼르르륵.......... 술병을 보자마자 그 병의 주둥이를 잡고 냉큼 술잔에 따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이 떨리는지 간간이 옆으로 흘리는 모습을 보고 아레스는 병을 빼앗아 소년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전에도 마셔본 술이지. 사막의 보주. 꽤나 독하던데 그렇게 많이 마시겠느냐?」 「관계없어요.」 관계없지 않았다. 속이 타 들어갈 것 같았고 모르긴 몰라도 잠시 후에는 뻘겋게 달아오를 것이 틀림없었다. ' 타이라. 넌 웬만하면 술 마시지 마라. 으구.. 네 잠버릇은.... 아이고 허리야. 아무튼 너랑 잠자리를 같이하면 내가 성을 간다. 웬수같은놈!! ' 이를 박박 갈던. 그레이스의 목소리를 상기하면서 타이라는 두 번째 잔에 술을 붓고 있었다. 하아......... 죽인다. 키키킥......... 술은 이래서 마시는가 보다. 「한잔 더 주세요.」 「그만해.」 병을 들어 탁자위로 치우는 모습에 타이라는 침대를 박차고 아레스를 지나쳐 탁자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사내의 다부진 몸이 자신을 막아섰고 아쉽게도 술병을 낚아채지 못했다. 「하하. 괜찮다니까요. 이쯤은 끄떡없어요. 한..한잔만 더 마실게요.」 꿀꺽꿀꺽........ 잔도 부족해서 이제 병째로 나발을 부는 모습에 아레스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하는 짓인가! 반은 흘리고 반은 목으로 넘어가는지 커다란 병이 엄청난 소음을 내며 땅에 떨어졌다. 「캬아~~~」 가지가지 하는군. 소년의 몸이 휘청 하고 흔들리자 아레스는 그 가냘픈 몸을 살짝 안아 받치고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은 붉게 자리잡고 있었고 눈은 반쯤 풀린 상태였으며 상의는 다 벗겨져 간신히 아래만 가려주는 자극적인 자세는 아레스의 마음을 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흡........놔..놔아.......압...!」 순간적으로 타이라의 입을 틀어막은 아레스는 괴성을 고래고래 질러대는 소년을 황급히 침대위로 끌어왔다. 「놔라! 이 나쁜 놈아~! 놔라!.. 아하하하하핫.......」 「조용히 해라.」 「키킥... 왜? 내가 당신 명령을 들어야 해? 당신이 황제라서? 야아아아아~ 여기 황제가 있..........으읍.............으웅우응..」 「겁도 없군. 감히 내 앞에서」 「으엉............................」 그로부터 한 시진 동안을 울며불며 때로 고성을 지르는 소년의 입을 수시로 막다가 종국에는 퍼져 잠이든 소년을 내려다보고 아레스는 기가 차서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대짜로 퍼져 자는 소년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코를 골지 않는 것이 신기할 만큼 소년은 침대 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타이라는 눈이 부시듯 흘러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잠이 깼다. 그 머리가 둥둥 울리는 증상과 함께 간밤의 일이 생각이 나자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찢겨진 옷은 다 벗겨져 있었고 자신의 옆에는 검은머리의 사내가 곤히 잠들어있었다. 「헉..... 맞다. 아무.....일.....도 없었지?」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으면서 타이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상당히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디 이상한 느낌이 드는 곳은 없었다. 「제발... 그만 흔들어라.」 누워있던 사내가 몸을 뒤척이면서 불만스러운 어조로 투덜거리자 타이라는 사색이 되었다. 그랬다. 간밤에 자신이 저지른 일이 생각나면서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아이고.. 죽었다. 「저.. 폐하. 아니.... 아레스....아니 전하.....아니.....」 「조용히해라.」 「네.」 굉장히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고 무서운 그 한마디에 타이라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끼워 입고 어제 그들이 이야기했던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일어나 나갈 때까지 신기하게도 검은머리 사내는 미동조차 없었다. 「어서오십시오. 왕자님.」 「네. 길은.......보이지 않는군요.」 「예. 당분간 궁내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어디 아프신 것은 아닌지요.」 헤론의 다정한 목소리는 아픈 머리를 맑게 해주는 기능이 있는 듯 했다. 둥둥 울리던 머릿속의 두통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에 타이라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닙니다. 간밤에 술을 마셨더니 속이 아파서요.」 「술을? 말입니까?」 「네. 속이 좀 좋지 않아서 오늘은 가르쳐주시는 것을 잘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동작을 가르쳐드리지 않습니다. 잠시 앉아서 보십시오.」 그리고 헤론은 병사 한 명을 불러 그들의 훈련장 한편에 타이라가 앉을 의자를 준비했고 타이라는 그들의 훈련을 지켜보게 되었다. 검사의 훈련은 기본적으로 창술과 검술 그리고 화살이 있었는데 그들은 초원의 기마 부대의 특성을 살려 병사들에게는 창술을 시키고 있었다. 창의 길이는 보통 창보다 길었지만 타이라의 눈에 비친 그들은 그 긴 창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아마도 꽤 많은 훈련을 한 병사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헤론의 검술시범이 있었다. 타이라의 눈을 뺏는 깨끗하고 멋있는 검법이었다. 긴 검을 그리고 꽤나 무거워 보이는 그 검을 그는 가볍게 휘둘렀고 그 동작 하나 하나에도 필요 없는 동작이 없이 매끄럽게 검이 흐르자 타이라는 낮게 감탄사를 흘렸다. 땀으로 맺힌 중년의 기사 헤론이 다가왔다. 그리고 넋이 나간 타이라를 바라보고 그리고 살짝 미소를 띄고 말했다. 「일단. 왕자님께는 방어 법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굉장하신 실력이세요. 헤론. 당신처럼 되려면 얼마나 배워야하죠?」 헤론을 바라보며 의자에서 서서 박수 갈채를 보내는 타이라의 등뒤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세. 왕자. 그대의 실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틀리지. 간밤에는 고마웠다.」 「히익~ 왔.....왔군요.」 타이라는 느릿하게 뒤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처음 그를 봤을 때 그 모습처럼 아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검은 걸쳐진 옷부터 그 신발까지 모두 흑색이었고 그에 어울리는 검은머리를 단정히 묶고 헤론과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타이라의 옆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멈칫 멈칫 하는 타이라를 한번 바라보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검을 들어라. 아무거나.」 타이라는 자신 앞에 놓은 여러 개의 검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에게 검을 들라는 이유를 알 수 없거니와 어디까지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어야 할 지에 대한 것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어느 정도까지 검술을 가르쳐줄 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타이라는 자신이 늘 애용하던 검보다 무거운 검을 집어들었다. 그들에게 실력을 다 펼쳐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때 헤론이 다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레스. 아직 검을 갈무리 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도 안된 상태일세. 벌써부터 저런 검을 들고 훈련을 하신다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걸세. 라나에게는 예전부터 방어 법만을 알려드렸어. 저런 큰 검은 필요 없네.」 헤론의 말은 고마웠지만 타이라는 약간의 호기심이 일었다. 자신이 검술에 혹여 소질이 있다면 아레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에 대한. 「아뇨. 헤론. 그냥 해볼게요. 뭘 하면 좋죠?」 「대무다. 거기 서 있는 병사 나와라!」 아레스는 서 있는 병사중 한 명을 불러내었다. 병사들이야 늘 그렇지만 커다란 덩치였고 그리고 익숙한 자신의 칼을 가지고 있었고 누가 보나 턱없이 어린 소년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그 병사는 아레스의 부름에 얼굴이 굳어 타이라의 앞에 섰다.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실시한다.」 「뭐라구요? 아레스. 이건 너무해요.」 타이라의 찌푸린 얼굴을 바라보며 아레스가 미소지었다. 「훗....... 검이 안되거든 발로 차거라. 넌 그것 하나는 제일이더군. 쿠쿡.......」 헤론은 이미 손을 탈탈 털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아레스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느긋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난감한 타이라만 거대한 덩치의 병사를 마주보며 검을 들고 있었다. 그래. 어제 그게 그렇게 억울했단 말이지? 타이라는 이를 박박 갈면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상대편에서 오는 검은 허공을 가르고 커다란 바람소리를 내며 타이라에게 그 날을 찔러오기 시작했다. 12. 「타이라! 고개숙여.」 휘익~ 소리를 내며 근위대장 그레이스의 긴 검이 머리 위를 스쳐갔다. 허억거리며 금방이라도 피를 토할 듯 가슴부근이 아파 왔고 동시에 검을 들의 그레이스의 긴 장검을 쳐내면서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챙~ 소리를 내며 그레이스의 검이 뒤로 성큼 물러갔다. 눈앞이 아찔할 만큼 위험한 순간이었고 그것을 말해주듯 온 몸이 그 땀을 흘리는대도 추워왔다. 「허억........허억........ 도.......도저히..........못..못하겠어......」 「바보같은! 그런 나약한 마음으로 무엇을 하겠나. 빨리 검을 들어!.」 「그.....그....레......이..스.......허억.. 안....안 돼..못..」 휘익~ 다시 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이제 애원의 말도 소용없다는 그 단호한 눈빛 그에 상응하는 매서운 검날이 다시 타이라를 향해 달려오고있었다. 「허억.......」 낮은 한숨을 토하며 무거운 검 날의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달려드는 검을 막아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무리한 팔 동작은 이미 벌어진 상처를 더욱 악화시켰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다시 호흡을 다시 고르면서 덩치가 큰 병사를 노려보았다. 머릿속에서 그레이스의 ' 바보같은 ' 이란 말이 맴도는 듯 하여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미 주위 사람들은 세 번의 검을 받아친 것만으로도 놀란 모습이었다. 특히 여유롭게 앉아있던 아레스의 엉덩이가 벌써 의자위로 훌쩍~ 떨어져 자신의 근처까지 와있으니 말이다. 「킥... 이미 다 들켰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은 그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웅얼거리는 붉은 입술만 보며 넋이 나간 병사들은 자신들의 연습을 이미 잊어버렸고 그를 지위 하던 헤론조차도 미동도 없이 자신과 병사의 대무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병사와 다섯보 정도의 근소한 거리를 두고 냉전이 시작되었다. 병사는 얕잡아 본 소년의 받아치는 솜씨에 이미 어떻게 해야할지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처음 왕의 기사가 명령을 내렸을 때만 해도 병사는 자신 있었고 그리고 그가 소년과 자신의 대무를 여유롭게 바라보는 것을 보니 전열을 다해 싸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지목했을 때 여유 있던 병사는 이제 자신의 미비한 실력과 예상외로 방어가 뛰어난 소년을 보며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어린 소년도 제압하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꼬리가 따라다닐 것이 두려웠고 자신과 소년의 대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에 이겨야겠다는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타이라가 들고 있는 검은 그 날이 둔탁했고 연습용이라 죽을 만큼 치명상을 입히는 칼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으로 내리치는 검을 막는 것은 그만큼 뼛속까지 울리는 통증을 동반했고 자신의 기교가 뛰어난 편이라고는 하나 활발히 펼칠 수 없는 만큼 검의 무게는 무거웠다. 타이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에 내리는 빛은 아름다웠고 그 검에서 반사되는 태양 빛은 타이라의 금색의 머리를 더 현란하게 비추었다. 「이야아아아아~~~~~~~~~~~」 단발 마의 기압을 내지르면서 병사가 달려들었다. 병사는 기합과 동시에 달려드는 마지막 소년의 눈빛에 이를 꽉 깨물었다. 「젠장....... 더는 못하겠다. 이야앗!!!!!!!」 손안에 검의 무게에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병사의 덩치가 큰 만큼 자신이 불리할 터였지만 오히려 자신이 유리한 점도 있었다. ' 하체를 노려 ' 덩치가 큰놈일수록 동작이 굼뜬다. 타이라!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검의 날이 휘익 하고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한번의 기합으로 받아 쳐 올리고 휘청이는 사내의 배를 검 등으로 후려쳤다. 히익.. 하고 쉰 소리를 내며 병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등을 휘었다. 타이라는 승리의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사색이 되어 바라보는 아레스의 얼굴을 보며 승리의 도취 감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병사는 마지막 굴복을 원치 않았다. 치사해 보였지만 방심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힘껏 노려보며 발 앞의 땅을 쓰윽 긁어 한줌의 흙먼지를 잡아 올렸다. 타악~ 하고 뿌려지는 먼지에 타이라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앗~~~~~!!!」 병사는 쓰러지는 타이라의 옆에 바짝 다가왔고 팔꿈치로 쿠욱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슬로우 모션처럼 컥.. 하는 소리를 삼키고 소년이 바닥에 쓰러졌다. 긴 금발이 가느다란 몸 위로 촤르륵 흩어졌고 웅성거리며 바라보던 병사들도 순간 조용해졌다. 병사가 승리의 미소를 만면에 띄우고 왕의 기사를 돌아보았다. 흑발의 기사는 잠시 넋이 나간 듯 미동조차 없다가 무서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헤론이 다급함에 달려왔지만 아레스의 손에 들린 검을 뺏을 수는 없었다. 「이 아이에게 손댈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감히 그런 비겁한 수를 쓰다니! 여봐라. 이 자를 지하에 가두어라.」 「아아악.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 눈앞에서 치우지 못하겠느냐! 내 너희들을 다 죽여야 말을 듣겠느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자신의 동료를 끌어가기 시작했다. 헤론이 다가와 아레스의 앞에 섰다. 「손대지 말라!」 「.......!!」 「내가 직접 보겠다. 의원을 모란의 방으로 빨리 오라고 해라.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의원이 보이지 않는다면 모두 죽이겠다.」 「아레스.....! 진정하게. 내가.. 내가 살펴봄세.」 「비켜라. 헤론.」 아레스가 안고 간 소년의 팔이 추욱 떨어졌다. 「무사하실겝니다. 전하.」 「그런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건가.」 「피곤이 누적되신 것 같습니다. 최고의 전의는 폐하 곁에 계시지 않습니까. 헤론님이라면..」 「됐다. 그 이름은 듣고싶지 않군. 그의 병사가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왜 내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는게냐. 내가 진정 즉위식을 해야 너희가 날 왕으로 받들 것이냐? 죽일 것들! 나가라! 꼴도보기싫다.」 「전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의가 사라지고 난 모란의 방은 적막이 흘렀다. 죽은 듯이 잠이 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레스는 팔을 들어 소년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살결이 손끝에서 느껴지며 소년의 숨결이 느껴졌다. 누굴 탓할 필요가 없었다. 재미삼아 골려주기 위해 대무를 시킨 것도 자신이었고 누굴 원망할 필요도 없을 만큼 대무를 보며 즐긴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이 작은 아이가 쓰러지는데 자신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지 이런 느껴보지 못한 불쾌한 기분이 솟아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이이이잉........ 머릿속에서 벌레들이 돌아다니는 느낌이 났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허망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어머니와 헤어질 때 마차 안에서 느꼈던 모래먼지의 불쾌한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 여긴 어딜까? 한없이 춥고..... 그리고 괴로운 곳. 먼지의 안개는 걷혀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 혼자 버려진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형들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더러운 것 ' ' 제 애미를 닮아 천박한 것 ' ' 분명 왕께도 꼬리를쳤을거야. 저 더러운 육신으로........ 재수없어 ' 아니라고 소리치면 칠수록 형들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하염없이 떨어져도 그들의 험악한 말은 끊어지지가 않았다. 살려줘...... 살려줘...... 「아아아아아악~~~~~~~~~~~~~!」 「괜찮은거냐? 타이라.! 눈을 떠라!」 흔들지 말아....... 아파.......아파...... 「여봐라..... 빨리 전의를 불러라!」 당신은 누구야..... 날 그만 내버려둬...... 「허억........허억....」 뿌옇게 흐려진 시야 앞에는 아레스가 보였다. 왜지? 당신은 그런 눈을 하지 않잖아.. 그런 불쌍해하는 눈으로 나를 보지마! 「일.....일으켜 줘요.」 「아직... 아직은 더 누워있거라.」 「아니야... 일어나야 해. 난......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웬 고집이 이리 센거냐!」 「.... 살아야 하니까........」 가슴에 맺힌 말처럼 토해내는 그 마지막 말에 검은머리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을 받쳐주는 손길이 매우 따뜻해 눈이 감겼다. 그에 비해 일어나는 몸 마디마디가 다 쑤시기 시작했다. 방에 돌아온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을 헤맨 것처럼 또다시 깊은 어둠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처음처럼 끝없는 공포심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대지를 감싸는 공기와도 같은 아늑함으로 다가왔고 처음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쉬거라...」 낮은 음성이 귓가에 내렸다. 두 번째 눈을 떴을 때는 생존본능에 의한 것이었다. 배가 고팠고 그리고 목이 탔다. 주변 곳곳에 아름다운 꽃향기는 좋았지만 그 향기만으로는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는 터라 타이라는 반쯤 일으킨 몸을 들어 탁자 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 역시나 있었구나.」 작은 그릇들이 뚜껑이 덮힌채 있는 모습에 타이라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혼자 웃고는 다리를 침대 바깥으로 살짝 내렸다. 자연스럽게 윽.. 하는 소리가 목을 타고 나왔다. 「무리하지 말아라.」 방안으로 들어서는 아레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타이라는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우선 그 얼굴이 반갑지 않았고 이렇데 된 데에는 그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언어도단이군요.」 「뭐라?」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쿡.. 그래서 지금 원망이라도 하려는게냐?」 「우아~ 정말 자신감 하난 대단하시네요. 하나도 미안한 표정도 없어.」 입을 쌜쭉이며 계집애들처럼 고개를 살짝 돌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를 말하는 것이 왕으로 살아온 자에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어린 소년이 요구하는 말에 아레스는 기분이 상해버렸다. ' 하........ 나에게 사과를 하라고? ' 「됐어요. 용서해줄게요.」 혼자 말하고 웃는 소년의 얼굴이 예뻤다. 「내 옆에 있어줬죠?」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레스는 처음으로 창피함을 느꼈다. 사람을 대하면서 그 어렸을 적에도 잘 느껴보지 못한 수줍음이라는 단어가 생각나 아레스는 괜히 화를 내었다. 「무슨 소리! 네가 자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길래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제가 울었나요?」 눈 안에 근심을 담고 소년이 바라보자 아레스는 헛. 하고 숨을 삼켰다. 소년은 자신이 봐온 라나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자신이 다가가자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뭐예요!」 「검쓰는 것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그..그건 근위대장에게 배웠어요..... 배..배고파요. 비켜요.」 「제법 멋진 검술이더구나. 군더더기만 제거하면 멋진 솜씨가 될거다.」 「이익....... 누가 그런 거 알...알려 달래요? 비켜요. 아악....아파요. 손은 왜 잡고.......흡..」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앗 하는 사이에 침범하는 혀는 타이라를 그 자리에서 굳게 만들었다. 굳어버린 혀 사이를 헤집고 아레스는 익숙한 솜씨로 부드럽게 소년의 혀를 감아 올렸다. 하아...앗 작은 한숨을 내쉬는 소년의 긴 머리체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더 깊이 깊이 빨아올리면서 살짝 숙여지는 목을 자유로운 손으로 훑어 내렸다. 익숙치않은 손길과 행위에 어쩔 줄 모르는 소년의 떨림이 아레스의 흥분을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털썩..... 겨우 일어난 자신을 눕혀버린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그만해요!」 밀어내는 손길은 커다란 손에 잡혀 이미 머리위로 결박당하고 호흡조절이 되지 않은 숨은 거칠게 가슴을 오르내렸다. 「배고프단말이야!!!!!!!!!!!!!!!!!!」 있는 힘껏 소리치는 자신의 목소리에 일순 그의 손길이 물러났고 뒤이어 폭소를 하며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하하하하하하....... 도대체가 너란 녀석은.......」 「폐하는 어떨지 몰라도 소인은 배고파 죽겠습니다. 이만 식사를 해도 좋다는 명령을 해주시지요.!」 이를 박박 가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아레스가 손을 거두고 손수 타이라를 일으켜 밥이 놓여진 탁자에 앉혔다. 「흠...... 죽을상을 하더니 살았구나.」 「칫.. 살긴 했지만 죽는 줄 알았다구요!」 「그래?」 「당연하죠. 그 무식한 팔뚝으로 내려치는데 갈비뼈가 다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이건 그레이스보다 더해. 어쩜 그리 무식한지 쯧 나 같은 사람 때릴 때가 어딨다고. 안 그래요?」 「.......그래.」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대답하는 사내의 눈동자가 아릿하게 보이자 타이라는 금방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가슴속에 무엇인가 뜨끔하게 지나간 것 같아. 못내 찝찌름했지만.... 우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무시하기로 하였고 숨도 쉬지 않고 먹는 자신을 보더니 아레스는 놓여진 술잔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더니 훌쩍 방을 떠났다. 「휴.......큰일날 뻔했다. 그런데.. 라나는 시도 때도 없이 입맞춤을 하는 건가? 이거 말릴 수도 없고 약속을 했으니...... 어휴.... 내가 왜 저 부탁을 들어줘서는 차라리 기사를 시켜달라고 할걸.. 쯧.」 타이라가 밥을 입안에 잔뜩 넣고 투덜거렸다. 「몸은 좀 좋아지셨습니까?」 헤론이 방을 들어서는 모습에 반가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어디도 나가지 말고 꼼짝없이 있어야 한다는 명령을 다른 때 들었다면 모르지만 오늘의 자신의 몸 상태는 나가라고 해도 나가기 싫을 정도로 나른하고 힘들었다. 「앗. 안 그래도 늘 오던 길도 안보이고 심심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흠......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권해준 접대용 의자에 헤론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앉았고 타이라도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헤론은 늘 깍듯했고 그리고 대하기 어려운 말투였지만 솔직하게 가장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에서 자신의 궁금증을 가장 많이 풀어주는 사람이기도 했기에 타이라는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저......사실....」 「말씀하십시오.」 「이런 것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황제의 기사란 분들이 모시고 있는 황제으의 얼굴도 모르시나요?」 「훗.. 이제 타이라님이 라나가 되셨으니 알려드려도 무방하겠군요.」 「....!!」 「전황제폐하께서 돌아가신 후 원래는 바로 황제의 기사를 임명하고 그 후에 즉위식을 하는게 관례였습니다만... 이번 황제폐하는 기사들의 임명식이 있은 후에도 즉위식을 계속 미루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대외적으로 황제폐하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이들이 황제폐하의 얼굴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아세요?」 「알지요. 대신들도 그리고 궁내에서 황제폐하를 모시는 분들도.. 그건 측근? 이라고 표현되기 어려운 말이지만 아무튼 황제를 보필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아시나요? 헤론 길 아마드. 모두 알고 있어요?」 「아마도... 모르는 것은 길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헉.......그..그럼 헤론 당신도 아는군요!」 「타이라님이 알면서 모르는 척 하듯.. 저도 그렇다고 해주고 싶군요.」 「으아아아악.. 징그러운 사람들!」 「예?」 「다들.. 능청에 연기까지 일품이군요. 으아... 무섭다.」 황당하다는 모션으로 손을 흔드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넉살좋게 웃는 왕의 기사를 바라보며 자신이 겪어온 시간들을 회상하는 타이라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졌다. 「에....... 길은 왜 모르는거예요?」 「아마도.... 가장 둔한 녀석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궁을 밥먹듯 드나들던 녀석이 왜 안 오는지 알 수가 없군요.」 헤론의 말에 타이라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졌고 그 모습에 헤론이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멀뚱이 바라보는 헤론의 모습에 그제야 그가 찾아온 용건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타이라는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아차.. 왜 오신 거죠?」 「아..! 그렇군요. 타이라님과의 이야기를 하면 종종 주제를 까먹곤 합니다. 하하.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끼는 병사 한 명이 지하 감방에 갇혀있습니다.」 「누구?....아! 저랑 대무한 분이신가요?」 「예. 일단 비겁한 수로 응한 것에 제가 사과 드립니다. 처벌받아 마땅한 자이나 그에게 딸린 처자식을 생각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니.......왜..왜.. 지하감방까지?」 「그건.... 타이라님이 풀어야할 과제군요.」 「네?.......!!」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펴주십시오.」 「그건...... 부탁드려볼게요.」 「감사드립니다.」 헤론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고 그리고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 즉위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폐하께서 왠일인지 그렇게나 미루던 즉위식을 하신다고 하시는군요.」 「아.......! 축하할 일이군요.」 「그렇지만 말입니다. 왕자님.」 「네?」 「현존하는 황비의 자리가 빈 이상 즉위식이 있는 날 저녁은 라나께서 모시게 되어있습니다.」 「네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간 헤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타이라는 선체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하루는 그렇게 또 저물어갔다. 13. 「으아아아아아아~~~~~~~!!!!!!!!!!」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가 없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알 수가 없는 그 위대하신 황제폐하가 머무는 황제궁을 찾는 작업 그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시종을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듣고 싶은 부분만 들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어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인지 꿀 먹은 벙어리 같이 말도 없는 시종만 되돌려 보냈을 뿐이었다. 「정말 짜증이 나는군. 아니 헤론도 그래. 자신의 병사를 풀어달라고 했으면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하는거 아냐?」 미친 사람처럼 방 한가운데를 서성이면서 중얼거리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이 봐도 기가찼다. '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황제폐하가 계신 곳은 저도 모릅니다. 그리고 라나께서는 호위무사 없이는 궁성을 돌아다니시면 절대 안됩니다. 그리고 방어법을 배우실 필요도 없는 훌륭하신 검술의 소유자이시니 굳이 아침에 나오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 그 능청스러운 얼굴 안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사라지면 그만이란 말인가! 당신들의 황제와 만나게 해달란 말이다. 왜 왜! 여자가 아닌 내가 즉위식 날 왕을 모셔야 하는지 알려달란 말이다. 그 모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내 뱉으면서도 헤론은 웃지도 않았다. 정확히 누군가에게 묻기에도 창피한 그 단어의 뜻을 그 당사자인 황제에게 직접 묻겠다는 자신을 보며 정색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왜 아무도 황제와 만나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묵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치겠다.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지. 하여간 그 능청맞은 헤론에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 본지 한 달은 되어가네. 그건 그렇고 란도 안보이고..... 그레이스가 데리고 있는건가?」 타이라는 문을 열고 방밖으로 나왔다. 마치 숲에 쌓인 것처럼 궁성들은 모두 아름다운 조화와 배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것은 수십 번의 답사를 끝으로 눈속임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부분을 돌면 의례 나올 것만 같은 건물은 또 다시 엉뚱한 건물이 버티고 서 있는 형상이었다. 모든 부분을 다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덩치는 산만한 병사들이 고개를 조아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정중히 내 뱉었다. 예전이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돌아다닌 다는 사실 하나로도 그들의 말대로 감옥에 끌려갔을지도 모를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그리고 자신이 달고 있는 아름다운 치장의 귀걸이와 그리고 한번에 알아볼 수 있는 금색의 머리칼을 바라보고는 고개가 땅에 닿도록 숙이고 예를 다했다. 그런 의례 따위 개나주고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예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라나로서가 아니라 타국의 왕자로서 배운 것이기에 타이라는 참고 뒤돌아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이러고 있으면 황제에게 귀가 있는 한 병사들로부터 자신이 성 주위를 맴돈다는 사실을 듣고는 찾아와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직접 축하라도 해주마 라고 이를 갈면서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을 그 비위가 상하지 않는 방법으로 물어야겠다고 수십 번도 더 연습을 했던 차였다. 즉위식을 하라는 왕의 말이 떨어졌다고 하나 일시에 말로만 치러질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래서 많은 시종들은 바빠 보였고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는 시종장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배로 늘었다. 그들에게는 꽤나 커다란 일인 것 같았고 그래서 그런지 삼엄한 경비 속에 많은 귀족들이 성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든 사실이 예외일수 있었다. 자신이 라나만 아니었다면. 헤론의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신기하네?」 타이라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마침내 발견한 곳은 전에는 그 문 앞에 병사들이 두겹세겹 있던 터라 들어가 보지 못한 건물이었다. 「오늘은 아무도 없나봐.」 그래서 발을 움직였다. 성격상 머리로 이리저리 생각하기보다는 숨이 가쁘더라도 혹은 위험하더라도 발로 뛰는 것을 좋아했기에 타이라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나무와 초록의 푸르름으로 이미 여름의 계절을 나타내주듯 아름다운 나무 사이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고 널따란 초록 양탄자의 풀밭 한편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듯 쪼르르 물소리가 났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되어 한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언니!」 뒤에서 나는 소녀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타이라는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언니라고? 「아~ 정말이다. 언니야.!」 귀여운 얼굴에 보조개를 피우며 소녀가 한 달음에 달려왔다. 어여쁜 입술을 조밀하게 움직이며 앞에선 소녀는 예전 자신이 세르판에 처음 발 디딜 때 머물던 성의 공주였다. 「꺄하하하하. 언니 맞구나. 그쵸? 잘 지냈어요?」 「공주님이시군요. 반가워요. 근데 전 언니가 아니랍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소녀의 얼굴이 사랑스럽고 예뻤다. 「그런데 공주님은 여기에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폐하를 만나려고 왔어요.」 「꺄악~」 소녀는 한번에 자신을 품에 안는 금발의 소년의 행동에 놀라 소리쳤다. 「고마워요. 덕분에 찾았다. 하하.」 「뭘 찾아요?」 「아뇨. 그런게 있어요. 아무튼.. 그렇게나 찾고 싶던 공간을 찾았네. 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공주님은 언제 돌아가시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즉위식까지 머물다 가신다고 하셨어요.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음... 이름은 타이라. 타이라라고 해요. 공주님은요?」 「메리안.. 메리안 실버리안. 언제 또 봐요?」 「공주님이 놀러와 주면 좋겠어요. 성안에 살아요. 모란의 방에 있답니다.」 「지금가요!」 「네?」 메리안은 정말 단순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너무도 솔직한 직선적인 성격임에 틀림없었다. 생각하는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행동파인 것도 같고 솔직히 타이라로서는 이런 성격의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난감했다. 분명 실버리안이면 그리고 자신이 머물렀던 그 성의 주인의 딸이라면 대단한 권력가일 것이 틀림없을텐데... 소녀의 행동은 천진난만하다 못해 우아함하고는 담을 쌓은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따라오는 소녀를 오지 말라고 등 떠밀 수도 없었다. 언니 아니라니까~!!!!! 라고 이번이 말하면 35번째였다. 수없이 종알거리며 하는 소녀의 말에 화를 낼 수도 없는 타이라는 속으로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방안에 도착해서도 소녀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런 소녀의 성격은 이미 궁성안에서 평판이 돌았는지 시종장도 뜨악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금방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시녀하나가 시종장을 대신해 소녀의 심부름을 하는 중이었다. 「이거 입으면 예쁠꺼야. 이봐요. 두 번째 걸려있는 그 옷 좀 내려 줘봐요.」 10살짜리가 키가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그녀는 시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가져다준 천을 이리저리 껴 맞춰 입히고 벗기고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주무르고 꼬고 그 귓가에 듣기도 싫은 언니라는 소리를 연신 중얼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셔야 하지 않으신가요?」 「까르르르르..... 싫어. 타이라와 노는게 더 재밌다니까.」 「저.... 하지만. 분명 찾으실겁니다.」 「아버지는 황제폐하와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나 같은 것은 잊어버렸다니까!」 아..... 그렇군. 삐진거로구나. 「그럼 우리 황제폐하 만나러 갈까요?」 「정말?」 「네. 저도 마침 폐하께 할 말도 있고 메리안도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이 가요.」 소녀의 눈에 단박에 웃음이 서려서 타이라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둘이 간다면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메리안의 목소리 하나면 다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잠깐요. 옷..옷 좀 갈아 입구요.」 「아냐. 아냐. 언니는 이게 더 이뻐.」 「아니...............아..앗..」 10살짜리가 왜이리 힘이 센 거야!! 성급하기는 이를데 없고 그 수다는 쉴새없이 이어지고 잡힌 손은 끌어대는 통에 타이라는 본의 아니게 머리에 수없이 많은 꽃을 꼽고 길게 늘어진 머리끝에 대롱대롱 장신구를 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 이 너절거리는 치마는 무엇이더냐. 라고 속으로 징징 짜는 타이라를 그 기가센 꼬마는 끌고 갔다. 메리안의 머리는 흑발이었다. 흑발의 머리는 아름다운 긴 고수머리였고 위에서 한번 묶고 그 아래는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으며 대조적으로 입은 하얀 드레스가 무릎에서 찰랑였다. 대륙에 아가씨들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사막처럼 그 열기에 화상을 입을까 두려워 칭칭 싸매는 모습과는 다르게 옷은 화려해도 길이는 짧은 것이 많았다. 메리안도 그랬다. 그 아름다운 머리 모양이 아마도 시종이 한참을 매달려 꾸며주었을 텐데 소녀는 총총총 뛰듯이 달려갔고 이끌려 가는 자신의 발걸음이 성큼 거릴 정도로 매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입은 옷과 머리모양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듯 했다. 자신이 종전에 발견했던 그 아름다운 나무 사이에 우아한 건물의 입구를 지나 방으로 보이는 커다란 문에 다다르자 타이라는 의외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잠........잠깐..」 「응?」 「안에 폐하가 계시는 것 맞나요?」 「응.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계실거야. 종종 이렇게 오시곤해. 빨리 가자.」 같이 온 소녀는 한달음에 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타이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나 찾아다닌 왕을 만나고 싶긴 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자신이 황제궁을 찾으면 문 앞에는 분명 시종들이 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고 자신이 찾아오면 시종에게 말을 건낸후 자신이 왔다는 의사를 밝힌 후에야 쳐들어가든 알현을 하든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쳐들어가? 이번 한번 몰래 들어가도 될까? 아니지.. 이걸 꼬투리 삼아 괴롭힐지도 몰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메리안의 얼굴이 시무룩해져 있었고 그리고 짜증스러운 듯 올려다보자 타이라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만.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곳까지 와서 막판에 변심을 하는 이유가 뭔가.」 「으아악~~~~~!」 「폐하! 안녕하시옵니까.」 메리안은 여유있게 치맛단을 살짝 잡고 인사를 하였지만 타이라는 등이 섬뜩할 정도로 온 몸이 굳어갔다. 「하하. 사실 귀여운 소녀와 함께.. 산책을 하였습니다.」 「산책로로 찾기에는 이곳은 쉽지 않았을텐데... 문 앞에서 서서 뭐 하는 거지?」 「하하. 이게 문이었군요. 전 또...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검은머리의 왕이 성큼 다가왔다. 묘하게 웃는 입매를 보며 타이라는 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예쁘군. 좋아.」 눈을 찌푸리는 소년과 매력적인 웃음을 띄는 청년 사이에서 메리안이 두리번거렸다. 「메리안! 스테론 실버리안께서는 이미 별궁으로 가셨다. 그곳으로 가보는 게 좋을거야.」 「아버지가 가셨어요?」 「흠.. 과년한 아가씨가 이렇게 남자의 손을 잡고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면 꽤나 화내실 텐데..」 「앗.. 언니예요. 폐하. 이분은 언니랍니다. 그쵸?」 그렇게 동의를 구하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한단 말이냣! 타이라는 화가 났다. 「푸흐흐흐흣...........푸하하핫..........」 「그만웃으시지요.」 타이라는 심기가 불편한 가운데 배가 아프게 웃는 왕과 그리고 이유도 모르고 따라 웃는 소녀를 보며 짜증이 솟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가야겠다. 오늘은 날이 좋지 않아.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폐하. 가자! 메리안.」 「누가 그냥 돌아가라고 했지?」 으아아아아........ 어떻게 해. 「여봐라. 거기 아무나 빨리 아가씨를 별궁으로 모셔라!」 건물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움직임도 조용한 사내는 재빨리 소녀를 데리고 넓은 풀밭을 지나 나무 속으로 그리고 그 아름다운 문 밖으로 사라졌다. 「하하핫..... 좋은 저녁이지요?」 「흐음....... 별로 좋지는 않군.」 으헉......... 몰래 몰래 들어온 것에 화를 내는 거야! 큰일났다.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폐하. 즉위식 때 뵙겠습니다. 지..지난번 병사를 풀어주신 것에는 정말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언제든 폐하의 안위와...... 안위와......」 「안위와 무운을 빈다고?」 「네!」 「별로 반갑지는 않군. 이미 건강한데다. 더 넓힐 수 없을 만큼 넓은 대지는 평화롭지.」 아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왕만 아니었다면 발로 한번 차 넘겼을 것이라고 타이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커다란 문은 세공이 아름다웠고 이미 열려있었다. 문 앞에서 실갱이를 하는 자신들을 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타이라는 충분히 괴로웠다. 문 앞에서 그가 막아섰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공간을 넓었지만 그를 가운데 두고 도망칠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았고 뒤로 들어가기에는 그 내실이 너무 넓었고 두려움이 서려 미지의 그 공간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벅.. 소리도 안 나게 그가 걸어왔다. 이미 메리안이 빠짐으로 인해 둘 사이는 굉장히 좁혀졌고 몰래 침범한 것에 대한 화는 내지 않는 듯 하였다. 하지만.. 저 의미심장한 웃음은 뭐란 말인가.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그를 한번 바라보자 그의 시선이 눈에서 그리고 자신의 코로 그리고 입술로 옮겨가는 것이 보였다. 늘 그와 마주치면 당하던 것이 생각나 타이라는 휘익 하고 뒤돌아 섰다. 자신의 나풀거리는 옷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고 자신의 머리칼 사이사이로 꽃이 꽂혀있다는 생각은 나지않았을뿐더러 메리안에게 자신이 그녀가 가지고 노는 인형처럼 당했다는 생각은 잊은 체 너울거리는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그를 등지고 안을 바라보았다. 「안 들어가고 뭐 하는 건가!」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훗. 좋을대로......」 응? 좋을대로 하라고? 그럼 돌아가야지. 라고 생각한 자신의 등에 사내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 손길은 부드럽게 다가와 목덜미를 매만지듯 쓸어 내리고 점점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코 빠른 속도도 아니었고 스치듯 내리는 것도 아닌 의식적인 매만짐에 타이라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쉴새없이 뛰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그에게 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목 뒤의 민감한 부위를 건들면서 점점 자신의 등뼈를 타고 내리다가 결국 엉덩이에 머무는 순간 타이라는 뛰쳐들어 갈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소리지르며 달려나간 곳은 건물 안의 내실이었다. 쿵.. 소리를 내며 뒷문이 닫혔고 뭐가 재밌는지 연신 웃어대는 사내를 노려보며 타이라는 신기한 구조에 넋을 잃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다 저물지 않았다고 하나 방은 어둡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고 그 아름다운 햇살을 바닥에 반사하여 바닥은 우아한 나무 색으로 햇살아래 그 빗살을 뽐내었다. 「아름다워요....」 「그래. 너무 아름답군.」 자신이 바닥을 보며 그 햇살을 칭찬한 말에 동의를 구하듯 왕을 바라보았지만 왕의 눈은 자신에 향해있어 타이라는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흠.. 이왕 들어온 것이니 말은 해야겠군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무슨 말인지 해보란 그의 거만한 표정에 타이라는 기분이 상했지만 어찌되었던 이 상황에 유리한 것은 자신 앞에 서있는 사내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전 폐하의 라나가 되지 않겠습니다.」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힘있는 목소리를 내어 타이라가 말했다. 차가운 정적이 그 왕에게서 흘러나와 타이라는 한기를 느꼈다. 「그대와 내가 한 약속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알고있습니다.」 「잘 알고 있는 그대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싶군.」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한 것처럼 그는 먼저 앞서 걸었다. 그의 집무실인 듯 수많은 책 사이로 우아한 책상과 반대편에 놓여진 긴 의자 - 아마도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인 듯 - 와 그리고 한편에 놓여진 작은 탁자가 전부인 넓은 공간에 그와 둘이 남게 되었다. 매우 조용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은 특히 더 했다. 작게 하는 말도 공간에서 희석될 만큼 고요한 공간이었다. 「전....... 이례적인 라나라고 들었습니다.」 계속하라는 듯 그가 의자에 앉았고 그리고 맞은편 긴 의자에 앉으라는 손 모양을 보였다. 「난.... 아니. 전.... 라나는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들었어요. 그...... 여자들이 아이를 갖는 것처럼.....그러니까........ 전 그런 행동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고.........다른 라나들처럼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 그.... 그런 교육을 받고싶지도 않고..... 그래서..... 전 폐하의 기사가 되고싶어요.」 그가 알아들었기를 바란다. 타이라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얼굴의 붉은 홍조를 띄우며 그 머리칼에 아름다운 꽃향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앞에서 하늘거리는 옷 사이로 속살을 비추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것은 반칙이었다. 훗..... 그것보다 그런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받고 싶지도 않으니 기사가 되게 해달라고? 그런 옷차림으로 검을 들면 사람들이 잘도 죽겠군. 하긴 죽을지도 몰라...... 아레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대가 내게 약속했을 때 짐은 의심하지 않았다. 혹시 간편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세이카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면 쉽게 받아들인 짐을 비웃는 것으로 여기고 세이카를 단숨에 쳐낼 수도 있다.」 뭐? 뭐라고? 「하~! 세이카를 단숨에 친다구요?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럼. 그대는 나와의 약속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 사실 라나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단 말입니다. 아니 그냥.. 옆에 있어서 키스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구요. 여자들처럼 남자를 안으라니 그게 말이 될법한 소립니까? 기가 막혀서. 당신이라면 그러고 싶겠냐구요.!」 타이라는 흥분하여 소리치듯 말을 내 뱉었다. 왕의 눈동자가 흑색으로 차갑게 일그러졌다. 「내게 안기고 기분이 들 때까지 기다려주면 되겠는가?」 뭐? 「그럼. 당신에게 안기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으면 전 그냥 있어도 되는건가요?」 「그렇다. 기다려주지. 그대가 준비될 동안.」 「만약.....평생토록 그런 기분이 안 들면 어쩌실건가요?」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저 대단한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묻고 싶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커다란 소득을 얻은 타이라는 아무래도 좋았다. 타이라는 몰랐을 것이다. 드높은 자존심의 사내가 기다려준다는 말을 내 뱉으면서 자신의 옆에 두려는 이유를.. 그 진실을.. 「그래도 오늘은 그냥 보내기 너무 아깝군.」 「네?」 왕이 다가왔다. 타이라가 앉은 그 긴 의자의 용도는 분명 휴식을 취할 왕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위에서 왕의 입맞춤을 받는 소년의 목소리가 가늘게 울려 퍼졌다. 고요한 가운데 부드럽게 마주치는 입술의 소리와 그리고 작은 신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왕은 떨리는 소년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작게 입맞춤하고 그리고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이해할 때까지 그리고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겠다. 그래도 그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란다.」 왕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14.   고즈넉한 서재의 구조는 단순했다. 창가 쪽을 제외한 삼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한편에서 타이라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이야~ 여긴 형의 서재보다 더 책이 많아! 죽인다. 레스터가 봤으면 정말 좋아할텐데.. 정말 아쉽네. 그러나저러나 그레이스랑 레스터는 잘 있는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데...」 남들이 본다면 혹여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오해할 정도로 타이라는 커다란 목소리로 벽을 향해 중얼거렸다. 외로웠는지도 몰랐다. 바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어색한 타이라가 왕에게 진언해 얻은 혼자만의 공간은 제법쓸모가 있었다. 책은 시종들이 잘 분류를 한 탓인지 몰라도 분야별로 책의 크기에 맞추어 깔끔하게 정렬되어있었다. 집어 드는 책마다 오랜 세월이 녹아 내린 듯 종이 내음이 나는 것도 있었고 금방 꽂혀있던 듯 그 겉장조차 반들반들한 것도 있었다. 타이라는 대게 역사책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지식을 알려주는 책을 좋아했는데 그런 책 또한 아주 많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책을 읽기 위한 공간은 왕이 집무를 보는 책상과 의자가 다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덩그마니 놓여진 그 의자와 책상은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왕의 이미지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 언제 올지 모를 왕과 부딪치기 싫긴 했지만 할 수 없이 그 넓고 고즈넉한 공간의 한 편에 있는 긴 의자 위에서 종종 책을 읽었다. 타이라의 체구가 작은 반면 그 의자는 굉장히 크고 넓었다. 덕분에 타이라는 모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자세로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킥킥.. 이러니까 꼭 집에 있는 것 같아.」 의자에 엎어져서 자신의 손에 놓여진 책을 펼쳐들었다. 그 깨알같은 글씨를 보며 타이라는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나른하고 따뜻한 햇살이 방안으로 스며들었고 기분은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잠이든 것 같았다. 어느 부분까지 읽었는지 모르지만 손을 이탈한 책은 이미 책장이 덮여 있었고 오른팔을 배게 삼아 누워서 졸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왕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긴 머리체가 등뒤로 흐트러져있었고 살포시 감은 눈썹이 길게 그늘을 드리웠다. 살짝 벌려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약속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취하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기다려 준다는 말을 어디까지 믿은 것일까? 아주 편안해 보였고 나른해 보였다. 자신이 늘 집무를 하는 곳에서 잠든 그는. 그 나른하게 등을 돌리며 뒤척이는 모습조차도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시선을 끄는 모습에 왕은 자신이 하려던 일을 잊고 잠시 그 곁에 앉았다. 손마디가 가늘고 길어서 제법 키가 클 것도 같았다. 지금은 자신보다 훨씬 작아도 그 작은 손이 자라면서 키도 클 것이고 앳된 얼굴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아름답게 성장할 것이 틀림없었다. 「앗...!」 일순 허공을 바라보며 떠진 눈동자는 너무 허망한 모습을 담아 놀란 모습으로 커다랗게 떠졌다가 이어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놀라지 말아라. 정신 없이 자더구나.」 「얼마나 됐어요? 오신지 얼마나 되신 거예요?」 「금방 지금 막 왔다. 훗...... 그게 왜 중요하지?」 중요했다. 타이라에게는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마음놓고 잠을 자는 일.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자신에게 이렇게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서고 그리고 바라보고 있을 때까지 인기척 하나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많이 느슨해져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잠시만 거기 앉도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던 타이라는 의아함에 잠시 머뭇거렸다가 긴 의자에 앉았다. 책을 읽으러 온지 여러 날이 되도록 왕은 지나가던 사람을 대하듯 무심했었다. 심지어 그 여러 날 전의 뜨거운 입맞춤은 자신이 환각 속에 본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그 이후로 무미건조한 시선과 말투 그리고 행동으로 자신을 대했다. 「그대의 나라는 계속해서 그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내가 그들을 그냥 두는 것은 그대와의 약속이었지만 세르판이라고 해서 병사들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고요한 침묵 속에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타이라는 숨이 막혀오는 듯 했다. 「제가 폐하라면 자국의 병사를 잃지 않고 전쟁도 중단하는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어떤 방법이지?」 그는 흥미가 돋는 듯했다.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띄우고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다. 「폐하께서는 이미 저희 세이카에서 이런 커다란 대륙을 침략할 수 없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군대의 규모나 그 지위 하는 우두머리.... 그 어느 것을 보아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훗..... 그대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굉장히 이기적으로 들리는군. 그러니까 세이카는 어떠한 힘도 없으니 그 힘을 조종하는 배후를 치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는가?」 「..........무례하게 듣지 마시고 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니 들으실 의향이 있으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라. 그래서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라면?」 타이라는 단호한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제가 폐하라면 싸움을 하지 않고 우애를 돈독히 하며 저희 모국에서 타국을 넘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크란에서 왕비를 삼을 것입니다.」 순간 공기는 모든 것을 얼릴 정도로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던 왕의 표정이 매우 사납게 굳자 타이라는 일순 그 차가운 기에 눌려 몸이 굳기 시작했다. 그 검은 눈동자에 노기가 어리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베어낼 것 같은 살기를 내뿜었다. 「영악한 머리구나. 그대가 제시한 방법이 좋을지 모르겠군. 나가라! 당분간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대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길로 후다다닥 타이라는 도망치듯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서늘하게 내뱉는 그 말 한마디에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방에 놓인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우......무서웠어. 의견을 말하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화를 낼 건 뭐야! 왕비를 외국인으로 맞이하라고 해서 화난 건가? 도대체 뭐야~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뭘 그렇게 종알거려?」 「우앗~ 길! 정말 오랜만이야. 나빴어!」 시원스럽게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온 짧은 머리의 청년이 웃었다. 그리고 방에 놓여진 탁자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타이라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무료하고 심심하던 차에 그리고 정신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리운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마지막 보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찾아온 그는 장시간 떠나있었던 공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잘 지냈냐 꼬맹아~」 「어라라? 무엄하도다. 기사주제에 일국의 왕자에게 꼬맹이라니.... 하하하~ 그래도 너무 반가워. 잘 지낸거야?」 「응. 왕자. 너도 건강해보이는구나. 그 성격에 방에만 있지는 않았을테고 뭐하고 지냈어?」 자신이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주위가 산만한 성격의 길은 생각 외로 주위 깊게 이야기를 들으며 시종장이 내온 차를 마셨다. 「그래서 화가 났나봐 폐하는. 왜 내 말이 이상한가? 어떻게 생각해 길?」 「푸하하핫. 그래서. 왕에게 왕비를 맞이하라고 했어?」 「응. 그럼 싸움도 안 나고 우리나라는 세르판과 우크란 두 나라를 침범할 생각도 안 할테니 난 도로 우리나라로 갈 수 있고 좋은 생각 아냐?」 「그 황제폐하도 애가 타겠군.」 「응?」 「키킥.. 아무튼 너도 대단한 녀석이다. 황제의 라나주제에 비를 맞으라는 엄청난 소리를 하다니...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거야.」 가벼운 농담하듯 좋아한다는 소리를 하는 길을 보며 타이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길은 황제의 얼굴을 정말 모르는 건가?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자신이 나설 문제는 아니었다. 「아! 맞다. 날 도와줘.」 무슨 소리냐는 듯 길이 바라보았다. 타이라가 늘 했던 정기적인 일. 그러나 볼모로 오면서 잊은 일을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기에 친한 그라면 이유를 묻지 않고 도와줄 것이 틀림없었다. 「3시진 정도만.... 밖에서 망을 봐줘. 시종도 그 어떤 누가 와도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 「부탁이야! 묻지 말고 어떤 소리가 나도 절대 들어오지 말고 내 부탁을 들어줘.」 타이라가 애원했다. 길은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털더니 밖으로 휘적휘적 나가버렸다. 그리고 시종을 다 물리는 듯 그의 목소리가 들렸고 타이라는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어려울 것이다. 모처럼 적응은 힘들 것이고 처음은 아니지만 처음처럼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 병 안에 들은 약이 보이시죠? 무색무취입니다. 단, 맛은 그리 좋지 않아요. 조금 써요. 이 비슷한 맛이 나면 일단 드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해약은 더 씁니다. 그래도 이 독으로 죽지 않으려면 이 지옥 같은 맛은 참고 드셔야 할 것입니다. 음용하시는 방법은 소량으로 조금씩 그리고 그 양을 늘리시되 한계치 이하로만 드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이 독으로 죽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비슷한 효력의 약은 다 듣습니다. 신경 독이기 때문에 몸이 마비되는 증상이 온 후에 마비가 풀리면서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과다 복용할 경우에는 혼자 해약하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양 조절을 잘하셔야 합니다.? 쪼르르... 명쾌한 소리를 내며 세르판에서 자랑하는 은은한 향기의 차 속으로 무색의 액이 녹아 들어갔다. 다행히도 차향이 좋다고 생각하며 타이라는 웃었다. 「자.. 그레이스. 당신이 처음 이 약을 주면서 했던 말 난 토시하나 안 빼고 그대로 기억해. 왠줄알아?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왜 이렇게 아등바등 거리며 살고 싶은지 몰라도... 아웃.... 써.」 한동안의 공백기를 감안하여 독을 적게 타고 미리 올 마비에 대비해 침대에 누웠어도 그 약의 효과는 상당했다. 차후에 올 고통에 비명소리가 세어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한 뭉치의 천을 입안에 집어넣고 단단히 물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손에 이어 다리 그리고 그 저림 현상과 함께 찾아오는 마비는 사지의 끝에서 점점 안으로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으으윽................. 채 굳지 못한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눈물은 따뜻했다. 서늘한 냉기가 도는 왕을 흠칫흠칫 올려다보며 내무대신은 국정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참으로 좋은 목소리로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대답을 하는 왕을 보며 좋아했던 날이 몇 칠 되지 않아 왕은 다가서기 힘든 분위기로 그렇게 위엄을 떨치고 있었다. 「...... 그렇사옵니다. 폐하. 변방에 군사들도 문제지만 민심이 흉흉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간 백성들의 원망이 커질 것입니다. 전쟁을 마무리하고 빨리 내정을 수습하셔야 합니다. 폐하.」 「그대 생각에도 짐이 우크란에서 왕비를 맞으면 삼국의 불안정한 정세가 나아지리라고 보는가?」 「네? 폐하... 무슨말씀이신지..」 매우 안절부절못하면서 내무대신이 사색이 된 얼굴로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이는 동안 왕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의 유예기간이 없다고 그에게 일러봐야겠군. 감히 내게 왕비를 맞으라고 하다니..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면 어찌되려는지 그 얼굴이 보고 싶군.」 「네?」 「됐다. 물러가라. 밖에 있느냐? 모란궁으로 간다.」 황제가 궁 밖으로 나가자 궁을 지키던 병사는 떨리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몇몇의 시녀들이 울며 저들끼리 웅성거리는 소리를 보건대 왕의 심기가 그닥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맹수가 사라진 것처럼 안도감을 느끼며 병사들은 그 무장을 다시 훑었다. 언제 다시 왕이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고 또 다시 전의 병사들처럼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이카에서 온 왕자의 예기치 않은 방문 이후로 황제궁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사라졌고 자신들이 후임으로 왔을 때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어떻게 됐는지는 익히 알게 되었다. 아주 처참한 말로였고 그 처사가 말로 할 수 없이 끔찍했음을 그들은 상기했고 두려워했다. 안에서 뭐 하는 거지? 궁금했지만 사나이 약속이 있지 들여다 볼 수는 없지. 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근 한 시진을 동동거리며 밖을 서성였다. 헤론이 직접 찾아와서 말만하지 않았다면 다시 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수많은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움직여지지를 않더니만 단 한마디 그 말에 말의 다리가 부러져라 달려왔다. ? 왕자께서 자네를 보고 싶어하시네.? ? 어제는 눈물을 흘렸지 아마... 안 그래도 즉위식 이후에는 폐하의 곁에 있을 것이고 얼굴보기 힘들텐데..... 한번쯤 더 봐두는 게 좋지 않겠나? ? 보고 싶어한다고.. 보고 싶어한다고.. 그 감정이 다 섞인 자신의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버리고 멀찍이 다가오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근처에 얼씬거리는 사람은 없을텐데 거침없이 다가오는 무리들. 그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반가움보다도 거센 반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만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 길의 말에 놀란 것은 왕을 모시는 시종들이었다. 표정 없는 왕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맞은편에서 명을 재촉하는 사내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비켜라. 길. 그리 기분이 좋지 않다.」 「나 또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 아레스.」 「그대가 왕의 기사라면 모셔야할 주군이 가는 길을 막지 못하겠지.」 「무슨 헛소리냐! 이상한 말로 주위를 산만하게 하지 마라.」 잠시간 아레스를 노려보던 길은 선체로 굳었다. 멍하니 의문을 던지는 사내를 뒤로하고 아레스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이 들은 말을 접수할 수 없는 길이 굳은 채로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각이군.」 낮게 중얼거린 왕은 순간 작은 소리에 놀라 눈을 돌렸다. 한편에서 끙끙거리며 사지를 뒤틀며 신음하는 소년의 모습에 왕이 놀라 다가갔다. 비 오듯 흐르는 땀에 축축히 젖은 얼굴에는 눈물이 그득했고 물고 있는 천에서 비어져 나오는 신음소리는 마치 숨이 끊어질 듯 간간이 이어져 내려와 왕의 손이 입에 물린 천을 빼었을 때는 어마어마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악....... 으......으윽................아아아아아악...아......윽..」 혀를 물 것 같았다. 놀라서 다시 빼어든 천을 집어 입안을 틀어막고 비명소리에 놀라 뛰쳐 들어온 길을 바라보았다. 「빨리 헤론을 불러와라.」 「왜......왜 이러는거야!」 「독을 먹었다. 헤론을 빨리 불러와!.」 손살같이 뛰어가는 사내를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괴로움에 허덕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고통이 극심하여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고 덕분에 잡혀진 손에 무수히 손톱자국을 남기는 중이었다. 「해독제는 다행히도 옆에 있군요. 독살이 아닌 것은 다 아실 겁니다.」 「헤론! 왜 이러는거야. 저..저 녀석.. 죽는거 아냐?」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길은 말을 더듬었다. 헤론이 고개를 숙이고 침대 옆에 앉은 사내에게 말을 하자 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해독제를 드셨으니 치사량만큼 드신 게 아니라면 조금후면 깨어나실 겁니다.」 「수고했다. 나가보아라 그리고 시종을 시켜 왕자의 방을 모두 수색하라고 일러라 짐 속에서 아니 왕자가 소지하고 있는 다른 약이 있다면 모두 내게 가져와라. 그리고 당분간 방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고 소문이 세어나가지 않게 시종들의 입단속을 시켜라.」 무엇인가 반박하려던 길의 입을 막은 것은 헤론이었다. 「네. 폐하.」 길은 헤론에게 끌려가 방밖으로 나갔다. 「폐......폐하라고? 정말이야. 그..그보다. 저.. 저 녀석이 죽으려고 했어? 왜?」 사색이 되어 묻는 모습에 헤론이 조용하게 대꾸해주었다. 「오자마자 못 볼 것을 봤군. 죽으려고 한 것은 아닐세. 원래 독을 마시는 연습을 하면 저렇게 되지. 아마 황제가 저리 침착한 것도 자신이 겪은 일을 보는 듯해서 그럴 거야. 하지만 대게는 20살이 넘었을 때 그 체력이 버틸 수 있을 때부터 시작하거나 왕자께서 마신 독보다는 좀 덜 위험한 독으로 하는데..... 그건 뜻밖이군. 그래서..」 「자...잠깐. 황제? 황제라고 했어?」 「허허. 이미 다 아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네 충격이 크더라도 여기서 쓰러지지는 말게. 좀체 무거워서 들고 가기 힘드네 자네는.. 쯧.」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길을 바라보며 헤론이 근심에 잠겼다. 「형......허헉..............자....잘못했어요.」 「형............. 아.......아바마마께.........아으윽.......」 「허억..........허억............다....다시는...그.............근처에...........으...........으.......응」 간간이 신음 사이로 내 뱉는 말을 듣는 사내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옷이 사라졌음에도 온 몸은 땀에 젖었고 잡은 손은 차가워져만 갔다. 조금 후에 깨어난다고 했던 헤론을 다시 불러오고 싶을 정도로 마음속은 타들어만 갔다. 그리....애타게 하고싶은 말이 무엇이더냐! 나를 봐라 타이라! 괴로워하는 소년을 안아 올리며 왕이 탄식했다. 아........! 눈부셔!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이라고는 찬란하게 비추는 햇살이었다. 「맞다! 길........ 근데..... 여긴 어디지?」 자신이 누워있던 곳이 아니라는 것은 희뿌연 풍경 뒤에 오는 벽의 모양이 틀려진 것을 인식한 다음이었다. 사물이 오랜 잠 뒤에 오는 여파로 모두 뿌옇게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조용하고 매끄러운 음성으로 한 여성이 고개를 조아리며 옆에 섰다. 「앗. 여긴 어디죠?」 「몸이 좀 나아지시면 식사를 올리라 명하셨습니다. 특별히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니. 여긴 어디예요?」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해주는 것을 보면 상당히 무례한 시종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시녀의 머리에는 황제궁에서만 보이는 장식이 달려있었고 스쳐보기에도 굉장한 실내장식의 방은 자신이 깨어난 곳이 매우 특별한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큰일났다. 여기 왜 온 거야. 길은 도대체 어디간거야........ 아으...... 오랜만에 했더니 죽겠다. 약 조절을 조금만 할걸 괜히 처음부터 무리했어. 여긴 환경도 다른데 말야...」 시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참 후에 돌아온 시녀 뒤로 여러 명의 시종들이 들어왔고 탁자 위에 골고루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사람의 모습에 타이라는 심장이 철렁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왜........ 왜 온거지? 당분간 눈에 띄지 말라고 했는데? 「뭘 멍하니 보는거냐. 이리 와서 먹어라. 아니면 그대에게 내가 직접 먹여줄까?」 「으아~ 됐습니다. 제가 먹을게요.」 후다다닥. 훈련된 강아지처럼 음식이 차려진 곳에 앉았다. 그의 왕은 맞은편에 자신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앞으로 그대를 내 궁에 머물게 하려고 한다.」 「쿨.....쿨럭......네?」 「훗.. 모란궁보다는 이곳이 머물기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이카의 왕자잖아요. 볼모를 황제와 함께 둔다는 말은 전대미문입니다.」 「그대가 간식으로 이상한 것만 주어먹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어디에 있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대가 먹은 독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신과 매일 부딪히잖아요! 라고 대꾸하고 싶었던 타이라의 말은 살기어린 눈에 쏘옥 들어가 버렸다. 「다시 한번 그따위로 네 몸을 굴리면 그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라나는 본디 황제의 것. 넌 네 몸에 난 머리털 하나조차 내 허락 없이는 자를 수 없다. 그대를 시기하는 무리가 생길까 두려워 궁과는 멀리 두었건만..... 쯧. 시기하는 무리보다도 그대 자신이 그대의 몸을 아끼지 않으니 차라리 내 옆에 두는 것이 속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그 독으로 전 죽지 않아요!」 「시끄럽다. 내게 해독제랍시고 세르판에서 해독약을 건내준것도 그대가 아닌가! 그때 한 말을 기억하느냐? 그 독약은 그 자리에서 즉사할 만큼 강하다고 한 것도 그대다!」 타이라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졌다. 그가..... 자신이 세이카에서 해독제를 준 사람과 동일인물임을 알고있었다. 「어...어떻게 알았어요?」 「훗.......!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세이카에서 궁을 다 뒤집었다. 그때 네 형들이 울면서 말하더군. 세이카궁에서 본 금발 시녀를 찾아내려고 궁성에 있는 시녀들을 다 불러 세우고서도 보이지 않기에 왕자들을 닥달한 뒤에 알았지. 세이카이 왕에게 마지막 왕자가 있고 그가 금발이라고 하더군......후훗. 가까이에 두고도 나를 고생시키다니 그때의 억울함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까?」 「으아아아.........하..하지만 다 알면서........ 그럼 으.....으음........ 머리 아파요.」 「머리 아플 것 없다. 그대에게 주어진 라나의 지위는 유효하고 그대 또한 내 곁에 있으니 변할 것은 없어.... 영원히」 「쉬어라. 그대에게 할 이야기가 많지만 말은 아낄수록 좋지.」 허억...... 무서워. 그가 무섭다. 타이라는 조용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폐하 곁에서 주는 밥을 먹으며 세월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타이라의 말에 사내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서 있는 타이라에게 왕이 다가왔다. 타이라의 입술에 닿은 왕의 입술이 뜨거웠다. 그리고 조용하게 타이라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 숨결을 삼키고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그리고.... 숨을 앗아갈 만큼.......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임무를 주지. 즐거울 것이다. 후후훗..」 타이라를 마주보며 그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15. 「아니. 이건 너무해요!」 「동의하에 시작한게 그 어디에 누구더냐? 벗어라!」 「싫어요!」 「훗. 좋아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이익!!!!! 좋아요. 다시해요.」 「일단 이번 판은 내가 이겼으니 벗어라.」 「정말 끈질기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거 처음해본다고 했잖아요. 이잉.」 「처음이다. 그대가 규칙을 알려줬지않느냐.」 사기다 사기. 그가 세이카의 놀이를 당연히 모른다고 했기에 알려준 것은 분명 자신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모란궁에 있었으면 산책이라도 하지 않았겠냐고 투덜거린 자신을 부르더니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냥 하면 재미없다고 세이카의 궁에 들어가기 전에 마을 친구들과 해봤던 기억을 되살려 걸쳐진 의복을 하나씩 벗기로 하였다. 그는 매우 흥미있어했다. 그래서 그런지 밖의 시종에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놀이도구를 들고 왔다. 커다란 나무판과 여러 개의 말로 서로의 말을 따먹는 놀이이었다. 초반은 아주 좋았다. 그가 걸친 의복은 한두 벌이 아니었고 그 걸쳐진 의복이 매우 간소한 차림이 되자 그는 눈빛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 놀이를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내 머릿속을 꽤 뚫는 것처럼 이기기 시작했다. 억울해. 이건 반칙이야. 라고 소리칠 수도 없이 정당하게 그는 놀이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슬쩍슬쩍 띠우며 나무판에 올려진 내 말들을 하나씩 잡아먹기 시작했을 때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잠깐만!」 「......?」 「솔직하게 말해요. 이거 해봤죠?」 「흠..... 이 놀이가 세이카에서는 왕실에서 하는 놀이던가?」 「아뇨.」 젠장. 그걸로 그의 대답은 끝이었다. 작은 소국의 왕실에서도 안하는 이런 서민들의 놀이를 그가 알 리가 만무했다. 억지를 부릴 수도 없고 걸쳐진 하의 한 벌만 빼면 거의 전라인 몸으로 가뜩이나 추워죽겠구만 파르르 떠는 나를 보며 그는 마지막 여유를 부리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한수 물러줄까?」 정말? 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가 피식 하고 웃음을 날리며 그윽한 저음으로 그 말을 내뱉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 무슨소리하는겁니까. 그냥해요. 참나.」 「그래? 자. 그럼 해볼까?」 「으아아아.. 한수 물러줘요.」 그가 의자에 느긋이 기대어 앉았다. 「흠... 그냥 물러주면 재미없지. 그러고 보니 그대와 입맞춤을 한지도 참 오래되었군.」 「헉.... 차라리 벗을게요.」 「흠.. 그 하의를 벗어도 눈은 즐거우니 난 상관없다.」 「아. 알았어요. 한수 물러 봐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여유로운 손짓만큼이나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그 얼굴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냥..벗을 것을 그랬나? 망설임은 몇 초간. 그가 확 잡아당기는 통에 그의 품에 단단하게 안겼다. 엉덩이 아래로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지고 벗겨진 몸에 그 따뜻한 손이 닿자 오히려 그 따뜻한 기에 낮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으......음....」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숨결이 가빠오기시작했다. 「폐......폐하!.」 으아아아아아악!!!! 들어선 사람은 반라의 옷차림으로 황제에게 안겨있는 소년과 자신의 주군을 올려다보며 거의 안절부절 못하고 서있었다. 「말하라. 무슨 일이지?」「놔. 놔요! 이게 뭐예요. 사람이 있잖아요.」 「예. 폐하. 오늘 저녁에 즉위식전으로 스테론 공작부인께서 파티를 주관하신다고 하십니다. 그 파티에 참여하실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래? 흠.... 스테론공작이 주최하는 것이면 가 봐도 좋겠군」「으으윽... 놓으라니까요?」 타이라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이 섞여있었고 잡혀진 허리에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흠흠... 저..이..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폐하.」 아마도 시종이 사라진 자리는 그 사람이 흘린 땀으로 강을 이루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타이라는 화가 나서 떨어진 옷가지를 주어들고 방 밖으로 나와 버렸다. 등 뒤에서 웃는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다시는 그가 불러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박박 갈면서 황제궁의 안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궁의 안뜰에는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연못이라고는 하나 그 규모가 호수만큼 커다란 그것은 바라보고 있기에 딱 좋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픈 머리가 욱신거리고 붉어진 볼이 식어갈 무렵 난 나를 괴롭히는 또 다른 목소리에 흠칫하고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아..... 공주님?」 「꺄르르르르.. 계속 찾았는데 여기 있었구나. 친구들이 궁밖에 있는데 같이 가요.」 「아... 거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손을 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일 보기만 하면 놀리는 황제와 같이 있는 것 보다는 궁 밖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다는 생각에 꼬마공주에 손에 이끌려 황제궁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문지기는 메리안과 같이 나가는 모습에 별다른 이의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뭐. 보고 할테면 하라지. 아우 창피해죽겠어. 왜 보기만하면 그렇게 장난이야. 장난이. 「앗. 언니 화났구나?」 「저. 다시 말하지만 전 언니가 아닙니다. 이왕이면 타이라라고 해주시겠어요.」 「알았어. 그럼 우리 빨리 가보자.」 메리안은 종종종 작은 동물처럼 잘도 뛰었다. 그녀가 뛰는대로 이끌려간 곳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메리안의 또래에서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사람들. 아마도 세르판의 귀족의 자제들인 것 같았다. 들어서는 방 안은 시끌시끌하였고 시종들도 그 모습을 숨기고는 있다고 하나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방안에 있었다. 조금 거북스러웠다. 원체 이런 공간을 싫어하는 탓도 있었고 전 궁에서도 별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 정말 왔네?」 한 사내아이가 말했다. 사내아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띄는 소년이 다가와 나를 살펴보듯 보고는 인사를 했다. 「흐음....... 네가 그 라나야? 황제폐하의 궁에 머문다는?」 젠장. 소문이 벌써 다 났구나. 이래서는 조용하게 있고 싶다는 바람은 벌써 강 건너 멀리 갔군. 그냥 돌아가야겠어. 「죄송하지만 메리안. 다음번에 뵈요. 아무래도 전 다음에 와야겠어요.」 「언니. 가게?」 「킥킥.. 들었냐? 언니랜다. 메리안. 그 녀석은 남자야. 언니가 아니라고. 하긴 황제의 라나라고 얼마나 유세가 심하겠어. 어디서 굴러먹은 녀석인지 모르지만 세이카에서 왔다면 말 다했지. 알고 있어? 너 때문에 입궁하려던 우리 누나가 집에서 울고 난리 났다. 우리 가문은 선대가 약조한 왕비집안이야. 흥.」 「그러시다면 축하드립니다.」 나의 말에 그 사내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목소리 톤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난 가급적 조용하게 축하인사를 건냈다. 그리고 재빨리 그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방문을 향해 걸었다. 터억......! 「키리온은 됐다고 하지만 난 네가 싫어. 알아? 너 때문에 우리 아버지께서 세이카에서 목숨을 잃으셨지. 야! 거기 이 녀석을 잡아.」 「놔라.」 「어쭈~ 제법이네? 화도 낼줄알아? 크큭... 그래 잠잠히 있는 녀석처럼 재미없는 것은 없지. 이봐 키리온 이 녀석은 내가 접수한다. 너도 이의 없지?」 「왜 나를 놓고 둘이 의논하지? 내 몸은 내 것이다.」 「웃기고 있네. 라나는 황제의 노리개야. 넌 기르는 가축에게도 의향을 물어보냐?」 「메리안 넌 나가있을래?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휴우....... 알았습니다. 메리안 여기 사람들이 저와 할 이야기가 있나 봐요. 잠시 먼저 가있을래요? 거기 연못에서 보면 되겠죠?」 메리안이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난 웃어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런 경험이야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언제나 겪었던 것이니까. 좀 아프긴 하겠지만 반응이 없으면 재미없어하겠지. 「하지만....언니. 아니 타이라. 황제폐하께 말해줄게. 난 같이 놀자고 왔는데. 키리온이 화 낼줄 몰랐어. 휴리아 언니가 많이 울어서 키리온이 화났나봐.」 메리안이 조용하게 귓가에 속삭였다. 난 메리안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걱정 말아요. 이건 우리 비밀 알죠? 폐하께도 비밀로 해줘요.」 메리안이 나가고 시종들이 밖으로 나갔다. 키리온이라고 불린 사내와 그리고 이름도 듣지 못한 10여명 가까이의 여자와 남자들.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지만 누구하나 말 한마디 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후훗.... 라나라고 했지? 즉위식 때 네가 폐하를 모신다면서?」 「........」 대답안하는게 좋겠지. 나조차도 원치않는 일이라고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으니까. 「야야....... 키리온 봤냐? 휴리아 누님이 이 녀석 때문에 고생할 것을 봐라. 이 녀석 고집이 대단해. 그렇다고 일일이 다 이르는 비겁한 짓은 안하겠지?」 그게 두려운 것이겠지. 훗..... 「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부재중이면 폐하께서 찾으실 겁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라? 협박하는거야? 폐하가 너를 애지중지 한다고 우리가 널 곱게 보내줄지 알아? 겁도 없는 녀석일세.」 「전...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켜봐 너희들. 저 녀석 말도 맞아. 황제의 라나는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지 난 녀석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을 뿐이야. 그냥 보내줘.」 「뭐야. 키리온. 너 저번에 한말은 아무것도 아니냐?」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다들 모여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키리온이 귀찮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중 한 사람이 커다란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그래. 우린 싸운게 아냐 정당하게 라나께서 요청하신 결투를 받는 거지. 여기 레이디들이 증인이야. 그렇죠? 숙녀분들?」 무기도 없는 내게 결투라고? 하.....! 「좋습니다. 만약 이 결투에서 제가 이겼을 경우에는 제게 아무런 제약도 하지 않는 다는 약조를 키리온님께서 해주신다면 그 결투 받아들이겠습니다.」 「오......건방진 자식. 덤벼.」 키리온이 고개를 까딱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통성명? 그런 것은 필요 없었다. 휘익 하고 날아온 발차기에 난 배를 흠씬 두들겨 맞고 저만치 투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쿨럭............쿨럭...... 제법 발길질이 매서웠다. 멀리서 어머어머. 라는 형식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잠겨진 문 앞에 서너명 그리고 여자들이 저만치 다섯명... 오른편 창가에 키리온이라 불리는 사내. 그리고 나와 싸우는 사내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두명의 사내. 그 눈에 들어있는 나. 사내는 내가 나동그러지자 자신감을 얻은 듯 일어나는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빗맞았지만 제법 아팠다. 이겨야해....... 어떻게? 서 있는 사내의 배를 발로 차주자 뒤로 주춤 약간 밀렸다. 역시 힘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난 그의 급소를 안다. 좋아. 덤벼!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러 달려드는 사내의 배를 가격했다. 투웅 소리를 내며 사내가 쓰러졌고 키리온이 다가왔다. 「그만해라.」 「웃기지마. 감히 날 이기겠다고 그러잖아. 계집애 같이 생긴 녀석이.」 그 뒤부터는 사정없이 후려치는 발길질에 계속 떠밀렸다. 악을 쓰고 이기려고만 한다면 못이길 것도 없었지만 참아야했다. 퍼억..... 훗....그래도 귀족이 자재들이란 것들일진데.. 하긴 왕족이라는 내 형들도 이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어. 퍼억..... 아..... 아프다. 별로 좋지 못한 광경임에는 틀림없었다. 반항조차 하지 않는 여리한 사내아이를 세 명의 건장한 청년이 때리는 모습에 키리온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게 더 열 받게 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아프면 울면될 것을 소년은 붉은 입술을 앙다물고 때리는 대로 맞고 있었다. 더욱이 역겨운 것은 바라보면서 웃는 저들이었다. 처음처럼 누나에 대한 화가 남았다면 좋았겠지만 저리 맞는 녀석을 보니 그 화도 사그라들고 짜증만 솟을 뿐이었다. 「그만해. 그러다 정말 큰일 나! 그만해!!!!!!!!!!!!!!!」 커다란 고함소리에 사내들이 뒤로 물러섰고 기운이 없는 듯 소년이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술이 터져 붉게 보이는 그 입술자락위로 핏물이 흘렀다. 무심결에 닦아주려던 손을 밀어버리고 그가 속삭였다. 「제가 이겼습니다. 앞으로 이런 파티에는 다시 참석하지 않습니다.」 흐트러짐 없이 소년이 사라진 뒷모습에 아련한 금발에서 풍기는 꽃향기만 남기고 사라지고 키리온은 멍하니 소년이 사라진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아흑....... 맞을 때 잘못 맞았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한대 맞은 것에 앙심을 품은 녀석이 죽어라 때려서 그런지 형들에게 맞을 때도 멀쩡했던 갈비뼈가 금이 간 건지 숨쉴 때마다 결리기 시작했다. 메리안이 기다릴 텐데.......... 가까스로 찾아간 연못에 메리안은 없었다. 기다려 준다고 했으면서. 괜시리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훗... 이건 아픈 것도 아니잖아. 이런 일로 울지 말자. 참아야해. 그래도 또르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눈을 감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한점 없이 맑은 하늘은 모래먼지 속에서 보는 하늘과는 매우 틀렸다. 청명하고 그 하늘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그리고 잔디에서 나는 풀 향도 몹시 좋았다. 이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자신만 제외하고는... 눈을 감았다. 대지의 기운 때문인지 조금 숨쉬기가 수월해졌다. 「메리안. 장난하지 마. 나 많이 아파.」 머리를 만지는 느낌에 눈도 뜨기 귀찮을 정도로 힘든 난 물었다. 「이 얼굴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야기 해주지 않는다면 더 아프게 해주겠다.」 「핫! 아윽.... 아무 일도 아니에요.」 「훗...... 그럼 잠시 나가서 들짐승이라도 뜯어먹고 왔나보군 입술에 피가 묻은 것을 보니.」 「하하하하. 재밌네요. 폐하. 그런 농담도 하실 줄 알고. 아까 넘어졌어요.」 「타이라 세이카. 그대 눈에는 내가 뭘 로 보이나.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그 이유를 말할 때까지 그대를 괴롭히겠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휴.... 그냥... 좀 쉬면안될까요?」 맑은 연못물이었다. 그가 자신의 옷을 찢어서 물에 적셨다. 그리고 따끔거리는 입술을 닦아주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흐르는 눈물은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인지... 몹시 뜨거웠다. 부드럽게 안아주는 그 손길에 등을 감싸는 온기에 속으로부터 끄윽끄윽 하는 울음이 밀려와 그의 등을 그러안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잦아들 때즈음 그가 속삭였다. 「아프지 마라. 타이라. 그대를 사랑한다.」 타이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완결/장편] 후원의 왕자 16-21 16. 나른하고 피곤하였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서늘한 밤기운이 도는 창밖을 몇 번을 바라보고 그리고 침대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생각했다. 그의 눈빛 말투 그리고 목소리.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팠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한 병이 생겼어. 일어나야만 했다. 언제까지고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얼굴에 홍조가 돌만큼 입맞춤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렇게 무미건조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치겠다. 정말.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거야! 이걸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돌아버리겠다. 악악악~!!!!」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그가 남기고간 말을 대뇌이다 뜬눈으로 지세운 밤이 아까울 뿐이었다. 시녀 두 명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황제궁의 시녀는 두발이 자유로운 다른 궁보다 더 엄격해보였다. 머리를 가지런히 올렸으며 그 올린 머리에는 은색의 장신구를 하나씩 달고 있었고 그 모습도 더 차분하고 위엄 있어서 그냥보아도 직위가 높아보였다. 「예복을 갖추시기 전에 목욕을 하셔야합니다. 잠시 이리로 와주십시오.」 「예복이라뇨?」 「폐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앞으로는 라나로서의 예의범절과 지식 그리고 몸가짐을 익히셔야합니다.」 「뭐.....뭐라고요? 라나?」 「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보이지 않는 나이 지긋한 시녀는 조용한 몸가짐으로 다가와 침대에서 엉거주춤 누워있는 타이라에게 다가왔다. 그 몸서리 쳐질만한 말을 조용하게 아무 일 없는 듯 아뢰며 조심스럽게 앞장서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라나의 몸가짐이라뇨?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 꿀먹은 벙어린가!!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엉거주춤 채 옷도 여미지 못하고 끌려가는 타이라의 뒤를 감시하듯 나머지 시종이 따라붙었다. 뒤를 봐도 앞을 봐도 예의를 잔뜩 갖춘 그녀들은 타이라의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정말 싫어! 정말 싫어~!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넓은 목욕탕에 많은 시녀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 자체가 소름끼칠 정도로 싫은 일이라 타이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 다들 물러가주세요.」 「익숙해지셔야합니다. 라나께서는 몸을 정갈히 하시고 의장을 갖추셔야 합니다.」 「으아~ 안돼요. 폐하를 만나겠습니다. 제 팔다리가 다 성한데 누구한테 옷을 입혀달라고 한답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 없어요!」 타이라는 버티기 시작했다. 그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보기에도 따뜻해 보이는 물을 바라보며 거의 죽을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물러들가라.」 사샤삭.. 발밑에 연기가 나면서 사라지는 것처럼 스르륵 사람들이 뒷걸음치며 사라졌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밤새 한잠도 못 자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훗. 보면 모르는가? 목욕을 하는 것이다. 세이카의 왕자라면 늘 받던 일. 새삼스럽게 소란 떨지 마라.」 간편해 보이는 옷을 걸치고 여유로운 표정을 띄우며 왕이 다가왔다. 주춤.. 주춤.. 두어 발자국 물러났지만 고개는 그를 향해 뻣뻣이 들고 타이라는 화를 내며 말했다. 「목욕하는건 이해하지만 무슨 시종이 이리 많아요? 벌거벗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건 맞군.」 「엥?」 「자랑할 만한 몸매는 아니야.」 손을 턱에 가져다 대고 빙긋 웃으며 감상하듯 바라보자 타이라는 몹시 창피해졌다. 「뭐..뭐예요.」 「벗어라.」 「네?」 「흠... 내게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대는 꼭 두 번씩 말을 시키는군. 아니면 내가 벗겨주어도 좋고. 옷을 입고 목욕을 하는 취미가 있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으아아아아~~~~~~~~~`」 풍덩! 소리를 내며 따뜻한 물속으로 타이라는 내동댕이쳐졌다. 「어푸.......! 죽을뻔했잖아!」 「그 목욕물로 죽지는 않는다. 후훗. 어서 빨리 왕자의 시중을 들어라.」 그 후에 들어온 네 명의 시녀들에게 걸쳐진 몇 가지 안 되는 옷들이 벗겨져나가고 악악거리고 발버둥치며 타이라가 소리치는 동안 싯겨지고 다듬어지며 말려지는 일련의 과정을 소리 없이 지켜보는 왕의 눈빛을 피해 최대한 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왕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나는 것을 타이라는 알지 못했다. 그 수많은 상처에 더해진 퍼런멍자국들을 보며 왕은 분노했다. 타이라가 입은 옷은 초록대지에 어울리는 푸른색 옷감. 그리고 정갈한 의복에 맞추어 허리에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이 되었다. 그 과정동안 반항하는 타이라의 수족을 단지 몇 마디 말로 제압한 위대한 황제폐하는 이미 타이라의 마음속의 독설을 듣지 못하는 듯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으아. 너무 치렁치렁해.」 「흐음. 그러고 나니 제법 의젓해 보이는구나!」 「헉. 혹시 전 이제부터 이런 옷을 입나요?」 「대게는 그렇지. 모두 물러가라. 이 이후는 내가 손수 하겠다.」 「.......? 무..뭘 해요? 이게 끝 아니에요?」 시종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잠시 머뭇하더니 들고 있던 물건을 황제의 앞에 놓고 사라졌다. 창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빛이 반사되면서 반짝반짝 아름다운 광체로 부셔졌다. 「이리 앉아라.」 황제의 앞에 놓여진 의자에 타이라가 머뭇거리다 앉았다. 타이라의 머리칼은 긴 금발. 그 머리칼을 시녀는 살짝 올려놓고 사라졌고 왕은 자신에게 놓여진 장신구를 타이라의 머리칼에 달아주기 시작했다.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머리핀 모양의 긴 장신구는 올려진 머리 사이에 살짝 찔러지고 그 끝에 달린 보석들이 차륵차륵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런건 너무 불편해요.」 「예쁘구나. 이전에도 가본 곳이지? 스테론공작의 성에서 한다는구나. 궁에서 머물다가 즉위식을 보고 간다더니 무슨 일로 연회를 여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기는 좋을 것 같아서 같이 가기로 했다. 옷이 적응이 되지 않더라도 조금 참도록 하고 마차가 준비되면 먼저 출발하도록 해라.」 「폐하는 안가시나요?」 「내가 있으면 어려워할테니 먼저 가도록해라.」 그의 배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친구들과 사귈 시간을 준다는 그에게 차마 어제 이미 담을 쌓을만한 싸움이 있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비밀로 숨기려고 했던 것인데 그가 주는 마음의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어제 맞은 여파인지 가슴 한구석이 아련하게 아파왔다. 황궁의 화려한 육두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 중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황제의 기사들 중 가장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지 못한 아마드였다. 아마드가 말을 살짝 옆으로 끌어와 가볍게 인사를 건내자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 바쁜 일이 있을 그를 같이 보내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속으로 삼키고 타이라는 모처럼 떠나는 여행을 즐기기로 하였다. ? 그의 신변을 잘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 어제 왕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고하도록 곁에 있던 시종을 불러와라. 앞으로 왕자의 신변에 위협이 가는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중 처벌할 것이다. ? 왕의 서늘한 말 한마디를 상기하며 황제의 기사들과 시종들은 황급히 궁 밖을 나섰다. 「타이라님. 내리십시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처음 세르판에 왔을 때 보았던 성이었다. 건물이 한 채라지만 그 규모는 매우 컸다. 성 앞의 시종들이 일렬로 고개를 숙여 왕의 마차를 향해 예를 다했고 들어선 타이라가 내리는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파티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오랜만에 여행을 해서 그런지 피곤함에 타이라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을 신기한 동물 보듯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도 무감각할 수 있었다. 왕의 기사가 그 휘장을 휘날리며 라나를 수호하였지만 이례적으로 황제의 라나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은 곳곳에 퍼졌는지 연회장은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세이카의 내노라하는 스테론 공작가의 파티에 불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지만 스테론 공작의 커다란 성의 뜰도 마차들로 북새통을 이룰 지경이었다. 그 인산인해의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제일먼저 황제의 라나를 알아본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키리온의 눈은 커다래졌으며 그리고 날카로워졌다.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황제의 라나가 황제의 기사와 함께 들어선 모습에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흘렀다. 스테론공작부인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황제의 라나를 맞이했다. 그녀가 연회를 연 이유는 조금 복잡했다. 의외로 늦어지는 즉위식 중간에 무료해하는 귀족들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딸 메리안의 부탁이 가장 컸다. 그리고 소년의 안부도 궁금하던 차였다. 처음 낯선 땅에 와서도 서글한 웃음을 띠는 소년의 모습이 생각났다. 좀처럼 황제궁안에 틀어박힌 그를 볼 수 없다는 불평을 해대는 딸처럼 자신도 쓰러질 것처럼 하얀 얼굴의 그가 왠지 모르게 다시 보고 싶어졌다. 요청을 한 것은 남편이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왕이 자신의 라나를 연회에 보내줄 지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신반의한 공작부인은 타이라가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가워요. 건강해보이는군요. 제 딸이 어제 걱정을 많이 하던데 메리안은 지금 왕자께 예쁘게 보이고 싶다고 한껏 치장중이랍니다.」 성의 안주인다운 여유로운 웃음으로 자신을 대해주자 마음이 가벼워진 타이라는 하인이 안내해주는 사람들의 한편으로 갔다. 그리고 성의 여주인은 무슨 부탁을 받은 듯 한 무리의 사람들 틈으로 자신을 끌고 갔다. 형식적인 인사가 오간 후에 둘러본 사람들 속에는 몇몇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키킥.. 안올줄 알았는데. 왔네?」 「.........」 「아프진 않았냐? 오늘은 예쁘게 하고 왔네?」 흥!!! 나쁜 놈. 가만히 좀 둘 것이지 빈정대는 폼은 꼭....... 누구랑 같군. 참자. 참아야해. 여기서 반응하면 재밌어할 거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재빨리 연회장 옆의 뒷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 이르러서 뛰었다. 넓은 홀 이였고 그리고 커다란 성이였다. 나 하나쯤 사라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야.....허헉.. 조그만게 왜 이렇게 빨라.」 「훗. 좋은 말할 때 멀찍이 떨어지는게 좋을겁니다.」 「......!!」 「약속했으니 지키시지요.」 「킥킥. 그럴줄 알았어. 생각보다 재밌어. 누나가 고생깨나 하겠군 그래. 하지만 난 그런 것에 관심 없어.」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쓸때없는 수작 따위 듣고 싶지도 않고 그 말에 거들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돌아 나오는 뒤에 그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세이카의 병사는 감옥에서 울고 있다네.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을 지고.. 세이카의 왕자는 몰라라 하네. 자기혼자 예쁜 옷을 입고 적국 황제의 품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화가 나서 한대치고 싶은 심정을 추스르고 그를 노려보았다. 「세이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게. 그건 너도 흥미있지?」 젠장. 어쩐지 느물거리듯 말하더라니.. 「포로로 잡힌 병사가 있나요?」 「물론. 난 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바로 들을 수 있어. 어때? 궁금하지?」 「만날 수 있나요?」 「킥..... 글쎄 너 하기 나름이야.」 비로소 그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둘째 형과도 비슷한 느낌. 귀족의 자제답게 비싼 옷에 둘러싸여있는 곱슬머리의 사내. 빈정거리는 말투만 아니라면 제법 봐줄 만한 외모였다. 비스듬히 기대어선 벽의 넝쿨이 그의 옷자락에 스쳤다. 뭘 원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되죠?」 「마차를 보내줄게. 몰래 나와. 아무에게도 안 들키고 연회가 끝나기 전에 몰래 빠져나올 수 있다면 잡혀있는 포로를 볼 수 있을 거야. 오기만하면 돼. 오기만 후훗.」 「좋아요. 나중에 보죠.」 빙긋 웃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란도 보이지 않고 전쟁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방법도 막혔고 답답한 마음에 그를 이용하면 잘하면 세이카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왜 그와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오마나! 깜짝이야. 아마드? 「언제 왔어요?」 「주군께서 항시 타이라님을 보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례하게 여기실지 모르지만 방금 대화내용을 다 들었습니다. 그는 소문이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약조는 하실 필요도 지키실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드. 그럼 당신이 얘기해줄 건가요? 세르판에 온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아무도 세이카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군요. 폐하조차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화제를 돌리시는군요. 그럼 말해줘요 아마드. 세이카는 지금 어찌되었죠?」 「.......죄송합니다. 타이라님. 말씀드릴 수 없군요. 전 타이라님의 호의를 맡았을 뿐입니다.」 「그럼 방해하지마세요.」 아마드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이 반감을 가지지 않게 더 이상 진언하지 않았고 타이라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제 걱정은 마시고 쉬다오세요. 긴 거리였잖아요. 말을 타시느라 힘드셨을텐데 아. 혹시 헤론을 만나시면 전해주세요. 저번에는 너무 감사했다고... 걱정 끼쳐서 너무 죄송하다고요. 그리고 고마워요 아마드. 바쁜 일도 많을텐데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훗....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군. 아마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만약 왕자가 키리온 실버리안이 보내는 마차를 타고 간다고 해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보는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면 아마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왕자가 편히 쉬도록 몸을 숨겼다. 「아.....아마드?」 잠시 생각에 잠겨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아마드가 사라졌다. 안쪽 홀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타이라는 조용히 뒤뜰의 더 안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그림자가 희미해지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하늘은 붉은색과 보라색의 오묘한 색으로 눈을 앗아갈 정도로 황홀하게 물들어있었고 점점 어두워져갔다.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난 것도 같았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홀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정말 추위는 참기 힘들었다. 특히 걸쳐진 이런 옷으로는 더더욱. 들어선 홀 한편에서 메리안이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흘끗 뒤를 돌아보고는 얌전한 걸음걸이로 조심조심 걸어서 다가왔다. 「타이라님 계속 찾았어요.」 푸훗. 웃음이 나왔다. 주변을 인식해서 그런지 아니 분명 멀리서 보고 있을 스테론공작부인의 영향이 컸는지 메리안은 어색한 존대어를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공주님. 그렇게 말안해도 공작부인께서는 듣지 못하십니다.」 「어? 어.」 「어제는 왜 안 기다려줬어요? 나 화났어요.」 「아냐. 사실 황제폐하를 찾아갔어. 근데 안보이시더라고 계속 찾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엄마가 급하게 돌아가신다고 하지 뭐야. 근데 타이라는 뭣 좀 먹었어? 사실 연회는 재미없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타이라를 또 볼 수가 있어야지. 황제폐하가...응... 다시는 황제궁에 마음대로 못 들어오게 문을 쾅 닫았어. 칫.」 「그래요? 전에는 들어왔잖아요.」 「몰라. 이상해. 이제 아무도 못 들어가. 휴...... 아무튼 다시 보게 되서 정말 좋아.」 저렇게 좋아하는 소녀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덜당아 좋아졌다. 귀여운 메리안 그 머리칼조차도 얼굴과 어울리는 고수머리였고 프릴달린 긴 치마가 너무 앙증맞았다. 메리안과 함께 한편에 놓여있는 다과를 먹었다. 입안가득 들어오는 과일향이 좋았다. 메리안은 그 작은 손으로 몇 번을 주어먹더니 실증이 난 듯 저만치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귀여운 아이야.」 메리안의 성격은 풍족한 삶을 살아온 전형적인 소녀다웠다. 그늘이 없었고 무엇보다 명랑한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마음속 한 곳에 잠재되어있는 어둠을 없애주는 것 같아서 그녀가 좋았다.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까? 눈이 마주치자 소녀가 생긋 웃었다. 마주 웃어주는데 멀찍이서 사내하나가 걸어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제각기 모여 있는 사람들 흘끗흘끗 나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앞서는 사내를 따라 조심스럽게 홀을 빠져나갔다. 마차는 아무런 문양도 없었다. 그렇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자락의 이야기라도 내게는 소중했고 내게 빈정대는 키리온의 말대로 화려한 옷으로 이렇게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세이카의 병사들은 무수히 죽어나가며 그 선두에 선 그레이스에게는 더 안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이미 어둑해진 뜰 밖을 나서는 마차와 마부를 유심히 보는 사람은 없었다. 밤바람이 서늘했다. 마치 내 마음속처럼. 17. 마차가 가는 길은 사람들의 인적이 드믄 곳이 틀림없었다. 말발굽에 체이는 자갈과 고르지 못한 마차바퀴 소리는 지금 지나는 길이 왕래가 적은 곳임을 증명하듯 잦게 들렸고 더불어 말에 휘갈기는 채찍의 소리도 매서운 바람 속에 자주 들려왔다. 마차안의 작은 창으로 내다보는 곳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어스름한 초저녁시간에서 많이 달려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살을 스치는 얇은 옷감도 추위를 이기는 방패가 돼주지 못했고 이미 스테론공작의 성까지 달려온 여파에 더하듯 고르지 못한 길로 온 여행은 저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였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머리를 내밀고 소리를 치자 마부가 놀란듯하였다. 하긴 달리는 마차 안에서 머리를 내미는 손님은 태워본 적이 없었을 테지..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가야한단 말인가. 그 성질 급한 왕이 찾기라도 한다면 목숨하나 따위 이승을 하직할지도 모르는데... 걱정이 되었다. 묻는 말에 보답하듯 마차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결국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깔린 장소에 와서야 마차는 속도를 늦추었고 조금 더 달린 후에 터벅터벅 부드러운 땅을 밟는 느낌이 났다. 마차가 멈추었다.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열려진 문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횃불이 보였고 눈이 적응되자 평지의 낮은 구릉에 막사가 보였다. 아무래도 눈에 띠는 저곳이 세르판 병사들이 머무는 곳이 맞는 것 같았다. 마부가 고개를 숙이고 조금 앞서 걸어갔다. 그를 따라 걷는 발길이 무거웠다. 어둠 속에 눈에 익은 그가 보였다. 자주 보고 싶지 않은 면상을 대하는 것이라 그런지 인상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킥.. 왔네? 너라면 올 줄 알았어.」 「병사들은 어딨죠?」 「뭐가 그렇게 급해? 어차피 시간은 많아. 초반에 잡은 포로들이라 그런지 별로 상태가 좋지 못하거든 꼭 봐야겠어?」 내 화난 표정이 그에게 잘 보였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무색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어딨습니까?」 「흐응~ 너 그거 알아? 너 화나면 말야 눈이 반짝반짝해. 키킥... 그 살쾡이 사냥을 나갔던 때가 생각나네. 밤에 횃불을 들이대면 번쩍번쩍 하거든. 너처럼. 후후훗.」 이익.. 이 왠수같은 놈이!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야 무엇이 두려우랴.I 난 주먹을 꼬옥 쥐고 가볍게 날려주었다. 퍼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녀석의 배에 꽂히는 주먹에 녀석의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할말 없으면 그냥 돌아가겠어. 어차피 기대도 안했지만 실망이군 키리온. 최소한 사내라면 네가 한 약속은 지켜.」 「쿨럭..... 생각보다 손이 맵군. 좋아. 따라와.」 생각보다 고분고분하네? 키리온이 앞장섰다. 이미 몇몇 안면이 있는 병사들이 있는지 막사 곁을 지날 때 병사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꽤나 여러 번 들락거린 것도 같아 그의 말에 신빙성을 조금 갖게 되었다. 막사의 거의 끝부분을 지나고 나는 주저앉을 정도로 처참한 광경에 눈물이 났다. 젠장..... 죽일 놈들. 흐흑...... 어떻게 저럴 수가! 짐승을 가두는 우리처럼 생겨먹은 곳에 한 낮의 태양도 내리는 비조차도 피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힌 그들.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거의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들이 보였다. 그 미동조차 안하고 바닥에 널부러져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에 가슴 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나쁜 놈들! 흐흐흑.......어떻게 이럴 수가.」 「거봐. 보지 말라고.....」「건드리지 마!」 다가가도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그나마도 20명도 체 안 됐다. 포로가 이렇게 적을 수도 있던가? 나머지들은 어디간거지? 키리온은 악취와 더러움이 그득한 곳을 한번 바라보고는 멀찍이 섰다. 흥미 있어 할줄 알았지만 저렇게 분노할 줄은 몰랐다. 그저 동료애나 느낄것이라고 가까이는 가지도 않고 돌아서서 도망칠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을 비웃듯 아름다운 옷을 걸친 그는 세이카의 병사들이 갇힌 곳에 가까이 다가갔다. 몇몇 눈동자를 굴려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또 새로운 귀족이 나타났고 종전처럼 자신들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 뒤돌아서서 갈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처음 갇혔던 그때처럼 애원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다들 괜찮은 거예요?」 포로들 중 한사람이 뒤척였다. 기가막히다는 웃음을 지을 수 없어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소년의 물음에 욕을 할 힘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무시했다. 「혹시.... 그레이스 대장은 무사한가요?」 「쿠....쿨럭..쿨럭..... 당신은 누구요.」 제일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답에 눈물이 주륵 흘러 치렁거리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야만했다. 「당신은 누군데 세이카 병사의 이름을 안단 말이오.」 쥐어짜듯 그가 다시 물었다. 한 눈에 그들이 나를 알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들에게 자유라고 소리치면서 우리들의 고국으로 자신을 반기는 따뜻한 집으로 갈수 있노라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 여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타이라입니다. 세이카에서 살았어요. 예전에 그레이스 대장에게서 검술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볼모로 있지만....」이를 한번 악물었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히히히힛. 들었냐? 저 꼬맹이가 그레이스 대장에게 검술을 배웠다는데.. 흐흐흑....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희의 소원을 묵살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안해요. 이렇게.....이렇게 되어서. 그레이스는 무사한가요?」 「아닙니다. 쿨럭.. 그레이스 대장은 무사합니다. 쿨럭.....쿨럭.. 우린 포로들 중 사지가 멀쩡한 자들이지요. 쿨럭......쿨럭... 이제 병이 들어 멀쩡할지는 모르지만.. 쿨럭.. 다친 곳이 없는 한 죽이지는 않을겁니다. 쿨럭... 울지 마세요. 몇일 태양아래 있어도 우린 사막의 전사...쿨럭.. 이곳 태양은 무섭지도 않습니다.」 흐흑.... 그들은 추울 것이다. 미동도 할 수 없을 만큼.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이 감옥은 생각보다 허술할지 모릅니다.」 「괜히 그 고운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별별 방법을 다 해봐도 뜯겨지지 않더이다.」 「아뇨. 기다려보세요. 잠겨있다면 여길 여는 열쇄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못 믿는 눈치였다. 그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눈물은 나중에 흘려도 된다. 살아있는 자들이 있으니..... 주변을 살펴보았다. 분명 키리온이 자신을 데려온 것을 만천하에 공개할 만한 입장이 안 된다고 볼 때에 주변에는 간수격인 병사가 있을 것이고 병사들은 많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좋아. 승산이 있어! 아니나 다를까 감옥근처와 막사 사이에 보초병인 듯한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그가 간수일 것이다. 원치 않는 일이지만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넌 누구냐?」 「키리온님이 얘기하지 않으시던가요?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왔습니다. 사실 일반손님들은 재미가 없어서요. 어때요? 병사님이라면 제 욕구를 다 풀어주실 것 같은데..... 호호홋~ 사실 어딜 보아도.. 병사님 같은 분은 없어요. 후훗~」 「키킥..... 계집이 사람 볼 줄 아는구나!」 「그럼요. 그럼 저쪽으로 가실래요? 여긴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호호호홋..」 몇 개 주어먹지 않은 음식이 쏠려서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그를 감옥 뒤쪽으로 유인했다. 어두운 나무 밑이라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러운 그 손을 잡아끌어 허리에 둘렀다. 「좋구나... 키킥. 하긴 계집을 안아본지도 너무 오래 되었어. 여긴 순 사내들 투성이라. 키킥......」 「아이참~ 너무 성급하시네요. 이렇게 하라니까요.」 퍼억~~!! 흠..간단하군. 다행이다. 휴~ 가만보자 이쯤 있을 것도 같은데..... 쓰러진 사내의 품을 뒤적였다. 다행히도 품안에서 열쇄다발이 손에 걸렸다.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도의 한숨이 세어 나왔다. 키리온이 오기 전에 일을 마쳐야만했다. 「허헛. 대장이 요물을 키웠군.」 「흠.. 그런말일랑은 그레이스를 보면 꼭 전해주세요. 받으세요. 빨리! 지금 달아나지 마시고 경계가 허술해지는 새벽녘에 몸을 움직이세요. 보초는 당분간 깨지 않을겁니다. 그레이스가 가르쳐준 급소차기가 제대로 먹혔군요. 그러고 보면 그도 허술한 전사는 아닌가봐요.」 농담에 간신히 웃는 그들. 눈물을 참아야했다. 「받으십시오.」 찔러놓은 핀을 빼면서 긴 금발이 흐트러졌다. 일순 세이카의 병사들은 숨을 삼켰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아름다운 머리가 찰랑였다. 「이걸 팔면 돈이 될 겁니다. 국경을 넘으실 때 바로 가지 마시고 우크란을 거쳐 가세요. 아직 전시상황이라 여신의 강을 통하는 길은 위험합니다. 우크란은 아직 세이카와 동맹을 맺은 상태라 여러분들의 신변에 위협은 가하지 않을겁니다. 멀리...... 가세요. 행복하셔야합니다.」 「흐흐흑.......고맙습니다.」 젊은 병사가 눈물을 흘리는 것과 동시에 다른 병사들의 눈에서도 맑은 물이 비어져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을 눈물 속에 삼키며 돌아서는 소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일은 다 본거야? 어라? 머리를 풀렀네? 예쁘다.」 머리칼사이에 손을 집어넣는 그 행동을 저지 할 새도 없었다. 「...........」 「훗....울었구나!」 「돌아가겠습니다.」 비로소 그의 눈에 비친 야비한 웃음. 「글쎄. 네가 원하던 부탁을 들어줬으니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윽」 강한 충격에 눈이 감겨왔다. 키리온이 빙긋 웃는 웃음이 마지막으로 눈에 새겨졌다. 「그래? 별궁에서 그랬단 말이지?」 「네. 폐하 그곳 시종의 이야기인즉 메리안님과 함께 별궁에 들리셨다고 하옵니다.」 「궁성 문을 지킨 자가 누구인가. 왜 라나가 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는 건가! 내가 그들에게 이른 말을 그대는 무엇으로 들었지? 감히 황제의 라나를 해하다니. 그 때 보고 들었던 자 모두 그리고 그가 별궁에 가는 길목에 있던 병사 모두 감옥에 처넣어라. 열흘간 굶기고 물 한 모금 주지말아라. 그리고 주동자를 잡아라. 하루의 말미를 주겠다.」 「폐..폐하!.」 「더 이상 내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대도 무사치 못할 것이야.」 「예. 폐하. 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물러가라.」 왕이 진노했다. 마차가 떠난 후에 한동안 조용했던 궁이 소란스러워졌다. 복도 곳곳에 무장한 병사들이 황제궁 길목을 지키는 시종과 병사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에 불편해진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 안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답답해하는 그를 궁 밖으로 보내놓고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으면 또다시 발생할 사태였다. 짐작은 했었다. 분명 그 별궁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혼기가 찬 여인들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질투를 잘 피해내리라 생각했었다. 총명해 보이는 그라면. 아니 조용하게 끝냈으니 그냥 두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 뜰 안에서 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침 그 여린 몸에 들어있는 멍자국들을 보면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가슴 한구석에 열을 삼킨 듯 뜨거운 화가 밀려올라왔다. 같이 가야했는지도 몰랐다. 그 파티석상에서 또 얼마나 외따로 돌지 걱정스러웠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을 보면서 마음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드가 있으니 괜찮겠지.」위로하듯 중얼거렸다. 너무 어두워. 하늘빛이 좋지 않군. 헤론이 하늘을 바라보며 근심어린 말을 내뱉었다. 황제궁이 어수선했고 궁성 전체가 들쑤셔 놓은 듯 비명이 들끓었다. 황제를 찾아가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최초 만났을 때의 황제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내가 되었고 자신이 보필하지 않아도 이미 정점이었다. 선대의 황제가 부탁한 유일한 아들. 그 어린 싹이 이제 세르판을 세우는 기둥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에게 임종을 맞이한 황제는 본적도 없는 얼굴도 모르는 황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자신이 어린나이에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가 되어 그 믿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지만 뜬금없는 황제의 이야기는 헤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 입궁했을 때부터 황제의 보좌로서 그 믿음을 굳혔고 그 시절 젊은 혈기는 아무도 감히 대할 자가 없었다. 그때에 헤론 자신에게는 두려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선황제의 이야기도 잊어갈 무렵 한 사내가 궁에 들어왔다. 나이 먹은 자신에게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같은 동료들 속에서도 빛이 나는 그는 황제의 기사로 임명되었다는 말과 함께 세 명의 황제의 기사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모든 병사들이 두려워하는 자신들을 대함에 있어 젊은 사내는 그 어떤 것도 무서운 것이 없어보였고 거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위에 머리로 군림했다. 그리하여 헤론은 깨달았다. 선대의 황제가 지키고자 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궁 안에 머물지 않게 하고 그를 궁 밖의 먼 땅으로 내보냈는지. 또한 그가 장성한 후에 돌아오게 하였는지. 선왕은 자신의 아들이 한나라의 왕이 아닌 온 땅덩이에 서는 맹수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 바라시는 대로 되실 것 같습니다. 전하. ? 헤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시야 속에 황제의 마차가 떠나고 있었다. 검은 회오리바람을 몰 듯 마차의 바퀴가 쉴세없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머리아파.」 눈을 떠서 바라보는 곳은 회색의 막사 안이었다. 어두워서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그 막사의 기둥에 매달린 팔을 보면서 이를 박박 갈았다. 예상은 했지만 순순히 병사들에게 안내할 때에 부주의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달라지는 것은....없군 ? 불쾌한 축축함에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뒷머리가 당기는 통에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젠장. 풀리기만 해봐! 속으로 욕을 하든 발로차든 상대가 보이지 않으니 더 답답했다. 그는 어둠 속에 버려진 나를 두고 사라지고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온 것은 침상으로 쓰이는 나무와 천더미였다. 이렇게 묶어만 놓지는 않겠지. 풀리는 시점을 잘 이용해야해. 대략의 눈짐작으로 거리를 재고 그리고 그가 취할 행동을 생각하다 화가나버렸다. 화를 참기위해 악물은 입술이 터진 듯 입술사이로 뜨뜻한 핏물이 흘렀다. 차륵..... 막사의 한 부분이 열리면서 순간 막사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키리온의 얼굴이 보였다. 근처에만 온다면 그 아들을 발로 차주마! 라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하하하. 보기 좋은데? 응? 네 주먹을 맛봐서 말야. 생각보다 단단하더군. 묶어 놔서 유감이야. 타이라 세이카.」 「난 황제폐하의 라나다. 너 따위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야. 그걸 알면서 내게 이러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흐음~ 생각보다 여유로운데? 겁을 집어먹고 울 줄 알았더니.. 그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흘린 눈물로 네 눈물도 다 말라 버렸나보지?」 「훗..... 글쎄. 네 놈 따위에게는 눈물도 아까워.」 「이.....이! 발칙한 놈!」 와락...... 머리칼이 잡아채져 고개가 화악 꺾였다. 가뜩이나 아픈 뒷통수에 가해지는 충격에 낮게 신음이 흘렀다. 「훗.... 네 상황을 잘 판단해야지 안 그래? 그 마차는 소속도 없는 임대마차야. 그 마부는 이미 떠난지 오래지. 네가 여기 온 것은 아무도 몰라. 일부러 사람들이 안다니는 길로 돌아오라고 시켰거든. 후훗. 그리고 들켰다 해도 무슨 상관이야. 이 막사에 내가 왔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데. 안 그래? 어때? 무서워졌어?」 너구리같은 놈. 하지만 비통하게도 저 느물거리는 녀석의 말은 다 맞았다. 「우리 협상할까?」 「협상? 어떤 것이지?」 「좋아. 넌 얘기가 통할 것 같군.」 그가 침상에 앉으며 역겨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널 숨겨놓고 내 것으로 하면 누나는 울지 않아도 되고 난 널 가져서 좋고 넌 여기서 무사히 나가서 좋고. 어때?」 더러운 자식..!! 「훗................. 대답을 들려주지.」 타이라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났다. 18. 흠..... 바람이 잘 부는군. 아마드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고집이 센 왕자가 사라지고 짐작이 갈만한 곳은 분명 한곳밖에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말을 빨리하여 도착하였지만 초조했다. 시간이 늦지 않았기를 기도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는 병사를 잡아 문책했지만 키리온을 본이가 없었다. 난감했다. 분명 마차가 떠나는 뒤를 따라왔는데 그 막사들 사이로 사라진 그를 찾을 길이 없었다. 소란을 떨 수 없었다. 황제의 명을 어기고 소년이 마차에 오르게 한 것도 있거니와 집안만 믿고 날뛰는 녀석으로 인해 다가올 즉위식에 해를 끼칠 수도 없었다. 가급적 조용하게 일을 해결해야만했다. ‘그 아버지의 뒤를 믿고 하는 짓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겁도 없군.’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제일 중앙의 막사를 열어젖혔다.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병사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왕궁기사의 휘장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고 뒤이어 묵직한 사내의 저음에 후다다닥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라고?」 「귀가 먹었냐? 협상은 사람 대 사람으로 하는거라고말야. 넌 국어도 모르냐?」 「뭣이? 이게 이쁘다고 봐줬더니 뵈는게 없나!」 「훗... 너한테 봐달라고 한적 없어.」 무엇을 믿고 저리 기가 센지 키리온은 잠시 주저했다. 묶여있는 주제에 겁을 먹은 것 같지도 않고 도리어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망설임하나 없이 내뱉는 대답에 키리온의 혈압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주제파악을 못했군.」 키리온이 성난 오로라를 내뿜으며 다가왔다. 손이 기둥에 묶인 타이라는 자유로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고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반보만 다가오면 걷어 차줄 요량이었다. 「키킥.... 그렇군. 그 생각을 못했어.」 응? 저. 저자식이 갑자기 왜 웃는거야. 단단히 준비를 하고 저린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다가오려던 그가 멈춰 섰다. 그의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살 정도 많아 보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몸에 붙은 근육을 보건데 그가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임무이거나 혹은 머무는 병사들의 인솔 책임자인 듯했다. 「생각보다. 넌 날렵하더군. 그 건방진 말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뭐...뭐야! 그가 다시 돌아서 침상위로 갔다. 그리고 천 더미 속에서 뒤적뒤적 무엇인가를 꺼내어 들었다. 날이 시퍼런 단검이었다. 젠장.... 뭘 하려는거야! 「보여? 이것으로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줄게. 반항하면 알지? 네 하얀 피부에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아. 즐겁게 해줄게. 재미있을거야.......후후후훗..」 「집어치워. 미친자식!」 「후훗. 어차피 넌 라나잖아. 내가 친히 널 안아준다는데 영광으로 알아야지 안그래? 쿠쿠쿡..」 유연하게 칼자루를 잡아 흔들면서 웃는 그 모습에 순간 두려움이 느껴졌다. 으름장을 놓았지만 달리 대책이 서지 않았다. 묶인 손을 두어번 흔들었다. 꼼짝도 안하는 밧줄에 쓸려 손목에 아픔이 느껴졌다. 쓰라린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다가오는 놈의 비릿한 웃음이었다. 「더 다가오면 죽여버리겠어.」 「.....!!」 「가까이 오면 혀를 물겠다.」 「후훗... 누굴 위해서? 설마하니 황제를 사랑하는거야? 아니면 라나 주제에 그 주인을 고른다는거야? 네 신분을 망각하지마. 넌 황제의 노리개일뿐이야. 그 상대가 누구든 다리를 벌리는 일이지 착각하지말라구. 대대로 내려온 관습 따위에 너 자신이 뭔가라도 된 듯 황홀해할 필요는 없어. 창부주제에.」 「아니야!」 아니야...... 나쁜놈....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그따위 말을 하다니...... 온 몸에 힘이 쭈욱 빠져나갔다. 눈을 감았다. 머리칼을 비집고 들어온 손이 고개를 젖혔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서늘한 칼날이 옷깃에 스치고 부드러운 천이 찌지직 소리를 내며 찢어져나갔다. 소름끼치게 차가운 손이 살을 쓰다듬었다. 타이라의 파란 눈에 절망이 스쳤다. 불이야!!!!!!!!!!!!!!! 불이야!!!!!!!!!!!!!!! 조금의 저항도 없이 매달린 소년의 붉은 입술에 입맞추려던 키리온은 엄청난 고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찌푸리면서 욕을 내뱉었다. 하얀 상체를 드러낸체 기둥에 매달린 소년을 한번 바라보고는 막사를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중앙지점에서 굉장히 커다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젠장. 아버지가 보시면 난리나겠군. 병신 같은 졸개들 같으니라구. 막사에서는 횃불사용을 조심하랬더니 쯧..... 기강이 이렇게 흐려서야.. 」 벌어진 옷을 여미며 키리온은 불길이 치솟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더 번지기전에 병사들을 통솔하여 불길을 잡아야만 했다. 막사는 불이 옮기기 쉬운 재질이었고 키리온이야말로 겨우 얻은 직책을 불찰로 인해 파면당하기 싫었다. 분명 한동안 아버지의 냉대가 자신에게 쏠릴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욕을 내뱉었다. 다가간 순간 병사들이 불 주변에 몰려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가막히게도 치솟는 불을 끄지 도 않고 제각기 웅성거리면서 손에는 모두 커다란 물통을 들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뭐하는거냐. 불길이 더 치솟지 않게 끄지 않고!」 「키......키리온님. 사실은.....」 키리온의 호통에 병사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키리온은 당장에 짜증이 잔뜩 벤 얼굴로 둘러서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으앗! 누구냣!」 기다란 검 끝이 목에 스쳤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키리온실버리안.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에게 안내하십시오.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군요. 저들은 제 명령 없이는 막사에 지핀 불을 끄지 못합니다. 이대로 아버지께 책망을 듣기는 싫으시지요? 협상하지요.」 키리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신의 뒤에 선 사내의 목소리에는 칼날이 서있었다. 「조..좋아. 안내하겠어. 빨리 불을 꺼. 옆 막사로 옮겨 타면 다 죽을거야.」 「흠.. 글쎄요. 바람의 방향으로 보니 아랫방향의 두개만 더 탈것 같군요. 오늘은 바람방향이 마음에 듭니다. 구릉의 바람은 어디로 튈지 몰라서요. 후훗. 바람이 이대로 계속 유지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죠.」 「빠..빨리. 부..불..불길을 잡아... 그는 무..무사하다.」 「좋습니다. 협상완료입니다. 병사들이여 이제 불을 끄시오. 오늘 옷을 다 태운 병사들에게는 키리온님께서 특별히 상금을 내릴 것입니다. 모두 경께 감사드리시오.」 와아~~!!!!!!!!!!!!!!!!!!!!!!!!!! 키리온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리고 칼날에 목이 베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었다. 긴 장검의 끝을 잡고 있는 이는 분명 왕의 기사였고 그는 연회장에서 본 아마드일 것이다. 그렇다면 승산이 없다. 그를 내어줄 수밖에. 키리온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모여 있는 막사들 중 거의 끝이었다. 들어선 순간 반라의 소년을 보고 표정 없기로 유명한 아마드의 얼굴이 험상궂게 굳어졌다. 「괜찮으십니까? 타이라님!」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에 맺힌 눈물에 가슴 한구석이 아파왔다. 「무사하신가요?」 묶여진 손목을 풀어내자 투욱하고 안겨왔다. 가느다란 손목에 퍼렇게 멍이 들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허망한 눈동자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찍이 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무슨짓을 한겁니까!」 「아..아무짓도 안했다. 맹세하지.」 벌레씹은 표정으로 키리온이 대꾸했다. 잠시 그를 노려본 아마드는 그 눈에 진실을 읽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안긴 소년을 바로 세우고 황급히 말을 건냈다. 「타이라님. 폐하가 오시기전에 가야합니다.」 「폐......하?」 「네. 제가 출발할 때만해도 오지는 않으셨지만 조만간 도착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허락없이 스테론공작성을 빠져나갔다고 문책을 당하실지 모릅니다.」 희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가야했다. 맞아. 가야해. 나를 찾을거야 아마드는 타이라의 찢겨진 옷을 대충여미고 키리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용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도 이번일은 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다시 이런 일이 없을것이라 믿고 아무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타이라님도 이번일로 크게 뉘우치시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위험 속에 자신을 버려두지 마십시오.」 타이라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을 데리고 왕의기사가 사라졌다. 키리온은 손에 잡히는 물건만 바닥에 내리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에 그을은 좋지 못한 냄세가 코끗을 스쳐왔다. 「제 뒤에 타고 가셔야합니다. 빨리 달려야 하니까 되도록이면 꽉 잡으십시오.」 「미안해요. 저 때문에...」 「하하하. 좋습니다. 사과하셨으니 앞으로 이 같은 일은 안하시리라 믿습니다. 애꿎은 병사들만 땅에서 자게 생겼습니다. 갑니다 타이라님. 이럇!」 히이이이잉... 말의 커다랗게 소리를 내고 뒤이어 경쾌한 말발굽소리가 검은 대지를 밟았다. 서늘하게 밤을 가르는 바람을 맞으며 어린소년은 울었다. 등위에 기대어있는 온기를 느끼며 아마드는 손끝에 힘을 가했다. 왕이 먼저 도착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속도를 높였다. 마차를 타고 갔을 때는 한참을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아마드의 말은 책에서 본 천리마 인지도 몰랐다. 서늘한 바람을 느낄 사이도 없이 멀리서 커다란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이 보이자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큰일났다.! 비로소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세이카의 병사들을 볼 때만해도 그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이성을 잃어버렸던 난 커다란 성이 보이는 순간 내가 저지른 일을 깨달았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 눈물의 강이 생겨버린 듯 그들 생각만하면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으악! 아마드 잠시만요.」 「예?」 「옷..옷이 다 찢어졌어요. 이 모습을 보면 폐하께서 단박에 화를내실텐데.. 큰일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그건 저도 어떻게 도와드릴 방법이..」 「아.! 좋은생각이 있어요. 몰래 들어가셔서 메리안을 정원 분수대로 불러와주세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폐하가 눈치체지 못하게 불러와주세요. 아셨죠?」 아마드가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민망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뭐라고 할말이 없어져 슬며시 웃어버렸다. 「흠흠.. 조금 난감하군요. 정말 많이 찢어졌군요. 타이라님. 도움을 요청할 시녀를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아. 아니에요. 지금 곧장 가셔서 메리안을 정원 분수대로 오라고 해주시면 돼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폐하께 말씀하지 않으신다니 감사드려요.」 아마드는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크지는 않은 키였지만 중간키에 날렵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 불빛 속으로 사라지고 나자 재빨리 정원분수대로 발을 옮겼다. 커다란 분수대는 어두운 정원 한 가운데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다. 흠~ 손가락을 집어넣어봤다. 으앗! 차가워. 큰일났네.... 잘 돼야할텐데 말이지. 날카로운 황제의 눈을 얼마나 속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써 자신의 일을 눈감아준 아마드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더더욱 저질러 놓은 일이 있기에 자랑스럽게 말할 수도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분수대 옆에서 기다린지 얼마되지 않아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총총거리며 뛰어오는 모습은 메리안임을 단박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다가오자마자 폴짝 뛰어 안기는 소녀를 꽈악 끌어안아주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타이라. 어디갔다온거야? 한참 찾았어. 폐하가 계속 찾으시던데..」 귀여운 얼굴을 들어 근심을 잔뜩 표시하는 어린공주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한껏 밝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솔직히 언제 올지 모를 왕을 기다리는 속은 타들어만 갔다. 「폐하가 오셨나요?」 「응. 오신지 얼마 안 되셨어. 타이라를 찾으려고 하인들이 정신없어.」 「힉.. 큰일났다. 잠시만요. 이럇차~」 「앗.. 거긴 올라가면 안돼!」메리안이 소리쳤다. 「아.... 조금 높네? 메리안 잘 보고 있다가 폐하가 이 근처로 오시면 날 밀어줄래요?」 「엉? 타이라를 밀어줘? 분수대로? 여기 빠지면 옷이 다 젖어.」 「하하하. 괜찮아요. 대신 이거 비밀로 해줘요. 폐하께도 비밀~ 알죠?」 고개를 끄덕이는 메리안이 너무 사랑스러워 키스해주고 싶었다. 자... 그럼 준비는 됐고 심호흡~ 이거 괜히 눈 피하려다 심장마비로 죽는거 아닌가 몰라. 으힉.. 보기만 해도 차가워 보인다. 분수대 정중앙을 노려보고 그리고 분수대 옆의 장식용 돌 위를 밟고 서서 그를 기다렸다. 분명 왔다면 나를 찾을 것이고 하인들이 내가 여기 있다고 고하면 그가 올 것이 분명했다. 휴우...... 잘돼야하는데.... 「으앗.. 타이라님!」 오~ 좋았어. 「네? 와! 시종장님이시군요. 여긴 웬일이세요?」 「허..헉.. 폐하께서..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계속 찾았었는데 여기 계셨습니까?」 「아~ 파티가 답답해서요. 메리안하고 놀고 있었어요. 그치 메리안?」 「응. 타이라는 나하고 놀고 있었어요.」 「내..내려오십시오.」 시종장이 들려진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면서 나를 올려다봤다. 뭐... 여기가 좀 높긴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지. 걱정 마세요~. 「에이~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폐하께서는 뭐하시나요?」 그 길로 한달음에 발도 보이지 않게 사라지는 시종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흠.. 자 시간을 재보자 분명 삼십을 세기 전에 올 거야. 키키킥.. 하나, 둘, 셋. ........................................ 열둘? 어라 헉..! 「메리안 밀어!」 풍덩!!!!!!!!!!!!!!!!! 으아아아아아~~~~~~~~~ 추워!!!!!!!!!!!!!!!!!! 「이게 도대체 무슨일이냐! 타이라. 어서 건져내지 못할까? 뭘 다 구경하고 있는것이냐. 빨리 건져 올려라.」 진노한 그의 목소리와 웅성거리는 하인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분수대주변은 정신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황이 없는 하인들 틈에 그의 단아한 모습이 들어왔다. 「아하하.......푸하......앗... 그게 제가.......푸후......」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구나! 그래서 여기서 이런 짓을 하느라 연회장에서는 찾아볼수도 없었더냐? 이런! 물이차군.」 「하하.. 생각보다 시원해요.」 「그런 말은 떨면서 하면 효과가 반감하는 법이다. 입술이 새파랗군.」 「으아아....! 됐어요. 내려줘요. 옷 젖어요!」 물 밖에서 꺼내진 나를 번쩍 안아들은 그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뚜벅뚜벅 성안을 향해 걸었다. 난 가급적 몸을 웅크렸다. 폭삭 젖은 옷이 온 몸에 달라붙어 치적거리고 굉장히 추웠다. 차가운 분수대의 물은 밤바람에 식어서 그런지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가 안고 가는 동안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창피했지만 순탄히 지나가기 위해서는 참아야했다. 잠시 후 내려진 곳은 성안의 방안이었다. 아늑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그가 방 한 귀퉁이에 나를 내려놓자 하인들이 주르르륵 옆으로 섰다. 그리고 걸쳐진 옷가지를 벗겨 내였다. 안나가는 거야? 뭘.. 뭘 보는거야! 「저. 폐하. 의장을 다시 갖추고 나가겠습니다.」 「그래. 그 젖은 옷으로는 못나오겠지.」 「그래서 말인데..... 좀 나가주시겠어요?」 「싫다.」 이익!! 하나같이 왜 저리 말을 안 들어. 젠장~ 볼 것도 없다며! 엉? 뭐 볼게 있다고 거기 서서 홀딱 벗겨지는 나를 보냔 말이야.!!!!!! 에이~ 짜증나! 그가 중얼거리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여유롭게 방안을 걸어서 창 밖으로 가더니 밖을 내다보았다. 그나마 피해준 시선에 감사함을 느끼며 난 하인에게 속삭였다. 「가급적 소매가 긴 옷으로 가져다주시겠어요?」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난 기쁜 마음으로 따뜻한 물속에 들어갔다. 그가 다시 돌아보지 않기를 바라며 거품 속으로 손을 푸욱 담갔다. 처음으로 시중받는 목욕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고 그의 앞에 섰을 때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손이 턱을 살짝 어루만질 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부드럽게 부딪히고 떨어지는 입술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흠.. 이제야 입술색이 돌아오는구나.」 고개가 탁 떨구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굉장히 피곤해져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머리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쉬고 싶어. 피곤해. 그의 손이 내 얼굴을 잡아 올렸다. 「그.....그만해요. 이제.. 입술은 파랗지....」「눈이 왜 이 모양인거냐.」 헉!........ 눈? 「하하.....먼지가 들어가서..아까 전에.. 저.. 그만 가볼게요. 메리안이 기다릴거예요.」 그를 뒤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었다. 「거기서라. 타이라세이카.」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19. 「거기서라. 타이라세이카.」 내 몸을 돌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등 뒤에 서 있는 그를 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웃음을 띄우려고 했지만 굳어진 안면근육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부르셨어요?」 대답과 동시에 돌아보았다. 그의 곧은 시선은 내 얼굴에서 한참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에 대답은 이미 했어도 그에게 다가기기 힘들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흡..하고 심호흡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정을 찾기란 이미 틀렸고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가 떨구어졌다. 다가온 그가 손을 들어 머리를 훑어 내렸다. 물기가 어린 축축한 머리칼은 그의 손가락에 걸렸고 그가 머리위에서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었지? 분수대에서 너무 정신이 없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무슨 일이지?」 「아....하하. 아무 일도 없었어요.」 「왜 거짓말을 하는게냐. 내 머리가 분명 풀려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해준 그 장식은 어떻게 된 것이냐. 그 붉어진 눈하고도 관계가 있는 건가?」 쿵...... 심장이 땅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 머리 생각을 못했다. 찢어진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그의 눈을 속이려고 했던 나는 온몸을 돌던 피가 식는 느낌에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방안에 있던 하인들이 그가 오른손을 들어 손짓하자 모두 사라졌다. 하인들이 나가고 문이 조용하게 닫히자 그가 반보 물러섰다.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은 이미 파열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변명을 둘러댈까 머리를 쉴세없이 굴려도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긴 손가락이 목 부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목울대를 울리고 나오는 긴장감속에 낮은 한숨은 그에게도 들렸는지 그는 턱을 받치고 조심스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대의 이런 눈은 보고 싶지 않다. 이런 연회는 싫은거냐? 타이라.」 「그건....아니에요. 저는 단지.....」 이제 어둠이 짙게 깔린 성은 아름다운 불빛에 감겨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가 서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을 그를 바라보며 조가비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눈에 언뜻 서운함이 비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갈아입은 옷은 특히나 소매가 풍성하고 긴 스타일이었다. 하인에게 특별히 부탁한 옷은 잔주름이 많은 스타일로 앞섶이 약간 벌어진 그런 옷이었다. 풍성한 천의 길이에 만족한 것도 잠시 그의 손이 앞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기겁하여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무슨짓이예요. 으앗.. 뭐..뭐예요!」 「쿡... 말하지 않으니 직접 알아볼 수밖에.」 「손..손 치워요. 누가 들어오면........어...어쩌란 말야.」 말은 중간중간 끊어졌다. 손이 살 안으로 파고들어 옷을 젖혀버리자 어깨가 드러났다. 걸쳐진 옷이 제거되어 싸늘한 느낌을 안겨주었고 눈동자는 공포심에 젖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타이라는 자신이 커다란 탁자위에 올려진 것을 알았다. 그 문양도 독특한 탁자는 아마도 여성들이 잠시 쉬면서 이용한 것으로 보인 듯 작은 소지품등이 널려있었다. 한곳에 앉혀진 타이라는 벗겨진 상의를 팔에 걸치고 망연자실 자신의 눈높이와 같은 왕을 노려보았다. 겁이 났다. 무척이나. 그 말없는 눈빛과 그에 상응하는 고집스러운 입매도 그보다도 더 자신을 괴롭게 하는 무언의 침묵으로 굳건하게 서있는 그가 두려웠다. 훗. 하고 낮은 웃음이 들린 것 같았다. 용기 내어 그를 마주보기란 몹시 힘들었다. 「아........!」 깜짝 놀란 타이라는 자신의 입을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틀어막았다. 소름끼치도록 부드러운 손끝이 유두를 간질였다. 처음으로 부끄러움에 작은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자...잠시 만요.」 그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타이라의 가슴을 훑어 내리던 손끝은 자유를 갈망하는 소년을 무시한체 손을 아래로 점점 쓸어내렸다. 그때마다 타이라의 어깨가 살짝살짝 흔들렸다. 손끝이 점점 아래로 향할 때 소년은 마주본 왕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슨 할말이 있지?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안하려고 했지 않나?」 「하............아.... 하지만.......으......음.... 그..만..두......세.....아앗..」 말을 이으려던 타이라가 낮게 비명을 울렸다. 왕의 손은 이미 입혀진 상의를 벗기고 있었다. 이제는 말보다도 다급함에 머릿속에서는 경보음과도 같은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흥분을 벗어난 이제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심장의 박동수에 타이라는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밀어내는 타이라의 손을 잡으며 왕이 낮게 읖조렸다. 「말을 안 듣는 손이군.」 「뭐하는 거예요!!!」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왕은 싱긋하고 상큼한 미소를 날렸다. ‘ 그대가 가진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라며 웃음 섞인 농담을 내뱉자 타이라는 그 탁자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한발 앞서 그의 손이 타이라의 가느다란 팔을 꺾어 뒤로 잡아챘다. 「말을 안 듣는 손은 혼내줘야지....후훗.」 히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앉혀진 체로 손은 뒤로 묶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입은 옷은 훌륭한 밧줄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묶여진 손은 옷에 칭칭 감겨 이제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하~! 손목의 상처를 안보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라는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낮게 한숨이 세어 나왔다. 그의 눈썹이 움찔하고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짓궂은 미소가 그 입가에 스쳤다. 「흠.... 이정도 했어도 그 못된 입은 말을 하지 않는군.」 「..........!!」 말할게요.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입을 막았다. 부드럽게 감기는 혀는 타이라의 입을 마비시키기 충분했다. 한순간 부웅..... 떠있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죽을만큼 고통스럽게 그리고 정신을 마비시킬 정도로 급습하는 입술에 미칠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자 타이라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허억.....허억........숨..숨막혀요. 왜이러는거예요.」 「이런! 그렇게나 많이 알려줬는데도 숨쉬는 법을 모르다니. 쯧.」 그가 매우 아쉽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타이라는 기가막혀 죽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 이~~~~!!! 나쁜.. 완전히 놀리고 있잖아. 흐흑.. 이걸 어쩌면 좋담. 오랜 입맞춤에 부어버린 입술을 잘근 깨물어 버리고 타이라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오히려 이 상황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자신이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더욱 커다란 즐거움으로 다가온 듯 하여 타이라는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그가 입을 맞추려 할 때에 타이라는 힘껏 그를 발로 차버렸다. 힘껏이라고 힘을 주었지만 뒤로 묶인 팔로 겨우 중심을 버티는 중이었고 오랜 입맞춤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 타이라의 목표조준 실패는 그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이런......! 못된 다리.」 으아아아아아아~~~~~~~~~~~~!! 라고 비명을 질렀다.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문 쪽을 쳐다보더니 너무도 그윽하게 말하는 소리에 타이라는 분기탱천하여 저세상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대와 내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이곳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면 그것도 좋겠군. 저 밖에서는 벌써 수군거리기 시작했어. 후훗.....」 허헉....뭐라고? 두 번째 다리를 뻗었을 때 한순간 자신의 다리를 잡은 그의 굳센 팔과 자신의 다리를 번갈아보며 타이라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잠깐.. 다..다 말할게요. 아앗...... 이..이러지 말아요.」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는군.」 「안돼. 아무..누구 없어요? 사람살려!!」 「푸훗. 그대가 이러면 다들 오해할지도 몰라. 난 그대를 죽이지 않아.」 「자..잠깐요. 폐하. 이성을 가지고 잘 이야기하면 원하시는.......으악!! 그...오..옷은 왜 잡아 당겨요! 으아아~~~~~!」 「짐은 지극히 정상이다. 그 오만불손한 말은 마음에 안 들어. 쯧쯧.」 「오......! 신이시여.」 벗겨진 바지를 보며 타이라는 반라의 모습으로 신을 찾았다. 울상이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소년이 숨기고 있는 비밀은 아마드를 추궁하면 다 들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 호위를 붙인 이유였고 무사한 모습의 그를 보았으니 별일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돌아서서 나가는 그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보였다. 머리가 풀어져있었다. 자신이 내려준 금장의 아름다운 머리장신구도 사라졌고 물에 폭삭 젖은 소년의 입술은 퍼렇게 질려있었다. 무엇을 숨기는 거지? 화가 났다. 돌아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툭치면 눈물을 흘릴 듯 그렁거렸지만 울지 않는 모습에 아레스의 마음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일순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그의 행동에서 그리고 가장 의지하고 싶은 자이고 싶었다. 벗겨진 옷을 울상을 짓고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손을 뻗어 소년의 부드러운 엉덩이 사이로 손을 가져간 아레스는 급기야 울먹이는 소년을 안아 들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었구나. 다행이다.」 온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째려보는 소년의 얼굴이 눈안가득 들어왔다. 푸하하하... 웃는 자신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젠장! 젠장! 젠장! 「으아아아아~~~~~! 망할녀석. 망할녀석. 지옥에나 떨어져라!」 걸음 한보 디딜 때마다 욕을 내뱉으며 타이라는 재빨리 방안에서 뛰쳐나갔다. 그는 너무도 시원스럽게 ‘즐거운 시간 이었다’를 내뱉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주먹에 잡히는 대로 그를 향해 던졌지만 닫혀진 문에 맞고는 모두 땅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아~~~~ 소리치는 타이라의 모습을 보며 하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타이라는 그가 기다리는 파티장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화가 났지만 피곤함에 궁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했다. 타이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타이라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고 파티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였다. 이례적인 황제의 라나의 참석도 사교계에서는 충분히 이슈였지만 자신의 라나를 대동하고 다니는 젊은 남자가 황제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야기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특히나 젊은 황제가 내뿜는 화려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아름다운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게 하기 충분했으며 그 옆에 선 소년의 모습 또한 여러 가지 의미로 파티장 안에 흥을 돋구었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그 파티의 주인공들은 파티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듯했다. 주변에 몰려든 귀족들도 인사를 건내려다가 서늘하게 보이는 황제의 눈을 바라보고는 발을 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옆에 새초롬이 서있는 소년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며 흡사 새끼를 보호는 어미 짐승처럼 그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초 말을 걸어보려고 몇 번을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은 이윽고 먼 곳에서 바라보고 저들끼리 수다만 떨기 시작했다. 아마드는 그 모습에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황제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먼저가면 그가 불편해 할지도 모르니 차후에 떠나겠다고 하였다. 그동안 잘 보필하라고 말하던 왕은 자신이 도착하자마자 그를 감싸도 돌기 시작하여 그 주변에 젊은 남자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아마드는 피식 하고 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귀부인들의 시선에 흠칫 놀라 파티장을 떠나버렸다. 황제대신 그들의 표적이 되긴 싫었다. 파티장 밖을 나오려던 자신이 본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황제의 라나를 넘보고 그 집안의 권세만 믿고 날뛰는 그가 성큼성큼 연회장을 들어서는 모습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 잘 마무리 했나보군.. ’ 들어서는 그의 성난 모습을 느끼며 아마드는 좋지 못한 예감에 파티장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그의 왕에게 약간의 조언은 해줄 필요를 느끼던 차였다. 키리온실버리안의 아버지는 세르판의 귀족 중에서 가장 충성심이 강한 사내였다. 혈족인 스테론공작보다도 작위는 낮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황제를 받드는 무리 중에서 가장 권력이 강했고 그 됨됨이도 아들과는 다르게 매우 청렴하였기에 스테론공작이하 황제를 따르는 무리들은 키리온실버리안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만족하는 터였다. 아마 황제는 그들에게 우호적일 것이 틀림없을 것이고 그 우호적인 상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선황제의 명을 받들어 그 집안의 여식을 왕비로 삼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드는 씁쓸해졌다. 자신이 나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어졌다. 마차에서 내린 키리온은 씩씩거리며 홀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황제의 기사와 그 발칙한 라나녀석을 아작을 내주마라고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선 순간 라나의 옆에는 황제가 보였다. 그 즉위식도 하지 않은 황제의 모습을 파티석상에 만인에게 공개하는 모습은 키리온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후훗. 그렇단 말이지? 저 녀석은.. 황제의.. 후후훗. 키리온은 파티장 한쪽에 서있는 황제에게로 곧바로 걸어갔다. 새로운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걸어오는 움직임은 귀족들의 시선을 앗아갔고 곧이어 그 시선을 따라 황제가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약간의 미소를 동반하면서 자신을 바라보자 키리온은 사람 좋은 웃음을 날리며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인사드립니다. 황제폐하.」 「흠... 그대를 여기서 보는군. 건강해보이는군.」 「하하. 네. 건강합니다. 조만간 있을 즉위식도 있고 하여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말해보거라.」 여유있게 바라보는 사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름끼칠 정도로 싫은 감정에 타이라는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옆에 서있는 왕과도 친한 듯 보였다.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며 그와 대화를 나누는 왕을 보면서 타이라는 당장이라도 들고 있던 술잔의 술을 그에게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설마.. 타이라는 키리온을 향해 불만의 눈빛을 비추었지만 키리온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한번 타이라를 바라보고 그리고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면서 그는 말했다. 「저의 누님께서 황궁에 입궁하실 예정입니다. 황궁은 처음이시니 잘 부탁드리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께서 당분간 누이와 같이 황궁에 머물기를 명하셨습니다. 황제폐하께는 즉위식때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곳까지 오셨다니 다행입니다. 조금 빨리 즉위식 전으로 입궁하여도 좋을런지요?」 황제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언제든 그의 누이는 황궁에서 여성중 가장 높은 직위가 될 것은 틀림없었다. 특히나 만인이 보는 가운데에 허락하는 일이라면 더욱 소문을 낼 필요도 없이 사람들 속에 가장 우두머리로 존재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키리온은 그에게 보이고 싶었다. 한낱 라나 주제에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는 녀석을 혼내주고 싶었다. 왕에게는 정해진 배필이 있고 그것은 그가 아닌 자신의 누이이며 그녀 휴리아가 궁에 들어가게 될 경우 라나의 존재는 라나궁에 일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황제 옆에서 사색이 되어 앉아있는 소년에게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둘 사이의 대화를 듣는 것은 타이라뿐만이 아니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서있는 귀족들은 흥미진진함에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보는 이는 메리안 하나였다. 메리안은 어머니의 각별하고 따뜻한 눈총에 힘입어 타이라에게도 말 한마디 건내지 못하고 바라만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대의 누이라면 자주 본적이 없지만 선황제께서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 후사를 이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그 시기는 아니라고 본다. 키리온. 황궁에 잠시 머무른다면 허락은 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약속과는 별도의 것이다. 그녀가 황궁에 머무르기 원한다면 그러도록 하여라.」 왕의 말에 키리온이 놀랐다. 엄청난 중재였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허락한다는 것도 아닌 그는 오묘한 대답을 내뱉었다. 키리온은 항의할 수 없었고 토를 달수도 없었다. 그 대답에 놀란 것은 키리온 뿐만이 아니었다. 스테론공작이 끼어들었다. 「폐하. 그러시면 즉위식 이후에는 반려로 삼으실 예정이십니까?」 「훗.... 아직 즉위식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스테론공작. 아직 내 옆자리가 허전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군. 그 때가 된다면 내가 직접 그대들에게 말해주겠다.」 「하지만... 폐하.」 스테론공작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별로 파티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군.」 그로서 일단락 지어진 이야기에 연회장에 모인 귀부인들과 처녀들은 웅성거렸다. 자신의 딸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로 들린 것이다. 마땅히 키리온의 누이인 휴리아가 선택될 이유는 없다는 말로 들렸다. 갑자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졌고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빳빳이 굳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타이라는 왕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그 끈적한 시선들을 뒤로하고 걸어 나가 성밖의 맑은 공기를 폐에 들이마실 때 비로소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혼하지 않으시나요?」 가슴속에서 맺혔던 궁금증을 토로하듯 타이라가 물었다. 성안의 소리가 갑자기 멀어지고 따뜻하다고 느낀 왕의 손이 갑자기 차디찬 냉혈인의 손 같다고 느껴졌다. 질문을 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이제껏 없던 통증에 아려왔다. 「결혼하길 바라는가?」 「후사가 있으셔야겠죠.」 타이라가 물었다. 「그대가 여인이었다면 좋았을뻔했다.」 왕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대답을 뒤로하고 왕은 주변을 지키던 시종들에게 명령하듯 떠날 차비를 시켰다. 왕의 화려한 마차가 준비되고 몸을 실고 떠날 때까지 왕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적만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을 뿐이었다. 20. 이제 날씨는 여름에 가까웠다. 초록의 대지는 더없이 푸르르고 대지를 밟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매우 간편해졌다. 그 넓은 초원을 지나 도성에 도착한 휴리아는 피곤함보다 기대감에 가득차있었다. 아버지의 엄한 교육덕택에 그녀는 매우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지만 갑갑한 성내 생활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매일 수다 속에 이어지는 귀부인들과의 대화와 우아한 노래나 시를 읊어대는 일련의 사교행위는 그녀의 지루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성의 아름다운 모습은 휴리아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공간은 그저 그림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같이 와주겠다던 남동생은 전쟁이 터진 후에 얼굴도 보기 힘들었고 넓고 황량한 공간에 남겨진 휴리아는 차츰차츰 이 모든 상황에 질려가고 있었다. 즉위식을 기다리는 귀족들은 많았다. 하지만 즉위식 전의 파티에서 흥건히 여가를 즐긴 사람들은 이제 조금 엄숙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자신이 참석치 못한 공작성의 파티 이후에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 친했던 몇몇에게 물었지만 슬쩍 눈을 피할 뿐 도통 알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단정하게 꾸며주는 시녀의 손길을 받으며 아직 태양의 기운이 모자란 땅을 바라보았다. 나무들 사이로 작은 풀벌레들이 날개 짓을 하고 들이마신 공기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로 상쾌한 날씨였다. 저 멀리 눈에 띠는 사람이 보였다. 보통 궁에서 뛰지 않는 법인데 매우 빠른 속도로 달음질쳐 사라지는 모습은 충분히 흥미가 도는 것이었다. 머리를 만져주는 시녀에게 그가 달아난 방향으로 손짓을 하며 물었다. 「저쪽은 어디지? 누군가가 마구 뛰어가던데..」 「아! 뛰어다니는 분이시라면 아마 타이라님이실거예요.」 「그..... 라나?」 「네.」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한번에 알 수 있는 그 이름을 대뇌이며 휴리아 실버리안은 걸음을 옮겼다. 시녀 한명이 뒤를 따랐지만 곧이어 휴리아의 조용한 음색을 듣고는 돌아가 버렸다. 이런 탐사에 꼬리는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뛰는 것만 보았지 걷기에는 조금 먼 것도 같았다. 조심히 길을 따라 걸었다. 궁과 궁은 풀밭으로 푸른 풀이 부드럽게 깔려 있었지만 밟고 가는 길은 납작한 바위를 세공하여 반들반들 윤이 날정도로 매끄럽게 깎아 놓은 것이었다. 코끝을 스치는 향은 매우 싱그러웠다. 자신이 보았던 사람을 찾아 걸어왔건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색다른 풍경이었다. 두 명의 사람이 있었고 그중 하나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듯 길 중간에 서있었다. 자신이 다가감을 제일먼저 알아 첸 것은 검은 머리의 황제였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곧은 눈빛에 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그를 바라보자 그 옆에 서있던 소년이 황제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그의 아름다운 용모가 눈에 띄었고 낮은 감탄사가 입에 흘렀다. 그리고 소년은 약간 고개를 숙여 이야기를 듣는 황제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웃었다.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보다도 그 뒤에 흘린 웃음에 휴리아는 주저앉을 뻔하였다. 소년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그리했을지도 몰랐다. 황제는 곧바로 풀밭 사이로 곧게 나아있는 길로 사라졌다. 미처 예를 다해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자신이 처음 입성한 날 보였던 그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를 보며 휴리아는 말없이 서있었다. 한순간 멍해진 것도 같았다. 「안녕하세요? 조금 쌀쌀하죠?」 아마도 자신이 걸쳐 입은 옷이 얇다고 생각한 소년이 걱정하는 듯 했다. 「아.....」 「이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으세요. 혹시 어디 편찮으신가요. 그렇다면 헤론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그럼 저쪽으로 가요. 안 그래도 폐하께 부탁을 하려던 차였는데 바쁘다고 그러잖아요. 같이 말을 보러가요.」 「네? 말을?」 「네. 여긴 초원이잖아요. 겨우 허락을 받았거든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죠.」 눈이 웃고 있었다. 기쁨으로 가득 찬 그 눈동자가 일렁였다. 휴리아는 그 손에 이끌려 한참을 걸었다.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흘끗거리는 시선이 보였다. 불편해진 휴리아가 손을 밀어내자 소년이 얼굴을 붉혔다. 「아......죄송해요. 가끔 이러고 다니니까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 손을 잡곤 그래요. 죄송해요. 무례를 범해서.」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흥미 있어 하는군요.」 「하하. 괜찮아요. 저들은 원래 저래요. 뭐. 이것도 계속 겪다보면 우쭐해진다니까요. 그것보다..」 소년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더니 조용하게 속삭였다. 「뒤에서 왼쪽 보여요? 그 사람이 더 무서워요. 미행자예요. 앗. 눈이 마주치면 안돼요. 뛰어요!!」 정신없이 달렸다. 채신머리없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버지가 보았다면 충분히 꾸짖을 행동이 분명했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뛴 후에 그 가쁜 숨을 내쉬자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기분좋죠? 여긴 말이에요 뛰어도 뛰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어요. 하하.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아~ 도착했다. 여기가 맞구나. 매번 이 앞까지만 가면 병사들이 못 들어가게 했거든요. 자 어디보자. 음... 여기가 입구네. 들어가요. 어차피 한 마리 주신다고 했으니까 병사들도 이제 절 막지 못해요. 하하하. 내가 이걸 위해서 얼마나 아부를 했는지... 으구. 그 성질에 맞추느라 몇 번을.........앗. 혹시 아침 드셨어요?」 「아뇨.」 휴리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져서 자신을 보며 방긋방긋 웃는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이유도 그리고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도. 「사실.. 모란궁 뒤에 갔다가 당신이 우는 것을 봤어요. 죄송해요. 몰래보려던 것은 아닌데.. 굉장히 슬퍼보여서 처음 제가 여기 왔을 때가 생각났어요.」 어떻게..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그 어두운 구석에서 운 사실을 시녀도 모르는 그 사실을 이 소년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랐지만 소년의 눈동자는 매우 슬퍼보였다. 「즉위식을 보러 오신건가요?」 「아뇨. 난.」황제폐하의 비가 되려고 왔어요. 라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소년은 황제의 라나였다. 입 밖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가 없었다. 「하긴 말하셔도 몰라요. 요즘에는 지나치기만 해도 다 신분이 높은 귀족 분들이라 이른 아침이 아니면 밖에 잘 나오지 않아요. 그들과 마주쳐서 소문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아.. 여기다!!」 소년이 가리키는 방향에 외따로 놓인 건물 한 체는 자신의 성에서도 본 커다란 마굿간이었다. 그 규모가 커서 조금 놀라긴 하였지만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입구에 서서 소년은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한달음에 자신을 뒤로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려야할까? 아니면 가야할까를 고민하다가 조금 늦어지는 소년을 생각하고는 뒤돌아 걸었다. 두어 발자국 걸었을 때 소년이 뛰어나왔다. 온 몸에 건초더미를 묻히고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할 때 그 소년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아름다웠다. 「같이 들어가고 싶지만 저처럼 옷을 버릴까 봐요. 우와~ 정말 많더군요. 하하. 저기서 어떤 녀석을 골라야할지 고민돼요. 혹시 내일 오전에 시간되시나요? 한 마리 골라서 타보라고 하셨으니까 이왕이면 좋은 녀석을 골라줄 사람이 필요한데... 음. 폐하는 바쁘고 시종들도 즉위식이 얼마 남지 않아 정신이 없어서요. 앗~ 식사도 안하신분을 너무 오래 끌고 다녔네요. 어디에 계신가요? 모셔다드릴게요. 성이 하도 넓어서 헤맬지도 몰라요.」 그는 밝은 성격에 친절해보였다. 휴리아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가 안에서 어떻게 하고 나왔을지 짐작이 갔다. 내일 아침에 바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있다면 심심치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요. 내일 골라줄게요. 제 안목이 높을지 모르겠지만.. 아침전인데 같이 들래요? 식당이 어색해서요. 같이 가요.」 「에....... 전 돌아가야 하는데. 음.... 뭐 하루쯤 같이 안 먹는다고 혼내지는 않겠죠. 가요.」 소년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이봐요~~~!!!!!!!!! 아침식사 잘해요~ 폐하께 전 오늘 이 여성분과 식사한다고 전해주세요~~~~~!!!!!!!!!!!!!!」 커다란 소리로 소리치던 소년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어색해 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에~ 말했잖아요. 뒤를 밟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분명 아침식사도 못했을 거예요.」 「네...에. 그래요.」 어색해진 휴리아가 반보 앞서 걷고 뒤이어 타이라가 따라왔다. 식당은 한가했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각 소년과 마주앉았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며 두어 번 둘러보더니 이내 시종들이 곱게 차려놓은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음... 여긴 오랜만에 와 봐요. 예전에 길하고 같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꽤 조용하네요.」 「그래요? 그럼 식사는 주로 어디서하나요?」 「저쪽에서요.」소년이 먼 곳을 가리켰다. 「뭐.. 전 가급적 사람이 없는 곳이 좋아서 불만은 없지만 때론 밥 먹다 체할 것 같다니까요.」 「왜요?」휴리아는 스프를 뜨던 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소년은 마지막 빵을 입안에 털어 넣고 맞은편에 앉은 자신을 바라보며 작은 양손을 눈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검지 손으로 두 눈을 쭈욱~ 찢으며 말했다. 「이런 눈을 하고 쳐다보면 밥이 먹히겠어요?」 「푸훗.. 누가요?」 「폐하가 그렇죠 누구겠어요. 그 가끔 웃어주는 걸 빼면 매번 이런 눈이에요. 아~ 조금만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도 사람들이 일하기 편할텐데.. 쯧.」 「부......부럽군요.」 「네?」 자신의 웅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소년이 그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목에 걸린 음식이 숨을 죄듯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식사 뒤의 갈색의 은은한 향기의 차가 나오자 소년이 말했다. 「드세요. 이걸 마시면 몸이 따뜻해진데요.... 전 아직 잘 모르겠지만.」 더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시종 둘이 다가와 소년에게 말을 아뢰었고 소년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식당 밖을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그 아름다운 얼굴로 웃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달아난 탈주병을 찾기 위해 입궁도 미루고 막사에 머물던 키리온은 화가 끝까지 나서 간수의 목을 베어내 버렸다. 그들이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감옥자체에 아무런 균열도 없이 사라진 그들이 마법을 쓰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 문초한끝에 간수는 일주일전 열쇄를 잊어버렸다고 실토했다. 하!!!!! 이렇게 기가막힐때가.. 그 요망한 것이 한 짓이 분명했다. 키리온은 일단 타버린 막사를 복구하고 병사들을 정비한 후 본궁으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 울분이 가시지 않아 쥐어짜듯 잡힌 말고삐를 후려치면서 말을 재촉했다. 큰소리 낼 입장도 못된다는 것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그들을 어떻게 처리했다고 말해야 할지 그 도성근처에 가까이 올 때까지도 쉼 없이 생각한 끝에 여러 가지 핑계거리를 생각해내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시급한 문제는 이것이 아니었다. 일단 휴리아를 만나본 후에 그 이후 사항을 결정해야만 했다. 그 파티에서 보건데 왕의 마음은 이미 그 조그만 녀석의 손안에 들어간 것 같았다. 바보같으니라고..... 짜증이 밀려왔다. 성에 들어선 키리온은 제일먼저 보고를 위해 대신들을 만났다. 왕은 이미 늦은 시각이라 알현을 다음으로 미룬 상태였다. 전쟁중이었다지만 대신들의 모습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러나 시급하게 돌아가는 사정을 그들이 알았다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폐하께서는 왜 계속 이 전시상태를 유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즉위식이 끝나면 빨리 전쟁을 종결 짖고 대세를 정비해야합니다. 이제 후계자를 보셔야할 때입니다. 이런 끊이지 않는 전쟁소식은 나라 안팎을 피폐하게 만들뿐입니다.」 키리온은 탁자에 앉은 대신들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평화로운 분위기로 정무를 논하던 몇몇 대신들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젊은 사내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고로 이번 즉위식 이후에 여러분들께서 폐하와 휴리아 실버리안의 결혼을 추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선왕께서 약조하셨고 휴리아 실버리안이 궁내에 머물고 있는 이 순간이 가장 적기라고 봅니다.」 키리온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대신들의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고 매우 흡족한 듯 대답했다. 「황비는 물론이고 그 혈족인 경께서도 흠잡을 곳 없이 매우 훌륭하신 분이라 마음이 놓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소.」 키리온은 환하게 웃으며 그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키리온이 자신의 누이를 본 시각은 야심한 한밤중 이었다. 물론 가족간에도 예의를 지켜야 옳았지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겠다는 욕망으로 누이가 머무는 방문을 열어젖힐 수밖에 없었다. 「키리온?」 「훗.. 잘 지낸거야? 가급적 같이 오고 싶었는데 망할...」 「키리온. 그런 말투는 좋지 않아.」 「아! 폐하는 만나 본거야?」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는 휴리아의 눈동자가 매우 슬퍼보였다. 키리온은 의자에 앉으며 탁자에 놓여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런 곳에서 대 귀족의 따님이 눈물이나 흘리면 안돼. 다들 이제 누님을 우러러 볼거야.」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며 키리온이 걱정스럽게 말하였다. 자신의 약한 점을 들라면 딱 한 가지 휴리아였다. 「난.... 키리온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키리온이 놀라 휴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는 절대 나를 돌아보지 않을거야. 키리온. 난 이곳이 무서워. 폐하가 무서워.」 「뭐야! 누가 뭐라고 해?」 「아니야. 키리온. 이건 여자의 직감이야.」 키리온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는 것을 휴리아는 눈물 맺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생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손을 바르르 떨 정도로 화를 내는 동생을 처음 본 휴리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키리온이 말했다. 「훗.. 걱정 마 휴리아. 황제의 라나는 제 발로 궁을 기어 나갈거야. 틀림없이!」 쾅~~~!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혔다. 어찌저찌 잡아보지도 못하고 그를 떠나보낸 휴리아가 침대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아니.. 이럴 수가.」 새벽일찍 깨는 습관은 잠자리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비 내리는 소리에 타이라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에... 비가 오면 분명히 안 된다고 할텐데.. 큰일 났네. 어제는 화창하더니 웬일이야.」 중얼거리며 창 밖을 내다본 타이라는 앞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소나기에 할말을 잃어버렸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내리는 비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나무의 잎사귀들이 비에 젖어 추욱 처져있었고 타이라는 기운이 빠져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러면 약속해준 그 분께도 실례가 될텐데.. 큰일 났다. 뒹굴.. 뒹굴..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이른 새벽은 매우 어두웠다. 동틀 시간이 훨씬 지나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마땅한 할일이란 없었다. 아우~ 그냥 궁 안에나 돌아다녀야할지 몰라.. 타이라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을 신었다. 「아악~~!」 발을 찌르는 통증. 그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부드러운 살 사이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은 이내 줄줄 흐르는 붉은 피로 변했다. 신을 살짝 벗겨보았다. 발바닥 안으로 박힌 작은 유리조각 그것은 하얀 사기조각 같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매우 날카로웠다. 피와 섞인 그 작은 조각들을 빼어낼 수가 없었다. 시종을 불렀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다가온 시종은 흥건한 피에 젖은 발에 놀란 듯 외쳤다. 「타..타이라님. 괜찮으신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아....! 아무 말도 하지마시고 헤론을 불러와주세요. 가급적 조용하게.」 「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론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타이라를 바라보고 사태파악을 한 그는 곧바로 발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되신 일입니까?」 「아핫.. 제가 좀 덜렁대서요. 탁자에 놓인 병을 깼어요. 그런데 밟았지 뭐예요.」 「흠..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날카롭군요.」 「에? 아니에요. 손으로 빼보려고 했는데.. 만지면 더 안쪽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요.」 「잘하셨습니다. 일단 예리한 칼로 살짝 잡아 빼야할 것 같군요. 음.. 아플지 모르겠습니다.」 「으악.. 겁주지 마세요. 헤론.」 「예.」 헤론은 조심스럽게 살펴본 뒤에 꾹 참고 있는 대견한 소년을 바라보고 나직이 한숨을 쉰 뒤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상처 난 발에 천을 감을 무렵 소년이 말했다. 「즉위식 전에 큰 소란은 피하고 싶어요. 이제 3일 남았죠?」 「네. 걸을 때 무리하지 마십시오. 폐하께는 제가 타이라님의 공부를 위해 머문다고 하겠습다.」 「고마워요. 헤론.」 「그것보다 간단한 의식절차를 배우셔야 하는데 이 발로 가능하시겠습니까?」 「아..... 의식절차요?」 「폐하의 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타이라님이 하셔야 됩니다.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거라면.... 그가」기다려준다고 했어요. 라고 말하려다가 타이라는 입을 다물었다. 「아프시면 이것을 드십시오. 곪으면 큰 상처가 됩니다.」 헤론은 탁자에 약을 놓고 가만히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정적이 흘렀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헤론은 앉아 있는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에 놀란 헤론이 근심을 담아 물었다. 「몸이 아파서 우는게 아니에요. 헤론. 그거 아세요? 머리로는 안 된다고 가까이 할 수 없다고 계속 경고를 보내는데 막상 그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가 웃어주는 모습에 덩달아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게 되요. 어쩔때는..... 난 내가 이곳에 볼모이고 조국의 병사들이 죽어간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려요. 난 분명 화가 날 정도로 슬프고 가슴이 아픈데 말이죠.」 「여기.」 타이라는 심장부근을 가리켰다. 「이곳이 내 말을 듣지 않아요. 헤론. 다른 사람의 불행을 알면서도 나 하나의 이기심으로 살고 있는 내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아요. 이런 아픔 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난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몰라요.」 무엇인가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소년의 흐느낌이 방안에 소리 없이 울려 퍼졌다. 21. 마음을 어둡게 하듯 쏟아지던 비는 화창하게 개어 깨끗한 하늘을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맑게 갠 하늘아래 나뭇잎에 방울져 달려있는 물방울들은 빛을 반사하여 초록의 싱그러움을 더했고 그 푸른 잎을 더 푸르게 만들었다. 아침 시간이 다가오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시종을 시켜 전갈을 보냈지만 자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죄송하고도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들어서는 시종에게 말을 전했다. 「배탈이 나서 오늘 아침은 못 먹겠다고 전해주세요.」 타이라는 침대보를 말고 이불속으로 푸욱 들어갔다. 아픈 발보다도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누구일까.. 고의가 다분한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왜 그런걸까? 혹시 즉위식 후에 황제를 모시는 사람을 견제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을 다해보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이불을 둘둘 말고 눈을 감았다. 침대 한 부분이 푸욱 꺼지는 느낌에 눈이 팍 떠졌다. 입술을 덮는 숨결.. 그였다. 「폐..폐하.」 「일어나지 마라. 모양새를 보니 많이 아픈가 보구나. 어쩌다 배탈이 난거지?」 「..........」 「쯧.... 전의는 왔다 갔느냐?」 이른 아침의 그는 매우 활기에 넘쳐 있었고 매우 바빠 보였다. 살아있는 생동감이 물씬 풍기는 황제의 눈은 살아있었다. 「헤론이 왔다갔어요. 조금만 쉬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어요.」 「헤론이?」 「네. 그것보다 의식의 절차를 배워야 한다는데 그게 뭔지 알려주세요.」 「그건 황제는 대지의 왕으로 그의 아내는 하늘에서 내려준 신이라 생각하고 신과 인간의 왕의 결합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신과 인간의 결합?」 「그건 남녀를 떠난 신성한 의식이다. 그대의 나라가 여신을 믿는다면 우린 하늘의 신 그 자체를 믿지 그 하늘의 신이 인정한다는 의미로 황제는 신의 딸과 맺어지는 것을 원형으로 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요?」 그는 빙그레 웃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동침하지.」 으아아아악~~~~!!!!! 동침? 어..어떻게! 「놀라지 마라. 그건 의식의 절차이니까. 훗.. 그대라면 아주 많이 어울릴지도 몰라.」 「에?」 「아주 아름다운 옷이라는군.... 내 모후는 그 옷을 늘 간직하셨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제게 주셔도 되나요?」 「당연하다. 타이라세이카. 그대가 아니면 누가 하지? 후훗..... 그럼 몸조리 잘하거라. 탈이 나기 시작하면 오래가는 법 이왕이면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그대가 내 옆에 서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아름답게 웃었다. 그렇게 보였다. 한점의 티끌도 없는 싱그러운 웃음은 마음속에 사악 스며들 듯 간직되었다. 두근.. 두근.. 이상한 충격. 볼 때마다 느끼는 가슴앓이처럼 또다시 아픔이 찾아왔다. 왜 그럴까? 「피곤하긴 한가보군...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시종을 불러야겠군.」 「바쁘실텐데..... 몸이 좋아지면 제게 말 타는 법 가르쳐주세요.」 「그러도록 하지. 쉬거라. 이후부터 즉위식까지는 그대를 만날 수가 없다. 훗... 원래 관례상으로 둘은 잠시 떨어져 있어야하지. 모란궁으로 가게 될 거다. 잠시 이별의 입맞춤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살풋 웃는 그를 잠시 바라보고 입술에 살짝 닿는 숨결을 느끼고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났다. 찌끈..... 아픔이 발바닥에 전해졌다. 조금 휘청하는 나를 보고 그가 걱정을 담은 얼굴로 바라보고 사라졌다. 발이 아팠지만 의식의 절차는 매우 길었다. 정말 한숨이 나올 만큼.. 약간 휘청거릴 때마다 시선이 나에게 모조리 향하였기에 정말 이를 악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의례적인 모양과 걸음걸이 그리고 절차를 외워야했다. 다가오는 즉위식보다도 더 겁이 나는 것은 그와의 마지막 절차였다. 그들이 내게 일러준 것들은 듣기에도 민망한 것들.. 그것을 꼭 그리 행해야 하냐고 물었을 때의 그들은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타이라님은 황제폐하의 라나십니다.」 ‘라나’ 그들이 말하는 라나라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절차였고 그건 그들에게 아무 이상한 일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위대하신 황제폐하는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늘의 신? 그는 다른 의미로 전쟁의 신이다. 그 강대한 땅덩이를 더 부유하게 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그 보호아래 세르판은 넓은 땅덩이와 튼튼한 병력을 가진지도 모르겠지만.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왕을 유혹하는 검무를 추는 것은 흉내만 이라고 할지라도 매우 쑥쓰러운 일이었다. 큰일 났다..... 정통검법이야 배웠다지만 모양만 야들야들한 그들의 검을 들고 어찌 검무를 춘단 말이냐! 내가 고민을 하는 동안 헤론은 또 다른 고민에 빠진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처는 아물기 시작했다. 별다른 독이 발라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더 강한 독에 적응이 된 내 육체는 그런 상처쯤 견디어 내는지도 몰랐다. 가슴은 아팠지만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밤이 늦어서야 모란궁으로 돌아온 난 누군가 있는 느낌에 혼절할 정도로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 그가 헤론이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 발을 들여다보았다. 「잘 참으셨습니다. 다행히 즉위식 때 추는 춤에는 별 무리가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훗. 헤론도 알고 있었군요.」 「아.. 네. 그것보다도 길이 타이라님께 내일 오전 중에 잠시 뵐 수 있냐고 묻더군요.」 「길이요?」 「네. 그도 즉위식 때 황제폐하를 보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그전에 아마도 잠시 시간을 내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왜요?」 「황제폐하께서 타이라님이 타실 말을 골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와아~ 정말 좋다. 네. 꼭 가볼게요.」 모처럼 지친 몸이 가뿐해짐을 느끼며 폴짝 침대위로 뛰어들었다. 잠이 드는 동안 약간의 떨림과 흥분감이 온 몸을 감싸고돌아 모처럼 미소를 띠고 잘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몸단장을 끝낸 타이라가 도착한 곳에는 길이 서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돌아 타이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애뜻한 시선도 느끼지 못하고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좋아보이는데~ 잘 지냈구나!」 「응. 길도 잘 지낸거야? 매일매일 바쁘지? 나도 정신이 없어.」 「그래.」 낮게 이야기 하는 그 목소리가 매우 힘이 없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타이라는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 보이는 수많은 말 사이로 거닐다가 제각기 갈퀴를 휘날리며 푸르르 떠는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신기할 뿐이었다. 「킥.. 여전 하구나 꼬맹아.」 「에에~ 이제 16살이야!」 「엥?」 「오늘 내 생일이야. 길.」 「우아~ 정말이야? 왜 말 안했어?」 「말해도 달라질 것은 없잖아.」 그래 달라질 것은 없었다. 현재 처한 상황이라던가 혹은 자신이 해야 할 행동에 대해서 무엇 하나 세월이 가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은 기쁜 가운데 씁쓸한 기분이 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길은 조용하게 앞서 걸었다. 몇 번을 둘러보고 그리고 말의 입주변이나 엉덩이 그 등의 곡선 등을 쓸어보았다. 그리고 타이라를 돌아보았을 때 타이라는 들어서는 한 여성에게 달려가는 중이었다. 그 달려온 여성은 희미하게 웃었고 그리고 길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어제는 죄송했어요.」 「아. 비가 왔는걸요. 여름철 장마비는 매우 지겹죠. 그 가운데 이런 햇살이라니 타이라님은 축복받으신 지도 몰라요.」 「고마워요. 여긴 길. 황제의 기사랍니다. 그의 특기는..」 「됐어.!」 길은 소문난 여자 밝힘 증과는 다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에~ 부끄러워하네요. 하하. 근데 길 다 고른거야? 어떤 녀석이야?」 「이 녀석이다. 갈색의 털이 너무 예쁘군. 윤기가 좔좔 흐르고 눈매가 초롱하지. 어때?」 「아름다워요. 좋은 말을 고르셨군요.」대답을 한 것은 새로운 여성이었다. 「아~ 정말 예쁘다 길. 이 녀석 탈 때 도와줘. 알았지?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폐하와 같이 안 먹어?」 「응. 오늘부터 내일 즉위식이 있을 때까지는 얼굴을 볼 수 없데. 아! 같이 가세요. 이제 방해할 사람은 없거든요.」 어색해하는 레이디 쑥쓰럼타는 기사와 매우 활발한 소년으로 구성된 세 명의 사람들은 식당을 향해 걸었다. 오전의 단촐한 식사를 제외하고는 즉위식을 하루 앞둔 궁은 매우 소란스러워서 휴리아는 방안으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소년의 밝은 모습은 마음의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 아픈 질투심을 유발시켰다. 황제가 아끼는 라나의 신분이 오히려 황비가 될 수 있는 자신보다도 더 좋아보였다. ‘ 이런 질투심은.... 필요 없어. 선대의 황제에게는 수많은 라나가 있었는걸. 단지 그도 무료하고 심심하던 차에 그를 소중히 여기는걸거야. ’ 자신이 내뱉고도 위안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그는 선대의 황제하고는 다른 것 같았다. 귀족들이 우러러 보는 그의 깊은 생각이나 혹은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매서운 기를 가진 것부터 그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모처럼 와준 자신의 동생이 하루 종일 보이지 않자 실망감이 몰려왔다. 따뜻한 갈색의 차를 한잔 내온 시녀가 안부의 인사를 건내고 사라졌고 휴리아는 잠들 차비를 하였다. 내일은 모든 이들이 바쁠 터였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려면 잠을 자두어야했다. 앞뒤 분간도 되지 않을 검은 밤 한 자락에서는 잔인한 고문에 선혈을 흘리는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세이카의 병사 중 직위가 있는 자였고 그로인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몇 일째 고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으아아아악~~~ 차라리 죽여라! 난 모른다. 으아악..........!」 사내의 묶여진 손이 있는 힘껏 흔들린 뒤 뒤이어 추욱 쳐졌다. 촤 악~ 하고 얼음장같이 찬 물이 뿌려졌어도 그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키리온님. 이자는 아는 것을 말할 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무의미한 고문은 그만두십시오. 탈주한 병사들과 한패가 아닌 듯 합니다.」 「쯧... 냄새가 고약하군 살 태우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비위가 상하는군.」 「그만 죽이십시오.」 「죽여? 난 얻은 게 하나도 없다!」 키리온은 화가 날대로 났다. 이미 잡혀온 병사의 사지는 굳어가고 있었다. 젠장.... 아버지에게 군사기밀을 알아내 준다고 호통을 다 쳐놓았는데. 아..... 키리온은 고문하던 사람들을 다 물렸다. 그리고 황급히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으으으...... 으으읏...... 감옥 안 고문실에서는 온갖 신음이 다 흘렀다. 이미 입은 화상의 상처도 매질도 그를 죽음으로 가는데 한몫하긴 하였지만 고통이 줄어들지 않고 미약한 숨을 내쉬는 것은 더 곤욕이었다. 죽여라..... 마음속에서 수없이 외치고 외치는 자신의 모습이 감은 눈 속에서 아른거렸다. 딸그락...!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실눈을 떠 바라본 곳에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매우 좋은 향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젠장...... 죽일 놈들. 이건 또 무엇이더냐. 너희들이 말하는 사신인가! 「이봐요. 병사님. 정신 차리세요.」 「........?!!」 「당신을 구해줄게요. 난 타이라세이카 세이카의 왕자입니다. 볼모로 잡혀있습니다.」 「무..무슨..쿨럭~ 왕자는 없다. 모두 우크란으로 도주해....했어. 쿨럭..」 「아니요. 전 볼모로 왔어요. 모르시겠거든 왕궁으로 가시면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그래..... 제가 그때까지 살 거라고 보십니까. 왕자여.」 「병사님. 전 황제궁의 위치를 압니다. 황제의 라나가 되었어요. 직접 빠져나가고 싶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제가 사라진 것을 황제가 알면 더 큰일 나요. 부탁이 있습니다.」 「.........」 「세이카에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나 타이라세이카는 더 이상 황제의 노리개는 되고 싶지 않다고 더 이상 거짓으로 그의 곁에 머무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병사님! 병사님이라면 제 심정을 알겁니다. 황제는 잔인하고 냉혈한 사람입니다. 전 그의 라나이고 하루하루가 괴로움입니다. 도와주세요.」 「어..어떻게..쿨럭. 도와주면 됩니까....!」 「제가 부리던 시종이 있습니다. 그에게 황제궁의 위치와 황제의 모습을 알려주었습니다. 국경을 넘으실 때도 그는 도움이 될 거에요. 황제를 암살하고 저를 구해달라고 전해주세요. 꼭입니다. 부탁이에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들이 주는 약에 난...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병사님이 빨리 전언해주지 않으시면 그들의 노리개로 평생을 살게 될 거예요. 도와주세요. 제발.」 철크럭... 감옥의 문이 열렸다. 사내는 무아를 해매는 정신으로 가까스로 감옥의 복도를 걸었다. 「괜찮아요. 여긴 간수가 없어요. 빨리 가세요.」 병사는 울먹이는 소년의 목소리에 안쓰러움을 느꼈고 하마터면 같이 달아나자고 할 뻔하였다. 그리고 흘끗 뒤를 돌아보고 이내 빨리 걸었다. 멀어지는 사내 둘을 보며 비로소 소년은 등을 돌리며 자신에게 휘감은 천을 벗어내었다. 바라보는 소년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모래바람이 분다. 사막의 모래바람은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지형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무덤을 만들어주곤 했다. 이미 세이카의 병사들은 앞으로 더 전진하여 여신의 강을 넘어섰다. 그 뒤는 죽음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듯했다. 먼지바람 속에 피 냄새가 떠돌았다. 죽음이.... 온 세이카를 뒤덮었다. 「여기까지 오는게 아니었어.」 커다란 덩치를 하였지만 날렵한 몸놀림을 구사하는 사막의 병사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 뒤에서 작은 몸짓으로 의젓한 옷을 입은 사내가 걸어와 병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레이스 너무 상심 하지마. 우린 하는데까지 했잖아. 왕자들도 이 나라를 버렸어.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란이 우리가 보낸 편지를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다. 타이라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답답하지는 않을텐데....」 「무사할거야. 먼지바람이 이쪽으로 분다. 그만 들어가자.」 국경에 인접한 막사 안에서 희대의 전사라 불리는 그레이스는 자신의 친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지킬 것이 없는 궁전보다는 이곳에 남겠다고 한 자신의 친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초췌해 보였다. 그래도 친구라고 말 한마디에 힘을 실어 자신에게 건낼 때는 무뚝뚝한 장수라는 소문의 자신도 눈물이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왕자가 떠난 지도 반년이 더 되었다. 생사를 모르는 두 사람에게는 피를 말리는 반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면 그 짧지는 않은 세월은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끝도 나지 않은 대치상황이 어디까지 갈지 우려가 컸다. 차라리 왕자를 찾아와 먼 곳으로 셋이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목까지 치오를 때면 그레이스는 단호한 눈동자의 레스터를 바라보았다. 조국을 떠난 그는 세이카를 자신의 조국마냥 소중히 여겼기에 함부로 그런 말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자신 또한 왕자들이 버리고 간 조국이라 할지라도 목숨보다 소중했다. 먼지바람 속에 위잉~ 위잉~ 하는 곡소리가 들리는듯했다. 「......흐흑. 그레이스. 난 타이라가 너무 보고 싶어.」 푸욱 고개를 숙인 그레이스를 감싸 안고 레스터가 오열했다. [완결/장편] 후원의 왕자 22-끝 22. 황궁의 아름다운 불빛 사이로 태양의 옷을 입은 신의 딸이 다가오면 대지의 왕은 노래하리라.. 골드리안의 후예는 더없이 드높고 더없이 굳건하게 땅위에 뿌리내리리라. 신의 딸이여 그 칼로 하늘을 찌르고 태양의 빛을 담아 대지에 뿌려라. 그대가 내리는 축복은 신의 축복 대지는 풍요로움에 더욱 번창하리라. 신의 딸이여. 그대는 드디어 인간의 품으로 돌아가리니.. 그의 몸이 흙이 되어 사라지는 날. 대지는 슬퍼 눈물 흘리리라. 대지의 왕이여 그대는 드디어 신의 딸을 아내로 맞으니.. 골드리안 후예는 왕을 따르고 평화는 영원하리라. 수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지는 즉위식의 일부분은 반은 공개적이고 반은 특별한 이에게만 공개하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골드리안의 후예는 그 명예를 드높이고 아름다운 신의 딸을 얻음을 기뻐함과 동시에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자로서 그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왕은 아름다운 금색의 치장을 두르고 한번 있을 자신의 즉위식을 위해 날카로운 마음을 진정시켰고 골드리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귀족들은 다시 한번 왕을 위해 축복했다. 그 이름도 드높은 골드리안의 후예. 그는 한손에 세공이 아름다운 검을 지녔고 다른 한손에 긴 금색의 천을 휘감았다. 그의 팔 아래 얌전하게 들려있는 금빛이 도는 공단의 천을 바라보고 왕은 의식을 주간하는 대신전의 늙은 신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홀의 오른쪽 문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눈가에 화장을 짙게 하여 그 표정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신의 딸이라고 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게 아름다운 장신구로 치장이 되어있었다. 순간 정적이 흐를 만큼 고요한 공간에는 한사람의 의식을 주관하는 목소리만 들렸고 나지막이 숨을 쉬는 사람들은 사람 같지 않은 그의 미모에 넋을 잃었다. 기다란 금발을 휘감아 도는 아름다운 실사이로 그의 가느다란 목과 아름다운 쇄골선이 비추었다. 신의 딸에게는 두개의 검이 있어 신으로부터 받은 두개의 권력을 과시하듯 한손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얇은 검과 또 다른 한손에는 금빛이 도는 얇은 검이 주어졌다. 옷은 하늘거리는 왕의 손에 들린 공단 천과도 같이 금실로 짠 듯 아름다웠으며 목으로부터 가슴선 까지 깊게 파여 매우 유혹적인 디자인이었다. 아름다운 천에 감긴 육신도 가냘프거니와 검을 들고 있는 손목의 두께도 부러질 듯 연약한 그는 성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저벅저벅 조신한 걸음으로 중간까지 들어온 그는 우선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리고 검을 높이 쳐들었다. 왕은 이미 관을 받아 의연한 자세로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그의 아름다운 눈이 약간 찌푸려지는 것을 보면. 왕은 말이 없었다. 어차피 의식의 일부분이었고 길게 연습을 할만한 시간이 없었기에 이런 것 따위 아무렇게나 끝나도 좋다고 여겼다. 이 의식이 있고 마무리가 되면 소년과 단둘이 남을 생각에 길고 지루한 시간은 그만 끝났으면 하고 바랬다. 「쿡.. 어렵군.」 지루한 얼굴이었다. 분명. 검은 얇은 대신 휘두를 때마다 휘익~ 휘익~ 하는 오묘한 떨림이 있었고 그 소리는 흡사 피리를 부는 것도 같았다. 침을 꼴깍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검무는 이 의식을 오래 지켜본 신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형식적 이기에는 검신의 동작을 너무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는 그의 검무는 부드럽게 쳐올린 검과 낮게 선회하는 동작이 어우러지면서 오묘한 형태를 만들었고 그 일련의 동작 뒤에는 금색의 옷감이 흐느적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길고 아름다운 머리칼은 차륵차륵 흩어져 내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들었다. 서서히 얼굴을 들어 왕을 바라보자 아르키사트 골드리안이라 불리는 금색의 왕은 힘든 검무에 가쁜 숨을 내쉬는 소년을 바라보며 그를 취하고 싶은 갈망이 하늘을 치솟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낮게 호흡을 가르며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검 날의 끝이 왕의 목에 다가오고 왕은 의식용 칼로 사용되는 무딘 검 날을 손으로 잡아 올려 칼을 빼앗았다. 칼을 들이댄 타이라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지며 자신이 연습한 방법이 아닌 의외의 반격에 놀라 한발자국 물러났다. 사람들은 원래 의식이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지만 감히 여신의 칼을 잡는 왕의 동작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그 칼끝이 아래로 향하고 춤을 추는 신의 딸이 왕의 앞에서 한번더 선회를 하면 왕은 무릎을 꿇고 여신의 칼 아래 고개를 숙이는 것이 끝이었다. 잡힌 칼날의 갈무리 하지도 못하고 타이라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 입술의 모양만으로 말을 판단한 타이라가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할 때. 왕은 신의 딸에게서 검을 빼앗아 흐느적거리는 옷의 앞자락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베어지지 않는 검이 분명했다. 그것은 그러나 절대 자를 수 없는 검에 의해 자신의 옷이 찌익 찢어져 너덜거리자 타이라는 놀라움에 두발자국 뒤로 물러났고 곧이어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아아... 하고 한부분에서 누군가의 낮은 감탄사가 이어졌고 왕은 자신이 들고 있는 천을 활짝 펴서 소년의 어깨에 감았다. 본디 그 천은 신의 딸의 머리에 얹어 주는 것이었다. 이제 신의 딸은 대지의 왕에게 소속되었고. 왕은 이제 비로소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정통 왕이 되었다. 그리고 드러난 어깨를 대신하여 금색의 공단 천을 뒤집어쓴 소년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왕에게 잡혀갔다. 귀족들은 눈앞에 자신들이 본 장면을 수없이 되새기며 빠져나간 왕은 생각도 못하고 자신들끼리 남아 한동안을 움직이지 못했다. 「으아악~ 이게 뭐예요. 내려놔요.!」 「.........더 이상.. 움직이면 내가 힘들다. 발버둥치는 다리가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면 오늘밤은 무사하지 못해.」 「그러는 법이 어딨어요. 어떻게 연습한건데!!! 으악~ 그러고 보니 다 끝나지도 않았잖아!」 「훗. 다들 넋이 나갔더군. 이렇게 나온 것도 알지 못할 것 같더군.」 왕은 홀에서 한참을 지나 눈에 익은 금색의 아름다운 궁에 타이라를 데려갔다. 순간 자신이 늘 상 머물던 곳임에도 너무도 어색한 느낌에 혼란스러워진 타이라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름다웠다. 네 검무는.」 화악~ 모든 열이 얼굴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럽게 연습한 그 동작에 칭찬을 받은 타이라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 바람에 어깨에 간신히 걸쳐진 공단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을 주으려던 작은 손을 갈무리한 커다랗고 따뜻한 손은 놀라서 바라보는 소년의 입술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아아........ㅅ.......」 부드럽게 밀고 들어오는 혀는 거칠지는 않았지만 조급한 마음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듯 매우 집요했다. 갈데없는 황망한 마음을 모조리 날려버릴 듯 왕은 소년의 입술을 탐하고 또 탐하였다. 「아...읏..그..그만.. 하아.......하아...」 숨쉬기가 어렵고 힘들다고 느낀 타이라가 그를 밀쳐내었다. 이제 걸쳐진 옷의 반은 허리춤 뒤로 너절너절 넘어간 상태였다. 왕은 소년을 안아 들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공간을 보니 처음으로 들어선 공간은 황제의 침실이 분명했다. 주의 장식을 볼 새도 없이 왕의 입술이 쇄골 선을 핥아 올렸다. 「아앗......」 순간 놀라서 손을 들어 입을 막아보았지만 왕은 작게 웃을 뿐 그만두지 않았다. 너무 정신없는 가운데 벌어진 옷 사이로 왕의 오른손이 들어오는 것을 눈치체지 못한 타이라는 이윽고 자신의 몸이 벌겨 벗겨진 후 그의 시야에 노출되고 나서야 몸을 웅크렸다. 「사랑한다. 타이라.」 주문처럼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러나 그것은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타이라는 웅크렸던 몸을 살짝 풀고 왕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짙은 욕망과 함께 진실을 말하는 정직함이 들어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뻗어 단호해 보이는 그의 입술을 만졌다. 왕이 작게 웃었다. 아............아............................... 벗겨진 전라의 몸에 남겨지는 왕의 입술자국은 한번도 경험 없는 타이라에게 엄청난 수치감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마음 한구석에 찔끔찔끔 솟아나오는 자신의 욕망은 그가 주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다는 듯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랑한다.」 그가 또 주문처럼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흐르는 눈물을 소중한 것처럼 핥아 올리는 왕의 입술은 따뜻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끈질기게 애무하는 손길이 타이라의 흥분을 가중시켰다. 아직은 한없이 작은 소년의 몸을 훑어 내리던 손길은 이윽고 한 지점에 이르러서 선회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중심부를 만지는 손길에 타이라는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금단의 구역을 걷는 것처럼 그것은 달콤하고 끓어오르는 듯한 갈증이었다. 왕의 손이 부드럽게 페니스를 어루만지자 타이라의 허리가 살짝 휘었다. 그리고 몇 번을 어루만지는지 셀 수 없을 만큼 흥분 했을 때 폭발하듯 자신의 몸에서 욕망이 솟구쳐 나왔다. 그것이 끝인 줄 알았다. 타이라는. 「그대를 취하고 싶었다. 언제나...」 감각적으로 낮은 음률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의 천부적인 능력인 듯 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한번도 침범한적 없는 곳에 이물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읏..... 하..하지말아요.」 「쿡....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친다.」 「뭐..뭘..하는데.......아앗.......」 말을 이을 수도 없이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이물감의 느낌은 하나에서 둘로 그리고 셋으로 늘어났고 그 불쾌한 느낌을 지우기 전에 자신의 중심부를 물어버린 부드러운 느낌이 소름끼치게 흥분을 가중시켰다. 「아....앙.......아...................」 입술을 틀어막을 수도 없이 그가 밀고 들어왔다. 그것은 상상 못한 충격이었다. 손가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고 더더구나 황홀한 애무는 다 잊혀졌다. 쿠욱......하고 박힌 쐐기는.......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에 경악한 충격을 건내주었지만.. 정작 타이라를 안는 왕은 갈증의 끝을 보고 싶은 듯 소년을 계속 먹어 들어갔다. 타이라가 한계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계속적인 왕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순간 허리를 휘는 듯한 아픔과 그리고 쾌감이 몰려오면서.. 타이라의 눈이 감겼다.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잠들었지.」 의연한 모습으로 집무실에 앉아서 산더미 같은 서류를 보던 왕은 들이닥친 꼬마 레이디에게 달달 볶이는 중이었다. 「타이라. 아니 타이라님을 보고 싶어요. 어제 춤이 너무 예뻤다고 말해주려고 합니다. 폐하.」 「그래. 전해주마 메리안. 스테론공께 가 보거라.」 부루퉁.. 거리며 입안에 잔뜩 바람을 넣고 화를 내는 소녀를 바라보며 왕이 슬며시 웃음을 띠웠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메리안이 또 부탁을 했으나 곧이어 들이닥친 기사들에게 밀려 할 수 없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야만했다. 「어...어제는 페하.」 「그 얘기라면 오전부터 지금까지 45번째라고 할 수 있겠군.」 「네?」 「그에게 전해주겠다. 검무에 홀린 장정이 이로서 46명이로군.」 「폐..폐하. 송구스럽습니다.」 기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됐다. 일어나라.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아. 탈주병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탈주병이? 어느 부대에서 관할했었나?」 「예. 키리온경이 관할하던 곳인데 15명 남짓 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들은 지하 감방에 갇혀있었을텐데....」 「자세한 연유는 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키리온경이 바로 보고한다고 합니다. 폐하.」 탁! 하고 책을 덮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주병이라고 해도 중요한 일은 모를 것이 분명했고 그들은 어차피 죽이거나 노예로 삼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된 것이라는 게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이주일 후에 세이카에 대한 처사를 결론짓게다. 모두 물러가라.」 기사들의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 뒤에 사라졌다. 멀리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멀어지고 난후 왕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긴 머리체를 퍼트리고 잠이든 소년을 바라보았다. 처음 겪는 고통이 말도 못하게 아팠음을 알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밤을 지세 운 탓에 소년은 죽은 듯 잠이 들어 있었다. 붉은 입술을 찾아 부드럽게 입 맞추고 웅크리며 옆으로 돌아눕는 소년의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왕은 방을 나왔다. 한동안 행복한 꿈을 꾸듯 소년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뭐하는 거야! 그레이스. 이건 너무 무모해!」 「저 병사를 봐라. 타이라의 생사를 알고 있어. 정확히! 왕자가 살려달라고 하였다. 그녀석이 얼마나 다급하면 그리 말했겠나. 다행히도 영리한 놈이라 황제궁의 지도대신 궁으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을 보냈다. 레스터 이건 기회야!」 「미안하지만 난 반대하네. 이건 함정일수도 있어. 황제가 쉽게 암살될 것 같나?」 「훗.... 함정? 무엇 때문에? 내가 없으면 세이카가 열흘이면 망할까봐? 무엇을 위한 함정 이라는 거냐.!」 「그레이스....하지만.」 「자넨 여기 있어. 나를 기다려. 꼭 오겠네. 그 녀석을 데리고 절대 살려야하네. 우리의 왕자는 죽어가고 있어.」 「휴...... 못말리겠군. 바람이 심상치 않아. 그레이스. 조심히 다녀오게. 자넬 축복하겠어. 우리의 여신에게 자네를 지켜달라고.」 「걱정 말게. 황궁까지 같이 갈 동료가 있고 난 전사야. 날렵한 그녀석이라면 도움이 될 거야. 녀석은 내가 가르쳤다. 어차피 이 나라는 더 오래못가. 레스터 왕자를 데려오면 우린 잠시 우크란으로 피해있자고. 나중에....」 나중에 우리의 세이카를 구하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막을 떠난 세 명의 사람은 초원의 세르판 그 안에 잡힌 왕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달리는 세 마리의 말 위에는 각자 세이카의 기사와 기사를 돕는 병사 그리고 왕자가 보낸 시종이 타고 있었다. 검고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23. 「정말 얼굴보기 힘드네~」 「아......... 미안해.」 모처럼 궁 밖의 출입이었다. 궁 밖이라고 해봤자 황제궁 밖의 널따란 정원이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바깥공기가 그리웠던 것이 분명했다. 의자에 쓰러질 듯 기대어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에게 말을 건 길의 얼굴이 마구 찌푸려져 있는 것을 보아 원하는 대답은 아닌듯했다. 「어디아픈거야?」 「아니.」 사실 안 아픈 곳이 없어. 라고 대답해주려다 사소한 질문이 따라올 것이 두려운 타이라는 그 변명할 힘조차 없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네...검무는...」 「그 이야긴 그만해줘. 부탁이야.」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이야기가 귀에 들려오면 얼굴부터 벌겋게 변하고 마는 자신에게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하는 칭찬일지라도 거부하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와 동시에 떠오르는 그 후의 일이 자연스럽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헤에~ 그럼 내가 온 의미가 없잖아. 예쁜 말이 울겠네. 칫. 궁에 들어가도 얼굴조차 안 보여주는 놈의 심리는 뭐야!」 길이 잔뜩 화가 나서 투덜거렸다. 위대한 황제를 놈이라고 할 만큼 화가 난듯했다. 어느날 갑자기 같이 생사를 논하던 동료가 황제가 된 것은 실감이 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화가 날 때는 서슴없이 불경한 말이 나왔지만 그것은 아무도 없는 때이거나 혹은 죽을 만큼 황제가 싫을 때였다. 그건 충성심과는 별다른 것. 아마도 그 황제가 싫은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의자에 넋 놓고 앉아 있는 소년 때문이겠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과는 별개라고 주장하는 터였다. 어느 순간 슬며시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소년의 모습이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오늘에야 비로소 정원 의자에 앉아있는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움에 소년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온 자신에게 무반응이라고 할 정도로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소년을 보면서 길은 잠시 서운함을 느꼈다. 「이제 추의는 안타네.」 「응. 지겹게 오는 비만 아니면 날씨도 많이 따뜻해.」 「그래도 내가 알던 꼬맹이가 아니잖아. 왜 이렇게 축축 쳐져있어?」 「...........」 뭐라고 대답해야 이 착한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다 이해하면서 귀찮게 하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반가웠지만 수족을 움직이기 싫을 정도로 나른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던 것도 헤론의 도움이 컸지만 그가 그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중년의 나이의 기사이자 의술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헤론이지만 그가 아무리 편한 상대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 하소연하기에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젠장.... 그걸 말로 어떻게 설명한담.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름과 동시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사랑한다.’는 말만 아니었어도!!! 라고 부르르 떨면서 이를 악물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흑....... 창피해. 길은 바라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자학하듯 머리를 쥐어뜯다가 고개를 흔들다가 얼굴에 홍조가 도는가 싶더니 화를 내고 피식피식 웃는 일련의 행동을 보면서 심각하게 헤론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인가 소년을 괴롭히는 것이 저 멀리 보이는 황금의 궁전 안에 산재해 있음이 틀림없었다. 헤론을 찾기 위해 길은 바로 소년을 뒤로하고 별궁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는 헤론은 지금쯤 약초분류를 위해 정신이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몇 가지 약초를 분류하고 있을 때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사내를 보고 헤론은 맑게 웃었다. 무엇인가 다급하게 찾는 모습에 병사 중에 누군가가 또 다치진 않았을까 생각되어 한쪽에 놓여진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고 말린 약초 사이를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헤론. 꼬맹이가 왜 그래요?」 「타이라님?」 「네. 넋이 나간듯하다가 갑자기 실실 웃고 화를 내다가 피식거리고 웃어요.」 「흠.... 글쎄.」 「아아아악~ 글쎄라니. 헤론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울혈이 있는 것을 빼면 그닥 큰 상처는 없던데. 딱히 이상이 있었다면 황제폐하께서 직접 부르셨겠지.」 「울혈?」 「아.....! 그렇군 자네에게는 이런 이야기하기가 좀 그렇구먼. 하하. 라나의 의무를 잘 이행하셔서 대견스럽더군. 그 아름다운 검무는..」「말 돌리지 마세요. 헤론.」 「.......음..」 「그.... 꼬맹이가 지금 폐하와 잤다는 말입니까?」 「흠흠... 이만 바쁘니까 나가주게.」 내쫓기다시피 나온 길은 그길로 소년이 있던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엇일지 모를 슬픔이 마음 한구석에 가득 들어앉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요상하게 눈길을 끄는 모습도 그리고 그 분위기도 그 이유 때문이라니...!! 멀리서 소년이 보였다. 그렇지만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쯧... 아직은 움직이기 힘들지 않느냐?」 「이익!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런~생각보다 생생하구나. 하하~.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답답해서 헤론에게 부탁했어요. 아앗. 이러지 말아요. 여긴.......흡....」 바둥거릴 힘조차 없는 소년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자유로운 팔을 구속했다. 시야의 반대편에 경직된 자세로 서있는 사내에게 잘 보이기 좋은 각도로 고개를 돌리게 하고 소년의 입술을 계속 탐하였다. 「아.......ㅅ..」 긴 머리체가 약간 흔들렸고 뒤이어 감각적으로 키스를 받던 소년이 팔을 들어 황제의 목을 휘감았다. 간밤의 정사로 인해 기운이 빠져 쓰러지지 않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었지만 그것을 멀찍이 바라보는 사내는 거의 경악을 담은 눈빛으로 황제와 황제의 라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흑...........」 「울지 마라.」 「창피해요. 이런 거 하면서 좋다고 느끼면 이상한거죠?」 「쿡... 당연한거다. 타이라세이카.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군.」 타이라 또래의 소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을 의식적으로 담아서 건냈다. 어리다는 말. 아직은 어른이 아니라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그렇지 않으면 단박에라도 울 기세였다. 「이익.. 그러면 황제폐하께서는 이런 어린이와 뭘하시는겁니까.!」 금방 화내는군. 쿠쿡.. 「사랑을 하지.」 천부적으로 능글능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화를 내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자신이 오히려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여서 타이라는 쿡쿡 웃음을 삼켰다. 「됐어요. 이제 들어갈래요. 오늘은 그냥 자게 해주신다는 약조를 해주신다면 점심은 폐하와 같이 먹을게요.」 「훗.. 안아줄까?」 「그냥 둬요. 사람들이........헉..... 길?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폐하. 인사올립니다.」 황제는 이제 정식즉위를 끝내고 화려하고 단아한 옷을 걸친 체 오른손으로 창피함에 붉게 물든 소년의 부드러운 턱 선을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예를 올리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예. 폐하! 죄송하지만 타이라님께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타이라가 불안한 눈동자를 들어 황제와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길은 매우 매서운 기를 내뿜으며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 반하여 너무나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서있는 황제의 모습에 타이라가 황급히 말했다. 「폐하. 그와 이야기 하고 가겠습니다. 잠시 후에 궁에서 뵙겠습니다.」 왕은 사라지면서도 소년의 입술에 입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분하게도 아무것도 못하고 부르르 떠는 기사와 얼굴에 잔뜩 홍조를 띄우고 불만을 토로하는 소년만 고요한 정원에 남게 되었다. 「말해봐라. 타이라세이카. 폐하를 사랑하는거냐?」 「............」 부끄러움과 창피함. 그리고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고백할 수 없는 심정.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빨리!!!!!!! 그를 사랑해?」 길의 눈에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노한 표정이었다. 분한 눈물. 그 가슴에 멍울이 진 것처럼 거세게 항의하는 그의 노성.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봐. 그저 넌 라나가 되었고 할수없이 그리 되었다고.... 그렇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 넌 모르는거야. 그래서 이렇게된거지. 다행이다. 사랑하는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무엇이 다행인지 무엇이 그를 안도하게 하는지 모르지만 타이라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속마음이야 굳이 그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황제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서 요동치듯 떨려오고 그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그가 입맞출때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다는 것을 그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뿐이었다. 「돌아갈게. 타이라. 건강해야해. 언젠가 널 그곳에서 구해줄게.」 「뭐라고?」 대답을 체 하기도 전에 성급한 기사는 떠났다. 나른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타이라는 황제궁을 향해 걸었다. 따뜻하다고 느낀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의외의 말.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그의 진심. 그는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었다. 길... 길... 그 이름을 두어번 대뇌이고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시간이 다 지나가버렸다. 불행히도 타이라의 머리에 왕과의 점심약속이 생각났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간 거의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때 방문이 열렸다. 시종들이 가지런히 탁자위에 음식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음식의 따뜻하고 맛있는 향내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위를 자극하기 시작하여 곧이어 입안의 식욕을 돌게 하였다. 「타이라님. 식기 전에 드십시오.」 시종이 방긋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하고 옆으로 가지런히 섰다. 타이라는 놓여진 스프를 떠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기분이 좋아졌고 그리고 그것을 시점으로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날 때쯤 시종은 갈색의 은은한 향이 도는 차를 올려놓았다. 모국에서는 거의 본적이 없는 차였지만 이곳에서는 항상 오전과 오후 그리고 식사 후에 나오는 것을 보아 굉장히 애용하는 것인 것은 분명했다. 개운하고 깔끔한 느낌. 그리고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고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에 시종들의 당황해 하는 발자국소리가 들렸고 그리고 방문이 열렸다. 「폐하?」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흠.. 그대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더군. 얘기가 길어진건가?」 「아뇨. 오긴 일찍 왔는데.....」 「아무래도 좋다. 황제를 기다리게 하는 라나라니.. 식사는 맛있게 한거냐?」 「네.」 타이라는 그를 향해 담뿍 웃어주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보면 방긋방긋 웃는 그를 보며 아레스는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근엄하게 그를 바라보는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오늘 밤은 기대해도 좋겠군.」 「에에??」 「그대 입으로 그랬지 않느냐. 점심을 같이하면 오늘은 그냥 자게해달라고.. 그대 혼자 맛있게 먹었으니 밤을 기대해도 좋지 않으냐?」 「이...이건! 억지야!!!」 「훗... 기대하지. 타이라세이카.」 아아아아악~~~~~~~~!!! 타이라가 크게 소리 지르자 시종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왕은 침대에 걸터앉아 소년의 등을 어루만졌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해요.」 「이건 정말 사기다.」 「아프단 말이에요.」 세 번에 걸쳐 애원하듯 눈빛을 보냈지만 왕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등을 받친 손으로 두어번 가볍게 두드리더니 상큼한 미소를 짓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흠~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지겠군. 밝은 태양이 떠있을 때는 절대 싫다는 그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바 밤에 보도록 하지.」 「헉......!」 그는 여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가요!」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침대위에 베게를 던져버렸다. 그는 살짝 피함으로서 타이라의 마지막 분풀이조차 무시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밖으로 사라졌다. 한편 궁의 한편에서는 휴리아 실버리안이 오랜만에 자신을 보러온 동생과 이야기 중이었다. 모처럼 동생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동생을 바라보며 즐거운 담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말투에 키리온은 자신의 누이를 지그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키리온. 가급적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구나.」 「잠시만 휴리아.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계속 옆에 있어줄게.」 「무슨 일? 그것보다 너도 봤니? 그의 검무? 난 너무 황홀해서...」 「그만. 휴리아. 누나는 황비가 될 몸이야. 천한 라나의 춤 따위 볼 필요도 없어. 난 그 춤을 보지 못했지만 돌아와 보니 허구헌날 그 얘기뿐이더군. 다들 모조리 정신이 나가서는.. 쯧.」 「아니야. 너도 봤다면..」 「다시는 그 얘기 하지 마.」 키리온의 호통에 휴리아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키리온은 유달리 마음이 약한 자신의 누이가 못마땅했다. 그녀는 충분히 거만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지위와 재산 그리고 가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리 약하기만 한지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키리온이 한마디 충고어린 말을 건내려고 할 적에 방을 들어서는 사내가 보였다. 자신을 호위하는 무사였고 그는 방안에 같이 있는 여성을 흘끔 보았다. 「괜찮다. 말해라.」 「네. 지금 도성근처까지 와있습니다.」 「그래?」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수고했다. 물러가라.」 키리온의 지시에 병사는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사라졌고 멍하니 근처에서 둘을 바라보던 휴리아는 궁금증에 키리온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키리온이 말하였다. 「아. 걱정 마. 탈주병을 잡고 있거든. 누나는 걱정할 필요 없어.」 「탈주병? 어맛.! 키리온 폐하께 보고해야지.」 「아.. 이건 비밀로 해줘 누나. 다 처리가 끝나면 보고할거야.」 「그....그래. 몸조심해.」 시원한 미소를 짓고 남동생이 사라지자 또 무료함에 지겨워질 것을 걱정한 휴리아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몇 일째 자신이 찾고자 하는 소년은 보이질 않았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세르판의 아름다운 성이 밤에 물들고 금색의 궁전에 횃불이 켜졌다. 아름다운 라나는 들어서는 왕의 모습에 새초롬이 눈길을 건내었다. 왕은 간편한 옷차림이었고 라나는 부드러운 질감의 예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왕의 손이 겁에 질린 소년의 얼굴을 살짝 쓸어내리자 커다랗고 파란 눈에 약간의 미소가 돌았다. 「나의 아버지는 내게 비밀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 「.........」 「내 모후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존경과도 같은 느낌이었고 자신은 한 소년을 사랑했고 그 감정을 다 담을 수 없어서 괴롭다고 하셨지.」 「라나를?」 「그래... 그래서 저 라나의 궁전에는 내게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아....그 궁전.....라나의..」 「내게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도록 라나의 궁에는 넣지 말기를 대신들에게 부탁했지만 그것은 오랜 전통이었고 오히려 대신들은 선왕을 모욕했다.」 「하지만...」 「그래. 대놓고는 못했지. 그래서 나를 걱정한 아버지는 내게 여행을 권하셨다.」 「.......」 「담을 수 있는 사랑과 담을 수 없는 사랑을 한정된 곳에서 만들지 말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운명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운명」타이라가 그 말에 흠칫 놀란 듯 대뇌었다. 「그래서 난 그대를 찾았다. 그 궁안이 아닌 곳에서 나의 반려를....」 「폐하. 하지만....」 「그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무것도....」 아.......... 나른하게 밀려드는 감각과 그의 낮게 읖조리는 말속에서 최면에 걸린 듯 타이라의 눈이 일렁였다. 부드러운 손끝은 머리칼 속을 헤집고 따뜻하게 밀려오는 숨결은 이미 입술에서 혀로 그리고 더 안쪽을 탐하듯 자꾸자꾸 밀고 들어왔다. 벌어진 옷 사이로 손이 들어오고 이내 벗겨진 상체에 자신의 표시를 남기는 사내의 욕망이 여린 육신에 점점이 남기 시작했다. 「아읏........하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을 달리는 쾌감. 잡혀진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전라의 나신에 왕은 점점이 자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의 입맞춤인지 모를 그 행위에 붉은 입술이 도톰하게 부어있었고 하얀 살결에는 벌써 붉은색의 반점이 남기 시작했다. 「아아.....앗.....앙.....제발...그.....그만......하앗...」 소년의 중심부를 부드럽게 물어버린 사내는 애원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쾌감에 부르르 떠는 몸이 지쳐 허덕일 때 자신의 욕망을 삽입하기 시작했다. 쿠욱....밀려드는 아픈 느낌이 있은 후에 몇 번의 삽입으로 이미 울혈이 진 소년의 그곳은 붉게 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는 소년은 왕의 매끄러운 살에 상체기를 남겼지만 낮은 신음이외에는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타이라는 힘껏 밀고 들어오는 사내의 욕망을 받아내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죽은 듯이 잠든 소년을 바라보고 그 옆에 살짝 잠이 들었던 왕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깨었다. 그리고 방밖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왕은 지쳐 쓰러진 소년을 뒤로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횃불과 달빛이 실내를 비추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그리고 병사는 왕의 출현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키리온이 나타났다. 감히 이 야심한 밤에 나타난 그를 질책하기에는 매우 다급한 얼굴이었기에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로 그를 데려갔다. 「폐하.. 황공하옵니다.」 「무슨 일인데 황궁이 이리 소란스럽단 말이냐.」 「네. 사실은 탈주병이 이 근방을 돈다는 말이 있어서 제가 확인하고 있습니다.」 「탈주병?」 「예. 해결되면 보고 드리려고 했던 신의 미흡한 처사를 용서하십시오.」 키리온은 머리를 숙여 속죄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때였다. 「잡아라!!!!!!!!!!!!!!!!!!!!!」 궁의 복도 끝 쪽에서 엄청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왕의 얼굴이 매섭게 일그러졌고 황급히 뛰는 키리온과 함께 복도 끝으로 뛰어갔다. 분명 복도 끝에서 황급히 달리는 인영이 보였다. 으악~~~~~~! 사내는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무서운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사....살려주십시오.....흐흑..」 「웬 놈이냐.」 키리온이 긴 장검을 주저앉은 사내의 목에 겨누고 물었다. 왕이 검을 치우라는 동작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물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나?」 「저....전..」 삐그덕 방문이 열렸다. 들어선 사내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관경에 흐읍 하는 신음을 삼켰다. 전라의 몸으로 흐트러진 그는 죽은 듯이 잠이 들어 자신이 다가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점점이 얼룩진 정사의 흔적이 사내의 마음에 쿡쿡 와 박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오..신이시여. 그는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왕자님. 정신 차리십시오. 흐흑.. 이곳에서 이리 되실 줄 알았으면 죽더라도 보내지 않았을겁니다.」 잠이 덜 깬 눈에 보이는 인영이 곧이어 자신이 그렇게나 보고 싶어 했던 사내임을 알게 된 타이라의 눈동자는 커다랗게 커졌다. 「그레이스?」 「네. 빨리 달아납시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나갑시다.」 「안돼!」 「이런! 약으로 정신이 몽롱하시다더니.. 죄송합니다. 타이라.」 퍼억!! 무심결에 받은 주먹의 고통은 복부에서 그리고 기절로 이어졌다. 자신의 가벼운 손동작에 기절하는 소년의 모습에 그레이스는 눈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하얀 모포에 소년을 감아서 어깨에 둘러맸다. 천부적으로 전사의 기질을 타고난 사막의 전사 그레이스는 황급히 어둠을 틈타 황궁을 빠져나갔다. 「그래서.... 누구라고?」 「타이라세이카라고 하였습니다. 전 세이카의 병사입니다. 그가 구해달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거짓을 말하면 네 혀를 뽑을 것이다.」 「흐억.......... 절.. 절대로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푸욱.....하고 왕의 검이 사내의 어깨를 관통했다. 「으아아아악~~~~~ 허억.....허억.... 황제의 노리개는 되고.......으윽.. 싶지 않.....않다고 구해달라고 ......했습니다.......쿠......쿨럭..」 「거짓말이다.」 황제의 눈이 붉게 보였다. 감히 키리온도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복도는 이미 사내가 흘린 핏물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오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 듯 거의 체념의 상태였다. 그때 키리온이 자신의 옷 속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장신구를 꺼내들었다. 달빛을 받아 금빛을 빛내는 아름다운 장신구였다. 「폐하...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머리장식을 달아난 병사들에게서 찾았습니다.」 「이리줘라.」 왕의 얼굴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키리온이 주춤 한발자국 물러났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더러운... 소굴.... 이곳에서 더 이상 있고......으아아악.................」 투욱.....하고 사내의 머리가 땅으로 굴렀다. 황제가 황급히 검을 갈무리하고 복도로 사라지는 모습에 키리온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SIDE STORY 1. 「후회하나요?」 「쿡.. 꼬맹아. 그런 것은 이미 저 먼 곳에 버리고 왔어.」 치적거리는 눈이 발사이로 밟혔다. 이미 얼어버린 발은 무감각하여 춥다기보다 빡빡했다. 몇 번째 보는 것이라 해도 눈앞의 세상이 온통 하얀색에 물든 것은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조금 쉬어갈 아늑한 공간이라도 눈에 보인다면 좋으련만 그 마음을 모른다는 듯 산을 등진 벌판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쿡... 꼬맹이라는 말 오랜만에 들어요.」 「.......」 대답하지 않고 싱긋웃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잔뜩 어린 피곤함에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발아래 덧댄 천이 그 천을 감은 끝이 너덜거리면서 비어져 나왔다. 손을 뻗어 갈무리하기에는 추위에 곱은 손은 이미 따뜻한 곳을 찾아 겨드랑이 속으로 파묻히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따뜻한 곳에서 잘 수 있을거다. 힘내자.」 「헤에~ 거봐 내 말을 듣자고 했잖아요.」 원망의 말투를 섞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맑은 목소리에는 벌써 약간의 후회가 담겨있어 선두에 선 사내는 두어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휴.. 하고 낮은 한숨을 쉬고는 쉼 없이 내리는 하얀 눈송이 사이를 헤쳐 나갔다. 3일 동안 끊이지 않게 내리는 눈은 여행자들의 발을 묶기 충분했을테지만 그들에게는 예외였다. 하얀 벌판사이로 발자국이 찍혔다. 그 위에 내리는 냉기를 가진 눈꽃은 곧 그 발자취를 지울 것이 분명했다. 이제 감았다 뜬 눈앞에는 자신들이 걸어야할 인생의 무계처럼 두터운 눈이 하얗게 깔려있었고 한번 돌아본 그들은 또 쉴새없이 걷기 시작했다. 추적의 무리는 더 이상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거면 되었다. 당분간의 마음 쉴 곳을 찾을 수 있을테니까.. 한참을 걸은 그들이 낮은 산턱 아래서 바라본 것은 마을이었다. 소복이 쌓인 눈 속에 점점이 지붕이 보이는 그 광경에 소리쳐 반가움을 표시하려하였지만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추운 그들에게는 안도의 한숨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여관주인은 굉장히 놀란듯했다. 어깨위로 쌓인 눈을 털며 고양이처럼 부르르 떠는 손님들을 받은 시간은 매우 야심한 한밤중이었다. 채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들이 들어서는 모습을 본 여관주인은 일단 따뜻한 난롯가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필요한 것을 묻기 전에 그들은 얼어 죽을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 눈 속을 헤치고 온 거요?」 「으으으으.. 진짜 춥다. 이런 기분은 정말 싫어. 아~ 따뜻해.」 만족의 웃음을 띄며 가르릉거리는 소년을 뒤로하고 청년은 흠뻑 젖은 머리칼을 마른 천으로 닦아내었다. 주린 배보다도 추위에 얼어버린 몸이 급선무였다. 「으으~ 이래서는 검도 못 잡겠다.」 그제서야 여관주인은 그들의 행색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짐도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은 여행객도 장사치도 아니었다. 걸쳐진 옷을 제외하면 그들은 가벼운 여행자차림 이었지만 의복은 장기간을 여행한 듯 때에 절어있어 오랜 여관업에 종사한 주인조차도 그들의 신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허리춤의 검을 보고 껄끄러워진 여관주인이 내놓은 것은 갈색의 은은한 향이 풍기는 차였다. 두 손으로 받아드는 모습을 흘겨보며 그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이는 청년에게 잠을 깨운 용건을 묻기 시작했다. 「묵어 가실거요?」 「예. 주인장 방을 주시오. 여기도 좋긴하지만 조금 안쪽 방으로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곳이면 더 좋겠소.」 주인장은 그 말에 비로소 그들이 쫓기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급적 조용하고 소란스럽지 않은 공간을 찾으며 허리춤에 찬 검이 전 재산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람은 여관주인을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섰을 때 던져준 금화에 주인장은 잠이 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서늘하게 내뿜는 기에 주인장의 오랜 경험으로 이것이 입막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조용하게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훗.. 이걸 마시면 추위를 덜 탄다더니 거짓말이네. 칫.」 「누가 그래?」 묻지 말아야할 금기. 그 부분을 건드린 청년이 새초롬이 앉은 소년의 안색을 살피고 아차~하고 머리를 쳤다. 소년의 손에 곱게 잡혀있는 문양 없는 잔에 김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하하. 음... 굉장히 피곤하다. 이 나라는 정말 넓어.」 「그렇군. 나도 이 넓은 땅을 이렇게 헤매고 다닐 줄은 생각도 못했다. 꼬맹아~」 「헛. 이봐요. 아무리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다지만 꼬맹이가 뭐야. 이 영감아!」 「뭐? 영감? 네 눈에는 이렇게 팔팔한 영감도 봤냐? 이게 보자보자하니까!」 「으악~ 알았어요. 내가졌어. 으악.. 하지마!」 달려들어 긴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사내의 손이 순간 딱 멈추었다. 눈 안에 들어있는 체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주르륵 흐를만큼 넘실거렸다. 「미안해요.」 「.............」 「미안해요. 이제..... 이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쉬자. 내일 힘들더라도 오래 쉬지 못해. 눈이 녹기 전에 떠나야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분명 해결책이 있을거야. 걱정하지 말고 쉬자.」 이름을 부르려던 사내는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부를 수 없었고 그리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 이름에는 추억이 가득실려 있으니까.. 더 이상 생각나게 할 수 없으니까.. 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뒤에 있다고 해도 마을은 여전히 추운 겨울바람에 시달려야했다. 그래서 두꺼운 벽 안쪽에 겹겹이 대어놓은 천이 습기에 어려 살얼음이 지면 여관주인은 방안을 돌면서 방을 덥힐 장작을 넣어주었다. 타닥타닥 타는 나뭇가지는 검은 재를 날리면서 붉은 혀를 넘실거렸고 제각기 불 주위에서 추위를 피하는 손님들에게 주인장은 의례적인 인사의 말을 건내곤하였다. 주인장이 마지막 방을 들어섰을 때 타들어가는 불 주위에 앉아있는 예의 그 손님들을 보게 되었다. 간밤에 들이닥친 그들은 어느 정도 온기가 도는 방안이 따뜻했는지 덧입은 옷가지들을 모두 벗은 상태였다. 그러나 주인장을 놀라게 했던 것은 한 사람의 외모였다. 늘상 새로운 여행객들을 보는 주인장은 웬만한 일에 흥미를 갖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무심한 주인장의 눈을 뺏은 것은 다름아닌 칭칭 감아진 천속에 숨겨진 머리칼이었다. 소년의 머리칼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흘끗 바라보는 눈길을 인식했는지 긴 머리의 소년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사내가 예리한 눈으로 마주보기 시작했다. 사내의 인상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여관주인은 후다닥 땔감을 넣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소리가 귓전에 울리자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여관주인이 장작을 넣던 손을 멈추고 소년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부르는 노래는 굉장히 애잔한 느낌의 곡이였다. 리듬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부르는데도 그 슬픈 느낌이 전해지는 곡조는 평소 듣지 못한 사랑의 노래였다. 그 옆에서 어깨를 감싸고 있던 사내가 일어났다. 여관주인이 놀라 그를 바라보자 그가 조용하게 말했다. 「우린 세이카로 갑니다. 병사들이 혹시 들이닥치거든 비밀로 해주시오.」 「탈주병입니까?」 「더 이상 알면 목숨이 위태로울 텐데..」 그 길로 바로 달아나는 여관주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하던 소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거봐. 놀랐잖아. 그건 그렇고 왜 거짓말해? 우리가 가는 곳은 우크란이라며.」 「훗.. 그들과 훈련해봐서 알아. 2일 뒤에 이곳을 지나갈거야. 그는 예리하지. 분명 여관주인을 닦달할거다. 이왕 탄로 난다면 조금 돌아오라고 해주고 싶어서.. 왜. 싫어?」 「키킥.... 약았어. 아아~ 배고파.」 「그러게.. 아침부터 노래를 하더라니..」 「몰라. 아주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맴돌아. 어지러워서 이렇게라도 안하면 죽을것같아.」 「그래. 미안하다. 꼬맹아. 그래도 그 노래 들으면서 내가 울겠어. 곡 좀 바꿔주던가.」 「이제 기억하는게 없어. 하나도. 이것도 점점 잊어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사내는 창을 가린 천을 걷어내었다. 소리없이 내리던 눈은 걷혔지만 꽤 많이 쌓인 눈은 이른 아침의 햇살 속에 빛을 반사할 뿐 녹을 기미가 없어보였다. 그래도 가야만했다. 수도로부터 대륙을 가로질러 거의 반 이상을 걸었는데도 목적지까지 반이 남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묵직해짐을 느끼면서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퇴색하지 않은 아름다움. 오히려 애잔해진 소년의 눈빛. 그 아름다운 생물의 옆모습이 눈안가득 들어왔다. 차려진 음식을 서둘러 먹은 그들은 아직 출발하기 이른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분주해보였다. 주인장은 노래에 답례라도 하듯 소년의 손에 작은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추운 눈밭을 헤치고 나설 그들에게는 짐이 될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아주 유용한 양식이 될 것이 분명했다. 소년의 눈이 방긋 웃자 비로소 주인장이 미소를 띄웠다. 고맙다는 인사를 내뱉으면서 사내를 따라 걷는 소년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늘 그렇듯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은 마음에 남지 않는다. 그리움을 남기듯 추억을 남길 뿐이었다. 그렇게나 많이 내렸는데도 눈이 더 올 것처럼 하늘이 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다시 봄이 올까요?」 「.......」 「너무 추워서 땅속의 식물들이 다 죽을 것 같아. 초록대지를 다시 보고 싶었는데..」 「훗. 그게 자연의 신비라고 헤론이 그러더군. 나도 너처럼 어렸을 적에는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거라 생각했어.」 「하하. 가끔 당신은 늙은이 같아.」 「훗.. 가끔 너무 멋있다고 해주면 덧나냐!」 「그래. 당신은 멋있어.」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두 명의 사내가 마을을 떠났다. 새하얀 눈 위에 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날씨도.. 그 위를 걷는 둘의 마음속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병사가 들이닥쳤다. 마을 곳곳을 훑어 내리는 병사들 속에 유독 검은 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사내가 보였다. 사내가 몇 가지 사항을 보고받는 동안 여관주인은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그는 매우 예리한 칼을 가지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를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했다. 「이곳을 지나친 사내 둘을 찾는다. 그중 한명이 금발이고 한 사내는 그 체격이 크지. 본적이 있는가?」 여관주인은 잠시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아..... 탈주병인 듯 보이는 사람 둘이 묵어갔습니다. 2일전이었고 그들은 세이카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라진 이름을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쿡..... 머리를 쓰는군. 세이카라고?」 「네.」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우크란으로 향하는군. 거기라면 더 추적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드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성으로 돌아간다.」 「예. 폐하.」 고개를 숙이며 왕의기사가 대답했다. 대답하는 기사의 말에 기겁하게 놀란 것은 여관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허둥지둥 여관 밖으로 나가는 동안 일렬로 서있던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흘렀다. 이제 더 이상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그들을 추적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뛸 듯이 기뻐했다. 「다시 볼 수 있겠군. 타이라세이카.」 서늘하게 내뱉는 말을 그 아무도 듣지 못했다. 뼈까지 얼려버릴 정도로 추운겨울이었다. SIDE STOY -2- 아! 창을 통해 비추는 햇살에 눈이 찌푸려졌다. 날씨는 매우 청명하고 상큼해서 간밤에 피곤했던 일들은 다 잊혀질 정도였다. 아버지는 귀족회의에 참석해서 부재중이실 것이고 어머니도 이웃마을에 파티에 참석하셨을 것이 분명했다. 자유다!! 그래 자유였다. 당분간 이른 아침 일어나서 문안인사를 드릴필요도 그리고 억지로 앉아서 싫어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유스럽게 하고 싶은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닌 부모님의 강요에 의한 학습은 짜증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훗.. 하고 웃음이 밖으로 세어 나왔다. 벌떡 일어나서 세안을 하고 옷을 입고 단박에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그를 만나러 갈수 있다. 매번 어머니의 차가운 음성에 가로막혀 그를 보려면 몰래 몰래 숨바꼭질을 해야만 했다. 아.. 이제 몇일 동안은 우리를 터치할 사람은 없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입구에 지켜선 문지기가 잡을 새도 없이 숨이 턱에 차도록 뛰었다. 그렇게 뛰고 나면 종국에는 컥 하는 신음소리가 났지만 그때쯤에 그 부근에는 그가 서있었다. 「허....억.....기...많..기다....」 「아니. 별로 안됐어. 오늘은 혼나지 않았어?」 「후........아..... 응. 오늘 집에 아무도 없어. 하아...... 힘들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그는 다 안다는 듯 살풋 웃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그는 어른스러웠고 한편으로 매우 자상했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야?」 「아.. 오늘은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저번에 못 가봤던 그 계곡에 가볼까?」 보통은 근처 마을에서만 나들이를 하곤 했는데 의외로 먼 장소를 말하는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자 그가 웃었다. 「당분간... 아마 못 올 거야.」 절망이 스쳤다. 그의 얼굴에. 나또한 그의 얼굴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는 우리 집에 하인으로 온 자의 아들이었다. 그 성품이 온화하여 나는 그를 몹시 따랐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어머니였다. 귀족자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그와 노는 것을 더 즐겁게 생각하는 것 자체를 어머니는 천한 성품이 물든다는 이유하나로 그를 싫어했다. 결국 쫓겨난 그 부자의 뒷모습을 보며 한 달간을 투쟁했지만 오히려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그리고 나를 만나러 왔다. 그 먼 마을에서. 그 뒤로 난 그를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것은 오히려 재밌었다. 집안의 감시하는 눈을 피해 나오면 그는 평소 내가 겪지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신기했다. 멀리 보이는 산과 그 아래 흐르는 냇물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 즐거워하는 나를 보며 그는 행복해했다. 「나 이곳을 떠날거야.」 「.......!!」 「눈 빠지겠다. 렌. 어쩔 수가 없게 되었어. 아버지가 장사를 하신다는군.」 「그럼.. 난. 난 어떻게 해.」 「종종.. 널 보러올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우린 계곡을 향해 걸었다. 굉장히 멀었지만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그와 헤어져야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파 난 걸음을 늦추었다. 「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해. 렌.」 그가 재촉했다.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내 손을 잡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내리는 모습에 그도 나처럼 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같이한 시간은 거의 10년이었다. 아장아장 걸음마 할 때부터 형으로서 그는 내 옆을 지켜주었다. 바쁘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한 나의 혈육이나 다름없었다. 난.. 그를 떠나보내기 싫었다. 내 인생의 한 자락에 그를 묻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아 갈수는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젖은 눈을 보이기 싫어 울먹이듯 말했다. 이미 도착한 계곡의 물소리가 내 목소리를 삼켰고 그는 큰 물줄기를 바라보고 그리고 나를 안았다. 「미안해. 렌..」 그가 잠시 바라보았고 입을 맞추었다. 처음이었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밤이 찾아왔다. 힘들게 올라간 만큼 어두운 산은 위험했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것 같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했다. 「괜찮아. 내려갈 수 있을거야.」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가 날 바라보았다. 「너랑 같이 살고 싶었어. 레디미온. 네가 아장아장 걸음마 할 때부터 봤거든.. 10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아. 이제 헤어져야한다니.. 너무 마음이 아파. 하지만 이렇게 안하면 주인님은 너와 날 영원히 떼어놓을거야. 그게 무서워서 도망치는거야 렌. 날 용서해줘.」 「아빠가 뭐라고 했어?」 「사실은..........」 레디미온 도련님~~~~~~~~!!!!!!!!!!!!!!!! 어두운 숲의 한쪽에서 우린 서로 오돌오돌 떨고 있었고 그때 마침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던 그의 목소리는 횃불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혀졌다. 그의 손이 아쉽게 떨어져나갔다. 무엇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집사의 무서운 눈빛이 우릴 향해 쏟아져 내렸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도련님을 끌고 여기까지 와? 이러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고 엉? 발칙한 놈!! 저놈을 묶어라!」 「잠시만 집사. 여긴 내가 오자고 했어.」 「도련님. 마님이 화가 단단히 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돌아가셔서 하십시오. 비키십시오.」 밧줄에 묶이는 그를 보며 거의 발악하듯 난리를 쳤지만 하인들에게 수족이 잡힌 나의 작은 몸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물이 쉼 없이 쏟아지고 그 눈물 사이로 횃불만 흔들흔들 보였다. 지치고 힘든 내게 산속의 밤은 몹시 추웠고 이내 까무룩 눈이 감겼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간간히 귓가에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손발이 무겁고 힘이 들어 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오가 지나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내 옆을 지키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화가 나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낮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엄마. 어떻게 됐어요? 레스터는? 응?」 「레디미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밤새 앓았어. 다행히도 폐렴이 아니라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어딨냔 말이야~~!!!!! 레스터는 어떻게 됐냐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려던 내 몸은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되었고 간신히 안간힘을 써서 달려갔다. 아버지의 집무실을 가로막은 집사를 밀쳐내고 난 문을 열어젖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막되먹은 녀석과 함께 다니더니 버릇이 안 좋아졌구나.!」 「이익.... 어떤 버릇이요? 레스터는 어딨어요? 그를 집에서 내 친 것도 모자라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서.. 이제 어떻게 한거예요? 네?」 「여봐라. 레디미온을 밖으로 끌어내라.!!」 「아아악~~~~~!!!!! 레스터를 데려와!!!!!!!」 한참을 난동을 부려도 닫혀 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방안에 갇혀 있었다.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들. 그리고 함께했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 렌. 이렇게 부를 거야. 네 귀여운 얼굴에는 렌이 더 어울려.’ 미소 지으며 말하던 모습과 낮은 목소리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미 창문은 단단한 나무판으로 가려져있었고 밖을 볼 수도 시간의 흐름을 예측할 수도 없이 난 그 좁은 감옥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한참을. 「집사.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 그를 떠나보낸 지 2년 후가 되었을 때 난 비로소 포기라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떠날 때에 거의 반송장이었다고 하였다. 그 핏물이 밴 옷자락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제 아버지의 손에 들쳐 매져 마을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하게 아른거리면 난 그날 하루를 눈물로 보내야만 했다. 그가 몹시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자립을 하기위해 착실히 공부를 했다. 어디든 집을 떠날 수만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난 세세한 외국의 사정 그 문화까지도 착실하게 공부하였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미련 없이 우크란을 떠날 것이다. 「아버지가 한동안 보이지 않으시군요. 어머니는요?」 집사는 내 물음에 우물쭈물 하였다. 요즘 우크란의 신흥귀족 세력이 생겼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때문에 아버지의 사업과 몇 가지 일들이 차질이 빚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평화로웠던 집안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련님....」 「네?」 「정세가 어지럽다고 밖으로 다니지 마시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밖으로 나가실 거라면 하인들과 꼭 동행하십시오. 아! 그리고... 아닙니다.」 「....!? 오늘따라 이상해보여. 왜 무슨 일인데..」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난 수심이 깊은 그를 뒤로하고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침 마차가 안으로 들어섰고 아버지가 보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아버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있었고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놀라서 뛰어갔다. 어머니는 쓰러지듯 내게 안기셨다. 「오~ 이런 레디미온.. 어떻게 이럴수가!.」 하인들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무슨일이세요? 네?」 「영지가 넘어갔단다..... 흐흑.. 레디미온. 이제 우린 어떻게 하니.」 영지에 미련은 없었다. 어차피 내 것이라고 하여도 난 이집을 떠날것이였기에 미련이 없었지만 그 다음에 들려오는 말에 기절할 듯 놀랐다. 「그...... 레스터가.....후작이 .......아.... 그 이름도 입에 올리기 싫은....」 「레스터?」 「비키시오 부인.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소. 제 놈 부인 덕으로 달고 있는 작위 따위 우리 가문에 비하면 택도 없지. 그 영지는 다시 찾아올거요. 들어가자 레디미온. 들을 가치가 없다.」 결혼..... 결혼했다고..... 아! 영지보다도 들려오는 그의 결혼소식에 난 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마굿간 지기의 아들이 아닌 후작이 되었다고 했다. 축하해.. 축하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우크란에는 왕이 없다. 귀족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고 그 귀족들 중 권력이 가장 센 사람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그 우두머리는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대세를 정비 한다던가 우크란과 타국과의 외교문제도 역시 아버지의 말이 가장 영향이 컸다. 그에 따라 난 종종 사교계 파티에 참석하면 항상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파티에 참석했을 때에 난 우리 가문이 재생할 여력 없이 망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 선망하여 우러러 보던 아버지는 비참하게도 한 구석에서 술에 절어 있었고 어머니는 수치스럽다며 참석하지 않으셨다. 내 주위에 몰려있던 여자들과 동료들은 이제 나를 떠나 저 멀리 다른 사람들의 주변에 모두 모여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고 했지만 미련마저 갖지 못하게 이렇게 싹둑 모든 것을 베어 내버린 신께 감사해야할지 원망을 쏟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렌?」 낮은 저음.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나의 또 다른 이름을 부르는 자. 분명 돌아보지 않아도 그였다. 후다다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그리웠던 목소리. 그렇지만 원망도 그만큼 컸다. 「..... 굉장히 빨라졌구나. 렌. 후훗....」 뒤에 그가 서있었다. 잡혀진 것은 팔목인데 온몸에 마비가 오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분명 이건 꿈이야.」 「이런.. 날 부정하지 말아줘.」 「오..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돌아본 내 눈앞에는 몰라보게 달라진 그가 서있었다. 본디 잘생긴 얼굴의 그는 약간 그을른 갈색의 얼굴에 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느낄 때 그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변하였다. 걸쳐진 의복도 그리고 세월이 묻어난 눈매도 나를 보는 그 눈동자도 알아볼 수 없이 달라진 사람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소가 변했다. 차가웠다. 「당신은 레스터가 아니야!」 「........!!」 「나의 레스터는 그런 차가운 얼굴이 아니야.」 「훗... 세월이 지났어. 레디미온. 예전의 난 당연히 아니지. 시간이 지났고 난 세월에 익숙해졌어. 이렇게 변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유감이군. 그래도 난 항상 너를 생각했는데.. 아쉽게 되었어. 잘못 봤군. 너라면 날 알아봐줄거라 믿었는데.... 실수했어. 만나서 반가웠다.」 뒤돌아 가는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변했다. 딱히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의 온화했던 분위기가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그런 차가운 눈동자가 아니었다. 「결혼..... 축하해..」 그가 떠난 자리에 내 목소리만 조용하게 깔렸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4세의 겨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슬픔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극소수의 하인들을 제외하고 하인들도 모두 저택을 떠났고 영지는 하나도 남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몸져누우셨다. 그리고 우크란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고 길거리마다 백성들이 만세를 외치고 다녔다. 소문은 무성하게 커졌고 저택은 수풀에 쌓여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침침해졌다. 관리되지 않은 저택 모서리에는 거미줄이 생겼고 시름시름 앓는 아버지를 치료하는 하녀도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다. 유모는 내 손을 잡고 울다가 더 이상 내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보따리를 싸고 떠나갔고 난 2명의 여자하녀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덩치만 커다란 저택에 남겨졌다. 이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미련을 가질 것은 없었지만 내 피가 섞인 아버지를 두고 갈수는 없었다. 예전에 알던 귀부인이 조금씩 도움을 주었지만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난 그때 다행히도 이미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운 상태라 그 부인의 딸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지만 아버지는 나의 그런 모습을 무척 수치스러워했다. 그 해 우크란에 길지도 않은 3주간의 겨울은 내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그 후로 또 몇 년. 투병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약값을 댈 수가 없었고 이미 아버지의 작위는 내게 넘어왔다. 처음으로 내 작위를 이용해서 한 일은 저택을 파는 일이었다. 모두 대저택을 사고 싶어 했다. 건물만으로는 우크란에서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가로 이름모를 누군가에게 팔렸고 난 아버지를 위해 유모를 불렀다. 저택을 판돈으로 마을 어귀에 집을 구했다. 그리고 유모가 아버지를 돌보는 동안 난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에는 조금 어렸지만 그들은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어느 날 내가 살던 저택에서 왔다는 하인의 부름으로 그 마차를 얻어 타고 그 저택에 방문하게 되었다. 저택은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저택에 머무는 사람도 모두 생소한 인물뿐이었다. 걸어 나온 사람은 매우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였다. 그녀는 다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를 데려오게 하고는 내게 차를 권했다. 「명성이 자자하더군요. 제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부인. 단, 전 머물면서는 할 수 없습니다. 집에 몸이 불편하......」 난..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레스터....! 내가 살던 저택을 고가에 산 남자. 마굿간 지기에서 후작이 된 남자. 그리고 내 고통의 원인. 오....! 하느님. 경악해 하는 나를 보고 그는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고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훗..... 괜찮은 가정교사를 구했군. 찬성이오.」 「어머~ 당신은. 아이가 너무 어리다면서요..」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우리 아들은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야. 후훗..」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정신없어 하는 사이 계약은 이루어졌다. 너무나 후한 선금이 집에 도착했고 전용마차와 마부 그리고 아버지를 돌볼 하녀도 덤으로 따라왔다. 부담스러웠고 괴로웠다. 마음 한 구석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슨 생각인걸까. 아침에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하여 아장아장 걷는 아이에게 글 쓰는 연습을 시키고 책을 읽어주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 끝나면 부인이 내오는 티타임에 초대되어 시를 몇 개 읽어주고 그리고 돌아오곤 하였다. 생활은 풍족해졌고 종종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때로 마음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올 때가 있었는데 그건 거의 무시되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티타임에 그가 나타났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섞는 그가 조금 두려워졌다. 「호호호.. 아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던지.. 하긴 우리 아이도 글을 제법 쓸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머 이런~ 파티에 참석하려면 지금 나가봐야 하는데 당신이 선생님과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러지.」 「아... 그럼 저도 이만 가보...」「거기 앉아.」 부인이 사라지고 난 그 빈 자리와 공허한 공기 그리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임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듯 그의 눈이 매서웠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벌떡 일어난 나를 그는 잡지 않았다. 단지 먼저 앞서 걸어 방문을 걸어 잠궜을 뿐이었다. 놀라 커진 나의 눈동자를 그는 마주보았다. 「쿠쿡..... 도망가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그와 실갱이가 시작되었다. 그를 밀치려던 내 손이 잡히고 그리고 순식간에 고개가 꺾이고 잡힌 손이 풀리면서 그의 입술이 물어뜯듯 다가왔다. 집요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하....아....... 이....이러지 마요.」 이미 묶어버린 머리체가 흐트러져 볼을 스쳤고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공중을 떠다니는 오묘한 느낌.... 아......! 그리고 저항이 없는 내 몸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아.......앗......으.....」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손길이 쓰다듬는 느낌과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입술에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어떻게 그 저택을 빠져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내 침대 위였으니까.. 하반신이 욱신거리는 느낌은 과히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그가 꼭 안아주며 속삭인 말은 귓가에 맴돌아 미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와의 밀회는 시작되었다. 다정하고 때로 한없이 정렬적인 그와의 관계에 나쁠 일은 없었다. 아내가 있다는 그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는 나를 아껴주었다. 귀부인이란 하는 일이 없어보였지만 사교계의 일로 무척 바쁜 것은 틀림없었다. 그의 아들을 내게 맡기고는 거의 한달 중 대부분을 저택을 비우곤 했다. 하인들도 굳이 나와 자신들의 주인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난 그가 왜 내가 살던 저택에 살게 되었는지 의심하지 않았다. 영지의 대부분을 왜 그가 인수했는지 이유 따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를 다시 만났고 반가웠고 그와의 생활이 행복했다. 만나지 못한 몇 년간을 보상받게 해주듯 그는 나를 아껴주었고 사랑해주었기에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미련도 의심도 갖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에는.......... 귀부인들이 모이는 곳이 이번에는 이 저택이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분주해서 아이의 공부를 봐줄 수가 없었다. 아이의 정신도 흐트러져 있어 주위가 매우 산만했고 저택의 넓은 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마차가 있었다. 그리고 난 홀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사람들의 속삭임에 걸음을 멈추었다. 「호호홋.. 경께서 이집을 사시려고 그렇게나 노력하셨다더니 정말 훌륭한 저택이에요.」 「어머어머~ 그럼요. 영지도 다 인수했는걸요. 거의 헐값이나 다름없었죠.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에요. 일부러 영지도 다 사들인걸요... 망해가는 모습이 재밌다고 했어요.」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전 공작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냉정하게 말하더군요.. 그 매정한 인간은 벌 좀 받아야한다고.. 사교계에서 추방될 때에 얼마나 웃겼는지 호홋.. 그 위세 넘치던 모습도 종국에는 그 모양이 되니까 불쌍하더군요. 그래서 그 아들을 고용했어요. 불쌍하더군요..」 「어머~ 마음도 넓으셔라. 그래서 자비를 베푸셨군요.」 「그럼요. 그이도 마음에 든다고 했어요. 제 마음이 넓다고 얼마나 칭찬하시던지.. 어머.. 사담이 길어졌어요. 즐겁게 노시다가세요. 전 이만 그이를 보러가야겠군요.」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사랑해서 안은 것이 아니었다.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배신감.... 그보다도 가슴 아픈 괴로움. 떠나야했다. 멀리.........! 뒤도 안돌아보고 집으로 돌아온 난. 하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몸져누운 아버지 머리맡에서 한참을 울고 그리고 유모에게 당부의 말을 건내고 난 집을 떠났다.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먼 곳에 가본 적이 없기에 두려웠다. 그래서 선택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 모래의 땅으로. 그리고 떠났다. 먼 땅. 먼지의 아지랑이에서 죽음의 사신이 보였다. 죽을 것만 같은 나의 말라버린 입술에 물이 닿았다. 무장인 듯한 사내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들어올리고 차가운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웅성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인영. 「레스터.......」 마지막으로 되뇐 이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이 내 이름이라고 판단 그때부터 난 레스터가 되었다. ---------------------------------- 두 번째 side story입니다. 이것은~ 레스터라고 불리우는 타이라의 스승의 이야기죠. 아..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너무 오랜만이죠? [연재/장편] 금색의 악마 1~10 prologue 「아......읏...... 제발.........아아........앗....」 여린 소년의 몸 위에 움직이는 나신은 부드러움보다는 포악한 한 마리 짐승과도 같았다. 그 거친 숨이 방안에 흩어졌고 정사의 그 한 부분은 어두운 밤 한구석에 뚜렷이 각인되어졌다. 소년은 힘이 드는지 달콤한 신음보다는 이를 악물 듯 고통을 호소했다. 처음 받는 사내의 몸은 매우 거칠었으며 그리고 격정적이었다. 이미 몇 번의 삽입에 소년의 여린 살은 다 찢겨져 나갔다. 「아윽.. 제발.. 그....그만........으흐흑.......」 흐느끼는 소년의 손가락이 하얀 천에 감기고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한번 짓고는 깊숙이 더 깊숙이 자신의 것을 박아 넣었다. 소년은 자신의 안에 불쾌한 느낌을 남기면서 밀려올라오는 사내의 정액의 느낌에 혼절하듯 숨을 몰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미약한 공기가 코 끗을 스치고 숨을 내쉴 때마다 그 어둡고 묵직한 공기는 폐안을 더럽히고 있었다. 「하아............」 이미 한번의 정사에도 소년의 나신은 무거운 공기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방안을 감도는 공기는 야릇하고 괴로워서 소년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허덕이는 신음을 해야만 했다. 사내가 일어났고 아무렇게나 벗겨진 겉옷을 걸쳤다. 들어오는 사내들은 정액과 피에 더러워진 침대 위에서 소년을 일으켜 세웠다. 하얀 머리칼을 흐트러트린 소년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안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복잡한 공간에 버려진 아이마냥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리고 사내들은 소년의 나신을 추슬러주지도 않고 끌고 갔다. 이로서 또 한명의 소년이 빛을 보는 마지막이 되었다. 분명....... 푸르른 숲 풀밭위에 잠이 들게 될 것이다. 다른 소년과 마찬가지로.... <1> 검붉은 강물이 되어버렸다. 그 아름답기 그지없던 여신의 강은. 지겹게 이어지는 끝이 없는 싸움은 이미 형질을 변화하고 그 푸르른 강물의 색을 변질시켰다.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동료를 바라보는 소국 세이카의 병사들은 어떻게든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다. 이미 선두에 섰던 전사는 사라졌고 후방에서 지위하는 일부만 남아 세이카의 전쟁은 비참할대로 비참해졌다. 그러나 끝날 것 같으면서도 전쟁은 그 끝을 보이지 않았고 그 작은 나라에서 한없이 쏟아지는 병사들의 숫자에 세르판의 병사들은 질려할 뿐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싸움에 여신의 강은 붉은 피를 토하며 울었다. 이미 삼켜버린 인간의 시신을 강가에 토해놓아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에 물들어 여신의 강의 하소연을 무시한지 오래였다. 「생각보다 길어지는군.」 뿌옇게 이는 먼지구름을 보면서 헤론은 말하였다. 그리고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위하던 피로 얼룩진 검을 검집에 넣으면서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일년을 넘게 끌어온 이 전쟁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우수한 책사가 있군.」 아마드가 존경을 담아 헤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분명 자신의 예상대로 병사들을 배치하고 세이카를 쳐내었지만 계속되는 실패에 지쳐가는 중이었다. 세르판의 황제는 긴긴 전쟁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가슴을 졸이며 늦어지는 세이카 함락의 보고에도 거의 무반응 할 정도였다. 지겹게 이어지는 전쟁의 끝을 위해서라도 더 과감한 결단을 내려준다거나 혹은 늦어지는 보고에 화를 내어도 좋으련만 그는 무엇인가 다른 일에 몰두한 듯 했다. 황제의 기사들은 거의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이제는 저 사막의 모래땅을 왜 함락해야 하는지 조차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고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짖고 자신의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황제가 반응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에 바쳐지는 소년들이었다. 17세 전후의 금발소년을 찾으라는 황제의 어명에 의해 세르판과 우크란을 오가는 여행자들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 연유도 모르고 17세 전후의 소년들을 궁으로 끌고 갔다. 대부분 신분 상승을 꿈꾸는 자들이거나 혹은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억지로 색을 빼어버린 머리칼은 금색이 아니라 하얀 탈색의 머리였다. 돈으로 팔리고 그 수익을 챙긴 사람들은 그 후 자신들이 팔아버린 소년의 생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으며 크게 받은 돈에 기쁨을 표할뿐 소년들이 무엇을 위해 궁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라나궁에는 사람이 늘어갔지만 유일하게 성밖을 걷던 황제의 라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누구도 약속처럼 황제에게 금발의 소년에 관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심지어 헤론조차 자신의 동료 아마드에게서 사라진 라나의 마지막 순간을 들을 수가 없었다. 전해지는 말로 사라진 라나의 사건에 키리온이 개입이 됐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지 않고 황궁을 떠난 것은 제 아버지의 덕이었으며 제 누이의 간청으로 목숨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천행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키리온이 궁 밖으로 쫓겨나듯 떠나는 것에 귀족들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귀족들의 반대는 일주일도 채 가지 못했다. 그것은 신성하고도 엄숙해야할 대회의에서 벌어졌다. 키리온은 여느 때처럼 서글서글한 미소를 띠우고 황제에게 보고를 드리고 있었고 점점이 굳어가는 황제의 얼굴에 고개를 숙이고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회의의 그 엄숙한 공간에서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며 용서를 구하는 사내의 얼굴에 시퍼런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순간이었다. 뚜욱.. 뚜욱... 검 날에 묻은 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파랗게 질려갔다. 찢어질 듯 괴성의 비명을 지르면서 사내가 쓰러졌고 그 이후 그 누구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아마드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황제의 가장 옆에서 보필하는 역할을 주로 하지만 황제의 흔들림 없는 살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변했다. 확연히. 다가가지 못할 정도의 그 살기는 살이 성큼 베어나갈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아무도 키리온의 처사에 항변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였다간 그 다음에는 머리와 몸이 분리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키리온은 수도를 떠났다. 당분간은 살아있음을 감사드려야 할 것이 분명했다. 「아마드. 폐하께서는 무고하신가?」 「예. 헤론. 이제 막바지에 접어드는 것 같군요. 우크란이 개입됐다는 확연한 증거를 잡지 못했습니까? 그것만 있다면 차라리 배후를 치는 게 좋을 듯싶은데. 저 작은 나라에 이만한 병사가 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군요.」 「허허. 그러게 전략을 짜는 족족 다 간파당한다고 할까? 난감하이. 그런데다가 우크란의 우두머리는 생각 외로 머리가 좋은 듯 하더군.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전쟁을 치루고 있으니까. 대외적으로는 계속 상인들과 여행객들을 세르판으로 보내고 있어. 황제폐하가 왜 아무런 제약도 안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헤론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자 아마드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황제가 날이 선 단도처럼 날카로운 기를 가진 자 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는 그렇게 유약해 보이는 이유는 사라진 소년 때문이었다. 우크란에게 협력을 구한 그 모종의 일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죽었다고 결론지어진 라나의 일에 대해 아마드는 아무 발언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늘 아래만 살아있다면 찾아내겠다는 황제의 일념을 그 소망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황제도 지쳐갈 것이 틀림없다. 그가 사라진지 긴 시간이 지났고 민간인을 베어내지 않으려는 그의 전쟁에 이제는 더 이상의 여유가 없을 것이다. 황제의 라나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니까. 그 검푸른 강물에서 살아날 리가 없으니까. 살았다면 이렇게 이 잡듯 살피는 병사들의 망을 빠져나갔을 리가 없다. 이제 황제는 더 이상 일말의 미련이 없이 세이카를 쳐내야했다. 아마드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혜를 모두 짜내어보아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를 이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시급한 문제로 모래땅을 함락할 방법을 생각하기로 하였다. 헤론에게서 사막의 보주라 불리는 밤의 이슬 향기가 났다. 밤은 깊었고 황제의 기사들은 잠을 청했다. 막사 안에 뜨겁게 불어 들어오는 바람도 열사의 기운도 이제는 그들에게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었다. 카오스력 153년 세이카이 왕이 군림하던 세이카는 세르판에게 예속되어졌다. 그리고 황제 아르키사트 골드리안이 다스리는 땅은 세르판령이었던 여신의 강의 서편 사막의 땅과 우크란 상부의 반이었다. 황제의 마지막 결전에 우크란은 손을 들었고 이상하게도 그렇게나 유약하게만 보였던 황제는 단숨에 우크란 마저도 삼켜버렸다. 그리고 우크란의 일부 젊은 귀족들을 제외한 귀족들의 우두머리들은 그 목이 달아났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세르판은 거의 대륙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나라가 되었다. 길고 긴 싸움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하였고 메말라 버린 오아시스에는 새로운 세력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피를 머금은 모래땅은 더 이상 피를 삼킬 필요가 없어졌다. 들이닥친 병사들은 세이카의 귀족들의 목을 하나씩 베어내었다. 그리고 일부는 세르판의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황제의 기사는 병사들을 집결시켜 남은 세력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숨어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완전히 그 세력을 바꾸려면 아직 시간은 필요했다. 전쟁이 난지 1년 8개월째 되던 날이었고 더 이상의 자비는 베풀지 않겠다는 듯 젖내 나는 어린아이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세이카이 왕으로부터 난 다섯 왕자들의 생사는 묘연해 졌으며 실질적인 세이카 황족의 피는 사라지게 되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널따란 궁의 한편의 보이지 않는 지하에 투옥된 세이카의 귀족들은 자유를 갈망했다. 그저 하나라도 세이카에 대한 정보를 더 넘겨주고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기를 원했고 밝은 태양을 다시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루 한번 나오는 식사에 토악질을 하던 배부른 귀족들은 하나둘 개걸스럽게 먹기 시작했고 처참한 몰골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만 눈물조차 애원조차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에 간수는 고개를 젓고 그의 상태를 상부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간수의 보고를 받고 쾌쾌한 감옥에 손님이 찾아왔다. 끼이익... 귀에 거슬리는 커다란 그 소리는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줄기 소망처럼 들렸다. 그들은 식사시간과 그리고 간수의 점검시간이 아니면 열리지 않는 복도 끝의 문소리에 숨을 삼키며 자신들을 살려줄 사람이 오기를 소망했다. 뚜벅뚜벅... 어두운 공간을 가르는 횃불이 점점이 다가오자 복도의 벽으로 커다랗게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수 없는 사람들은 갇혀진 방문에서 바깥으로 나아있는 작은 틈으로 걸어오는 자가 누구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세 명의 뒤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의 거의 끝부분에 다다랐을 때 복도 끝의 방문이 열렸다. 메케하고 축축한 그 오래된 공기가 코 끗에서 그리고 입안으로 들어오자 사내의 뒤에 선 세 명의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훗.. 지내기 힘들겠군.」 땅으로부터 울리는 목소리라고 갇혀있는 사내는 생각했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죽이려 했다면 이리 많은 사람들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짧은 순간 생각한 그는 순간 자신에게 무엇인가 원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닌지 라고 생각을 하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사내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횃불을 보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오랜 영양부족으로 오는 시력감퇴인지는 몰라도 사내의 목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제게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요? 이미 패한 나라의 가신 따위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훗.... 그렇군. 그 약은 머리는 누굴 닮았나 했더니 그대로군.」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것인지 감옥 안에서 꿀리지 않는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빨리 나가서 자신이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이제 하루 한 끼의 식사조차도 입안으로 넘기기 싫을 정도로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바 무슨 말이든 행동이든 다 귀찮을 뿐이었다. 「타이라.」 횃불을 등지고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무 작은 소리의 그 웅얼거림에 사내는 순간 자신이 잘못들은 것인가 망설였고 곧이어 토해내듯 말을 내뱉었다. 「타이라? 타이라를 아시나요?」 「그대가 타이라를 가르쳤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하문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설마...... 골드리안 황제?」 「잘 알고 있군.」 얘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한 것인지 황제는 뒤에 선 사내에게 무어라 명령을 하였고 곧이어 황제가 앉을 의자가 준비되어 왔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던 죄수에게도 황송하게 의자가 주어졌다. 「그대가 레스터인가?」 「.........」 무언의 대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황제가 이윽고 다시 말을 이었다. 「타이라 세이카의 스승이자 전쟁을 길게 이끈 책사가 그대인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이라면 맞습니다. 하지만 동료를 잃었고 나라를 잃었고 그리고 사랑하던 제자를 잃은 한 사내에 불과합니다. 제게 모든 것을 앗아가신 것을 확인하려 오셨는지요?」 그는 독설가였다. 「하하하. 마음에 드는군.」 젠장. 하고 레스터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그는 여유가 있었다. 너무나 얄미울 정도로. 「타이라 세이카가 이곳에 온다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은 그대겠지. 이 어두운 곳에 갇혀있음을 우울해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야. 조만간 그대를 찾아올 것이니까.」 「타이라가.......타이라가 살아있습니까?」 「죽은 시체가 없으니 살아있겠지.」 황제의 대답은 흡사 다짐하는 것 같았다. 황제는 그 말을 마치고 어두운 방 안을 빠져나갔다. 횃불이 멀어짐에 따라 암흑 속에 갇힌 레스터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살아있다면........ 그래. 살아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레스터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병사가 들이닥쳤다. 두 병사는 감옥 안에서 거의 뼈를 드러내듯 말라버린 사내를 끌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축축한 벽과 곰팡이 냄새가 코 끗을 스치고 그리고 힘이 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느꼈을 때에 눈이 부실 정도의 햇살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기절할 정도로 맑은 공기였다. 처음 경황이 없어 바라보지 못했던 만큼 그 풍경이 천상의 낙원처럼 눈에 들어왔다. 푸르른 실록이 가득한 그 아름다운 터전에 자신이 서있었다.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현기증이 밀려왔다. 2. 따뜻하게 차려진 식사에 포근한 실내.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벽의 문양.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공간에 있는 것처럼 두려웠다. 묻지 않아도 갑자기 달라진 처사는 분명 긴 시간동안 생사를 알 수 없는 왕자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순간 여러 달 동안 지냈던 그 어둠의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다. 살아있으니 자신을 찾을 것이 분명하다는 황제의 목소리가 생각날 때마다 무감각한 그 목소리에 은연중 섞인 단호한 의지가 느껴져 레스터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것은 자신의 간절한 바람과는 질적으로 틀린것이었다. 짐작할 수 없는 황제의 심중과 그가 찾으려고 하는 소년의 생사 문제는 레스터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세르판 황제의 말처럼 자신을 보러 오지는 않더라도 살아 있음을 알리는 소식조차 없는 소년의 무심함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기다리는 자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동안 목숨을 이어온 레스터로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의 희망 그 끈의 한 자락을 놓으면 자신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떤 이유건 다시 돌아와 주기만을 바랬다. 자신을 보러오든 아니면 아무 말도 없이 서있어도 그 서늘한 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황제를 보러오든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가급적 전자이길 바랬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다니는 시종들의 고요한 분위기도 그리고 흘끗거리는 병사들의 눈도 달갑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이라고 조용하게 말하고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레스터는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았다. 분명 감옥 안에 갇혀있는 동안 포기해버렸던 모든 것들이 주어진 것에 기쁨을 표해도 좋았지만 사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 쾌쾌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보다도 더 불안했다. 누군가를 붙잡고 다시 그 감옥 안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올까 라고 혼자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이 보기에만 따뜻한 넓은 공간에 자신의 왕자가 살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하고 뜨거운 것이 밀려왔다. 실내는 매우 따뜻했지만 그 반면에 이상하게도 서늘하게 느껴졌다. 피곤함에 눈이 감겨왔다. 「폐하. 우크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시종은 긴장을 털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집무실 안에 있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새벽의 이른 공기는 이미 지나 아침햇살이 복도의 창 안쪽으로 나른하게 내려왔다. 자신의 목소리에도 인기척이 없는 안의 기운에 시종은 잠시 당황하였지만 곧이어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궁전 안은 매우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분명했지만 예전의 웃음소리라던가 혹은 황제의 밝은 목소리는 절대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황제궁에 머무는 시종들에게는 매우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소문처럼 라나의 풀밭에 버려질 것만 같았다. 시종은 흡사 그 비명이 들리는 것처럼 귀를 막았다.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리는듯하였다. 이른 새벽부터 집무실의 무거워 보이는 탁자위에 복잡해 보이는 서류들을 훑어보던 황제는 시종의 목소리에 잠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 끌리는 소리와 조용하게 걷는 발걸음 소리가 났고 곧이어 집무실의 창밖으로 궁 안의 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그 뜰과 연못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표정을 본다 해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이 외로워보였다. 의외로 길어졌던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컸다. 그만큼 이긴 전쟁에서는 얻는 것도 많았지만 그 때문에 새로운 정권을 맞이하게 된 우크란은 그나마 남은 나머지 땅을 지키기 위해 세르판의 황제가 있는 그 금색의 궁전으로 사신을 보내야만했다. 우크란의 귀족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했다. 적절한 조공과 그리고 목숨을 대신할 성의를 보여주면 분명 더 이상의 피를 원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삼일 후에 오는군.」 서신을 쭈욱 읽어보던 황제가 나지막이 내뱉는 말에 우크란의 사신은 바들바들 떨었다. 커다란 공간에 벽으로부터 쭈욱 늘어선 대신들의 시선과 그리고 모아만 놓으면 한 부대는 될 것 같은 병사들 가운데 서신을 올리는 사내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수가 틀리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국의 황제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미 패한 소국의 사신을 죽인들 아무도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저 황제의 넉넉한 마음을 기대하면서 그가 할 대답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예. 위대하신 황제폐하. 저희 우크란은 이번 세이카의 술책에 속아 전쟁에 개입한 일부 귀족들의 처형을 다 끝낸 상태이며 대 세르판에 대한 존경과 보답을 위한 약간의 조공을 마련하였습니다. 삼일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폐하.」 그리고 사신은 고개를 푸욱 숙였다. 절대 자신들이 먼저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황제가 납득했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의 대답의 여하에 따라 자신의 눈이 더 이상 하늘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흠... 사절단의 상단에 있는 이자는 누구인가?」 「예. 폐하. 이번 회의 때 새로 선출된 자입니다. 앞으로 우크란은 그분을 통하여 뜻을 전할 것입니다.」 「훗.. 이자가 우크란의 우두머리로군. 친히 와준다라....... 후후훗.」 황제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고 그 후 사신은 풀어진 긴장에 땀을 닦으며 돌아 나왔다. 황제의 뜻이 허락이라는 것에 세르판의 귀족들도 축하를 보내었고 곧이어 사신을 대접할 시종들과 화려한 접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온 손님들은 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시종들을 비롯한 대신들은 기뻐했다. 한동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궁전에 무엇인가 기쁘게 축하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게 큰일이든 그렇지 않든 핑계거리로서는 아주 좋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시종들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분주하군요.」 책장을 넘기던 레스터는 식사 때를 알리는 시종에게 웃음을 담아 바라보아주었다. 의외로 서글서글한 성격의 레스터를 시종은 매우 좋아했다. 아마 시종은 가라앉은 궁 안의 분위기에 마음 둘 곳 없이 허전할 때 잘 받아주는 친구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 친구로서의 역할은 레스터로서 적격이었다. 작고 귀염성 있는 얼굴에 연신 미소가 가시지 않는 친근한 모습은 오랜 궁전생활동안 좀처럼 볼 수 없는 타입이었다. 「우크란에서 사신이 왔군요.」시종이 인사치례처럼 말을 건냈다. 「에에? 벌써요? 흠.. 세대교체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군요.」 놀란 것은 시종이었다. 생각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손님은 총명한 것 같았다. 들고 있는 책 또한 매우 어려운 내용일 것이 분명한 두껍고 빽빽한 글씨였고 그 책을 매일같이 읽는 그를 보건대 그는 지식이 풍부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 무례가 아니라면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예. 말씀 낮추십시오. 폐하께서 잘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아..!」 낮게 감탄사를 내뱉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레스터는 잠시 세르판의 황제의 목소리를 떠올렸고 - 사실 그 모습을 본적이 없기에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 시종에게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이카에서 온 왕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 「아.. 곤란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음.. 그분은 성격이 밝고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황제폐하께서 그를 몹시 아끼셨지요. 불행히도 궁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셨다가 그 뒤로 황궁에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아꼈다고요?」 「예. 친히 그를 여신의 딸로 삼으셨습니다.」 오! 이럴 수가. 여신의 딸로 삼았다니.. 그 대관식의 의식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그에게 주었다니.. 듣지 않아도 자신의 왕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그 이후의 일이 짜 맞추듯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풀리지 않은 그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그 끊어진 듯한 연결고리의 한 조각을 주어들은 기분이었다. 황제가 그를 찾는 이유. 자신을 이곳에 잡아두는 이유는 한가지였다. 오.. 신이시여. 레스터의 눈에서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레스터를 보며 시종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미안해진 레스터는 소매 춤으로 눈물을 닦고 시종에게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우리에게 온 사내는 왕자가 이곳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구해달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를 보내놓고 제 마음은 편히 쉴 날이 없었어요. 그리고 제 친우는 친히 그를 이 금색의 궁전에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 둘 다 사라졌습니다. 여신의 강 저편에서 굽이치는 물결 속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시종은 놀라 한달음에 달려갈 태세를 취하였다. 「아뇨. 그러지 마십시오. 우리의 왕자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있다고 하여도... 분명 그 가슴 한편에 멍울이 들어있을 테지요. 지금껏 소식이 없다는 것은.」 지금껏 알 수 없던 라나의 실종사건의 한편을 들은 시종은 크게 놀랐다. 황제의 라나가 황제를 배신하고 사라졌다고 시종들 사이에 쉬쉬하듯 소문처럼 수군거렸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울지 않을 것 같던 사내의 쓰러질 듯한 한탄으로 인해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시종은 조용하게 문을 닫고 돌아나갔다. 그날따라 세이카의 사내는 쓰러질 듯 가냘퍼 보였다. 화려한 마차가 궁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 마차뿐만이 아니고 그 뒤로 주욱 늘어선 사람들이 제각기 어깨에 혹은 그 손에 짐들을 매고 들고 들어섰다. 화려한 행렬에 세르판 궁성은 들썩들썩해졌다. 그리고 황궁으로 올려지는 선물 속에는 특이한 것도 있었다. 정말 누가보아도 흠잡을 것 없는 성의를 표하고 있는 그 무리의 맨 마지막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의 눈동자가 황궁을 한번 훑었고 뒤이어 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황궁을 들어서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두려움이라던가 혹은 불안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내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자신을 인도하는 기사를 따라 궁 안의 홀로 들어갔다. 들어서기 전에 허리춤의 검을 빼내어 무장을 해제한 기사는 안쪽 홀로 사내를 인도했다. 그리고 홀 안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 황제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만으로도 궁 안을 어둡게 물들이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골드리안 황제군.. 편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려해도 어쩔 수 없는 긴장감이 든다고 사내는 속으로 헛기침을 했다. 놀랍게도 세르판의 황제는 젊은 외모였다. 그러나 생김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사내를 두렵게 했다. 그렇군.. 그는 지배자로 태어난 사람이군. 혼자 습득한 그 지식을 이제 보일 때가 되었다.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사내를 대신들은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제폐하. 우크란에서 온 레스터 카이사르 인사드립니다.」 황제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사내는 알아채지 못했다. 굉장히 빨리 스쳐간 그 표정은 다시 무색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귀국의 성의에 감사를 표한다. 편히 쉬다 가도록.」 정말 감사한 표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말 즐겁게 놀다 갈 정도로 사내는 무르지 않았다. 오랜 세월동안 익혀온 가진 자들의 오만함을 목격하고 돌아서서 나오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며 그래도 남은 자들을 이끌기로 한 사명감을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약간 주춤거릴 때에 황제가 유유히 홀 안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세르판의 귀족들 중 몇몇이 다가왔다. 외국에서 온 손님은 이목을 끌기 충분했고 더구나 사내의 생김은 호감을 가질 정도로 충분히 선이 뚜렷하고 잘생긴 이목구비였다. 가져온 공물은 관심이 없었고 자신 앞에 인사를 올리는 사내의 표정이 달갑지 않음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멍청한 사내들보다는 그 씀씀이가 좋을 것이 분명했다. 사리분별만 잘 한다면 차라리 아둔한 것 보다 나을 것이라고 혼자 생각한 황제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걸었다. 그가 지나는 곳은 자연스럽게 황궁의 안뜰이었다. 그리고 이내 극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각이 나는 것들. 그 지긋한 환상. 아니 환상도 아닌 과거의 추억.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그 기억의 주인공!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솟다가도 아련하게 보고 싶은 마음도 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 점점 독이 되어 그 독안에 자신이 물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라나궁으로 간다.」 「예. 폐하.」 시종이 반보 앞서 머리를 조아리며 걸었고 뒤이어 여럿의 시종이 뒤를 따랐다. 귀찮은 일색들이라고 예전 같으면 다 내쳤을 텐데 오늘따라 몹시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이날 자신의 궁에 들어선 소년이 생각났다.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라나의 궁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재빨리 뻣뻣한 자세로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 홀연히 궁 안으로 들어서는 황제의 긴 머리칼을 바라보고 곧이어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또 죽어나올 시체가 눈앞에 어른거려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마음 같으면 달아났을 것이라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어도 병사는 명령 없이 군을 이탈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얗게 팔다리를 내려트리고 그 사지를 추스르지도 못하는 소년들은 때로 하체에 정액에 얼룩진 피를 달고 사내들의 손에 끌려나왔다. 그 겁에 질린 눈동자에 하얗게 탈색이 된 머리칼은 흡사 유령과도 같아서 담력이 강하다는 병사들조차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궁 안은 매우 어지러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의례적으로 황제를 모시게 된 공간은 없었다. 그저 마음가는대로 발걸음대로 가장 편한 곳으로 그 발치에 머무는 곳에 있는 소년이 황제의 밤을 달래주었다. 그날따라 어두운 복도의 끝에서 재잘거리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리자 황제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죽을 거 같아.」 다소곳이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성격에 맞지 않는 듯 방안의 주인은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고 그 어두운 방안에 보이지도 않는 눈을 어둠 속에 익숙하게 하기위해 계속적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쿡....」 웃는소리?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 어두운 그림자를 내려트린 사내가 서있었다. 우크란의 땅에서 짧지 않은 세월동안 팔려 다닌 소년에게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돈을 많이 쳐주는 우크란의 이름모를 귀족에게 팔려왔고 온 몸이 지칠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여행을 했고 그리고 또다시 어두운 곳에 갇혀서 소년은 불만이 상당했다. 그리고 사내가 들어섰다. 그리고 한동안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먼저 말문을 땐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다. 「.....타이라」 사내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고 이상한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한 소년이 벌떡 침대위에서 일어났다. 「아....... 안 그래도 이 공기. 숨쉴 때마다 죽을 것만 같은데..요. 그리고 제 이름은 타이라가 아닌데요.」 늘 입에 달고 있던 존댓말이 아니더라도 들어선 사내에게는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나왔다. 그리고 사내가 다가와 잡고 있는 자신의 머리칼은 자신도 싫어하는 색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머리칼은 진짜인가?」 「에에~ 그럼 가짜도 있어요?」 「어디서 왔지?」 「아........ 우크란에서 왔어요. 그.. 그보다도.. 여기 공기가 ..........」 「하하하!」 사내의 웃음소리에 소년이 놀라 눈동자가 커졌다. 「제법 그럴싸한 가짜를 데려왔군. 마음에 들어. 카이사르라고 했던가? 쿠쿡..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군.」 「아흑...........」 잡혀진 손목이 아파 소년이 울음을 삼켰다. 「숨쉬기 편하게 해주마. 후훗...」 사내의 웃음이 귓가에 들려오고 입혀진 옷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하자 소년이 드디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줄 곳 계속 팔려오면서도 거칠지 않게 대해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자신의 머리칼의 신기한 색 때문이었고 그에 따른 인생도 매번 꼬여갔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이제 반라의 몸에 다가오는 사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제껏 만난 주인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불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식사시간 이었다. 저 짧은 고수머리의 사내가 소리를 지르지만 않았다면. 최초 자신이 방 밖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레스터에게 갈 곳이 없다는 점. 또한 황제가 특별히 그의 거처를 옮겨준 점. 그리고 사내의 서글서글한 성격이 풍기는 이미지. 등등은 레스터에게 뜻하지 않은 자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날따라 매우 많은 사람이 식당에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늘이 내려준 이 자연환경 속을 거닐 수 있는 자유를 감사하고 싶었다. 「웃기지마 헤론. 그 말도 안 되는 논리는 듣고 싶지 않아!」 사내가 커다랗게 지르는 고함소리에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사내는 얼굴을 붉힌 체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옆에 헤론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뒤따라 나가는 모습에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런 싸움을 하는지에 대한 궁금함보다는 모처럼 가진 외부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조금 짜증이 났다. 오늘따라 많은 사람이 식당에 있다는 사실도 레스터에게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항상 아무도 없는 시간을 찾아오려고 했지만 이제껏 감옥 안에 있던 자신이 겨우 얻은 자유는 공간의 허락이었지 무한한 시간의 허락이 아닌지라 레스터는 빨리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감시자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결국 얼마 먹지 못한 식사를 버려두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다른 때와 같이 옆에는 감시자 격인 시종이 붙어있었지만 그는 이제 제법 말을 나눌 만큼 친근한 존재였기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음.. 당분간 식사를 방에서 하면 어떨까요?」 배려하듯 시종이 말을 건냈다. 고마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항상 울안에 갇힌 짐승처럼 사육되는 느낌을 버리기 위해서라도 유일하게 갈수 있는 식당의 길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 그것보다는 조금 늦게 오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럼 그리하도록 일러두겠습니다.」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레스터는 방문 앞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넓지만 황량한 방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그 방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투명하고 아름다운 날씨 때문이라고 자조하듯 말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매우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날따라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아이마냥 신기한 색으로 물드는 하늘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리고 몹시 가파르게 뛰었다.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순간.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참을 수 없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눈알이 뿌옇게 흐려져 투명하게 보이던 시야는 이내 또르르 흐르는 눈물에 다시금 선명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별채로 지어진 궁과 또 다른 궁 사이에 나아있는 풀밭의 길 위에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 끼어있는 한 사내의 모습에 도망치듯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섰다. 착각이라고 잘못 본 것이라고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면서 레스터는 숨을 들이마셨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다시 심호흡을 해보아도 진정되지 않는 심장의 두근거림에 레스터는 주저앉듯 침대위에 쓰러졌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두 번 들려오고 이어 들어온 사내는 다행히도 황제가 친히 붙여준 시종이었다. 「하아...」 다행이다. 라고 말할 뻔했다. 그 들어서는 사람 뒤에 그만 아니었다면.... 갈색의 그을른 피부에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만 아니었다면. 금색의 악마 side story -1- 「어이~ 어이~ 오토!」 그들을 찾기 위해 거의 2개월 가까이의 시간을 소비했다는 것 자체로 지금 열이 받은 오토 칼스타인은 한시바삐 그 무리들이 거주하는 비하린 마을로 가야만했다. 그러기에 거추장스러운 하인들도 무작정 말에 오르는 자신을 말리는 친구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켜. 바쁘다구. 이렇게 우물쭈물 하는 동안 또 사라질지도 몰라.」 「에에? 그렇게나 그들이 보고 싶었다면 진작 말해줄 것을.. 쯧. 하긴 소문이 자자하긴 하지. 그래도 언제부터 그 공연에 열을 올린거야?」 입가에 웃음을 띠우며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에 오토는 짜증을 담아 톡쏘듯 내뱉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말을 달리면서도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심정이 솟아나와 혈압이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마음을 추슬러 말을 달리는 동안 바람에 이는 뿌연 모래먼지가 눈을 어지럽혔다. 전 세이카령이었던 여신의 강 하부이자 우크란과의 접점지대에 위치한 비하린은 여신의 강에서 부는 바람과 우크란의 초록 기운의 영향으로 알맞은 온도를 유지했다. 그로인해 사람들의 인구유동이 잦고 삶이 풍족하였다. 대륙의 후반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전쟁의 영향이 덜미치는 곳이어서인지 몰라도 세이카의 주민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제 사라진 국명을 말하는 것은 금지가 되었지만 오토 칼스타인은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자신의 집은 그 위치가 원래 우크란의 중부였고 친부인 귀족 아버지의 영향으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해 본적이 없었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큰 비하린으로 들어선 오토는 비하린 입구를 지키는 병사를 바라보고 품안에서 동전을 꺼내들었다. 외부로부터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며 들고 있던 검을 쓰다듬던 사내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동전에 놀라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곳에 머무는 집시 무리가 있을텐데 어디에 있지?」 「음.. 공연은 하지 않을텐데요. 나리. 저 변두리 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더 말하려던 병사는 황급히 사라지는 사내의 뒷모습에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모처럼 생긴 동전으로 그날 술 한잔만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병사의 말을 참고하여 말을 달린 오토는 두시진 뒤에 병사가 말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번잡한 시내와는 달리 그곳은 매우 한적하고 고요해보였고 간간히 움직이는 사람이 보였을 뿐이었다. 원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오토는 자신의 말에 채찍을 가해 좀더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자 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나타자기 시작했다. 비하린의 서쪽 끝 그곳에서 오토는 다섯 대의 마차와 제법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긴 시간 그들을 찾아 우크란을 거쳐 행적을 쫓는 동안 지쳐버린 마음과 열기가 이제야 겨우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말에서 내려 임시로 세워진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밖의 내리 쬐는 태양의 빛이 전혀 스며들지 않는 것처럼 막사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다. 들어선 오토가 말 붙일 곳 없이 두리번거리자 오른편에서 터번을 두른 여자가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라투야를 불러주시오.」 「마마는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공연 때문이시라면 저희는 이제 비하린을 떠나야 합니다.」 「젠장.. 기다리겠소.」 두꺼운 가죽이 깔려있는 공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사내를 터번을 두른 여자는 매우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총총히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막사라고 명하기에는 너무 큰 그 안의 공간에 오토는 쉴새없이 눈을 굴렸다. 장작 2개월이었다. 하루 이틀정도 더 못 기다릴 것도 없었다. 온 신경을 쓰고 달려와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찾고 나니 풀어진 긴장 때문인지 몰라도 좋음이 쏟아질 정도로 나른하다고 생각했을 때 처음 말을 건낸 여인이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모든 사람들의 복장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해했다. 둘러싸인 옷가지들 속에 들어앉은 사람들의 모습은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막사를 젖히고 나가서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을 때 여인은 건물의 한편에 달린 문안으로 들어갔다. 쫓아오라는 말도 그렇다고 기다리라는 말도 없어서 오토는 그냥 앞서는 여인을 따라가기로 하였다. 건물의 복도 끝 방안에서 머리를 숙이고 안에다 무어라고 고한 그녀는 방문을 열어서 사내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비켜섰다. 어색함에 얼굴이 굳어진 오토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나이가 매우 많은 여인이 역시나 덥지도 않은지 어두운 방안에서 옷을 둘둘 싸매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았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흠.. 꽤 멀군.」 답변대신 어색해진 오토가 거리에 대해 짧은 소견을 말할 때 비로소 방안 어두운 한 곳에 또 다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중년의 여인은 들어선 손님이 놀라는 모습에 살풋 웃고는 인기척도 없이 앉아있던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가있거라. 따로 부르마.」 대답도 없이 몸을 일으킨 사람은 그 길로 유유히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리고 중년의 여인은 자신을 찾은 사내에게 용건을 묻기 시작했다. 「저를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부탁이 있소.」 「흠.. 어떤 부탁이십니까?」 「사람을 찾아주시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젠장....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저희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기는 합니다만 특정인의 부탁을 받고 사람을 찾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300다니르」 오토는 커다랗게 소리쳤다.그것은 서민들의 집 한 체 값을 훨씬 넘었고 웬만한 사람들은 일년을 벌어도 모자란 돈이었다. 「죄송하지만 나리. 공연을 하여도 그 돈은 벌기 힘들지만 나리께서 찾지 못한 분을 저희가 어찌 찾겠습니까?」 「후후. 여기까지 온 내 성의를 무시하지 말기를 바라네. 돈이 부족하다면 더 주지.」 「거절합니다.」 중년의 여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건방지군. 집시로 가장한 패잔병들의 집합소 주제에 겁도 없이!」 오토는 마지막 카드로 배짱을 부리기 시작했다. 소문의 소문 그 속으로 자신이 발을 내 디딜 정도로 다급했고 자신이 부르는 큰 돈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마지막 카드가 거절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에 목을 스치는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짓이냐!」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검 날이 목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오토는 기겁하듯 놀랐지만 그렇다고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이곳으로 들어온 것을 아무도 모르지요? 나리? 그 아이는 제 명령이면 나리의 목도 밸 수 있습니다. 시체 처리는 간단합니다. 이런 변두리에서는.」 「좋아. 죽여라! 날 죽여도 좋으니 대신 그 아이를 찾아줘.」 오토는 다급하게 외쳤다. 정말 죽는다 해도 생사도 모르게 사라진 소년을 찾고 싶었다. 자신이 찾아야만 했다. 다른 이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들일 수 없었다. 「호호홋.. 그 말씀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습니다. 나리가 찾는 분이 누구신지요?」 「소년이요. 18세 정도의. 여행간 사이에 내 아버지가 어딘가에 팔아넘겼소. 그 특이한 외모 때문에 절대로 찾기는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젠장. 그 행방이 묘연해. 도대체 찾을 수가 없어. 더구나 내놓고 찾을 만큼 정세가 좋지도 못하고........ 원한다면 내가 동행할 수도 있소. 도와주시오. 부탁이오.」 오토의 말속에 녹아있는 비통한 심정은 마마에게도 충분히 전달된 듯 했다. 그녀의 눈매가 처음과는 달리 부드러워졌고 이미 목을 스치던 검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뒤에 있는 그 아이를 데려가십시오. 도움이 되실 겁니다. 300다니르라는 큰 돈은, 아시겠지만 패잔병들을 위해 쓰여 질것입니다. 나리.」 「한명만? 그것도 어린 여자애를? 무슨 소리! 내 하인들을 풀어도 찾을 수 없었어. 날 비웃는 거요?」 「아니요. 나리. 충분합니다. 원하시는 결과를 얻지 못하신다면 300다니르는 돌려드리지요. 그럼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절대 쓸때없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니 입 조심을 시킬 필요가 없으실 것입니다. 나리.」 그 말속에 녹아있는 서늘한 기에 오토는 일어났다. 이곳의 모든 이들은 그림자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마마라고 불리는 중년의 여인은 피곤한 듯 사내가 나가는 뒤로 방문을 닫아버렸다. 얼결에 옆에선 사람과 동행하게 된 오토는 화가 치밀어 올라 자신의 옆에 선 사람을 노려보았다. 온 몸을 감고 있는 옷 아래 어깨선을 보아도 도대체 무엇을 도와줄 수 있다는 지 믿을 수가 없었다. 괜히 돈만 날리는 것은 아닌지 쓸때없이 소문만 믿고 2개월의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비하린의 중심부 오아시스 근처에 거처를 잡고 혹시나 변심을 할 경우를 대비해 여관에 방을 잡은 오토는 반나절이 지나도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는 사람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그리고 밤하늘에 별이 빛날 때까지 걸쳐진 옷을 벗지도 않고 식사를 하지도 않은 채 방 한편에 놓인 의자에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흠.. 식사를 시켰다. 그렇게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어떻게 하려는 게냐?」 「.........」 「젠장. 그 마마라는 여자. 혹시 벙어리를 보내준 거 아냐? 도대체가 어떻게 된 거야!」 사내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고 혼자 열이 나는지 주먹을 꼭 쥐고 방방 뛰기 시작하자 그런 사내를 바라보던 반대편의 사람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식사는 됐습니다. 마무리 하지 못한 일을 끝내고 오겠습니다.」 그러라고 허락의 말을 구하기도 전에 일어선 사람은 벙어리는 물론 아니었으며 자신에게 향한 낭랑한 목소리에 오토는 선체로 굳었다. 홀연히 사라지는 정체모를 여자가 나간 뒤에 한참 동안을 식사를 들고 온 여관주인이 말을 시킬 때까지 오토는 멍하니 서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여자가 나간 뒤 오토는 오지 않는 잠을 자려고 뒤척였다. 물론 한 방에서 잘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방이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여자를 생각하다 역시 자신과의 잠자리가 불편한가 보다 생각했고 이렇게 오래 가게 된다면 방을 따로 잡아야겠다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다 한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꽤 단잠을 잔 것인지 아니면 소리 없이 들어온 것인지 몰라도 자신의 앞에 정체모를 사람의 모습에 오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침대를 두고도 그 옆에 기대듯 쓰러져 앉아있는 모습에 오토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져 욕을 하였다. 있는 힘껏 궁시렁거리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입은 옷 그대로 침대에 기대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여자를 보고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일어난 오토는 기대어 앉은 여인을 향해 살며시 다가갔다. 그저 단지 불편하게 기댄 것을 안아 침대에 올려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건드리지마!」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졌고 그리고 나직이 한숨을 쉰 여자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위에 걸터앉았다. 「이 시간까지 무엇을 하고 온 거냐? 건방진 말투는 참을 수 없어.」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으로 보내드리지요.」 「훗.. 오만하군. 좋아. 아무라도 그 아이만 찾아주면 관여치 않겠다.」 「누구를 찾는지 알려주십시오.」 「소년이라고 말했잖아.」 「그것만으로는 찾기 힘듭니다. 이름, 외모 그리고 알고 있는 것 모두를 알려주십시오.」 이미 잠들기에는 이제 틀렸다고 생각한 오토가 맞은편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았고 그리고 자조하듯 웃었다. 그리고 회상하듯 고개를 약간 기울여 생각을 가다듬었다. 「노예시장에서 사왔다. 내가 그를 사왔을 때는 아무 기억도 없는 백지 상태였어. 이름도 없어서 지어줬지. 처음 보는 색이었다. 금색의 머리칼. 그래 석양이 질 때 물가에 어리는 황금의 색이랑 같았어. 제길.. 아버지가 팔아버렸다. 내가 여행간 사이에. 도대체 어디에 팔았는지 알 수가 없어. 하인들조차도 다 모른다는군.......」 「금색의 머리?」 「그래. 신기하지?」 「............신기하군요.」 「그건 그렇고 넌 이름이 뭐냐? 그 옷은 입고 입기에는 더울텐데..」 「괜찮습니다.」 이름은? 이라고 다시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별로 말수가 없다고 오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마마라는 여자의 말마따나 절대 헛소리로 소문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건 사실인게 분명했다. 한동안 자신의 앞에 소리도 없이 앉아있는 사람을 노려보다 오토는 포기하듯 침대에 누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굉장히 늦은 아침이었다는 사실과 역시 맞은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여관주인에게 아침을 준비하라 이르고 세안을 마쳤을 때쯤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말씀하신 몇 가지 사실로 두 가지를 찾았습니다.」 「벌써?」 「그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갔을법한 행적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좋아하시기에는 이릅니다.」 젠장.. 어린계집이 생각보다 영리하다는 것에 오토는 화를 누르듯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노예상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아직도 세르판에서는 금발의 노예를 찾는다는군요. 그래서 최근 팔려온 소년들 중에 금색의 머리를 한 자들은 비싼 값에 수도로 팔려갔다고 합니다.」 「세르판에?」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신 소년처럼 진짜 금색의 머리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임을 하더군요. 역시 하급 노예상인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남은 곳이라고는 귀족들일 것입니다.」 「귀족들간의 매매?」 「예. 비공식적이기는 하겠지만 일리는 있는 말입니다. 금색의 머리칼이 진짜 있다면 그 희귀성을 보건데 노예시장으로는 나오지 않을테니까요.」 「우아~!」 「.........!??」 「생각보다 말이 많구나!」 「......그런 멍청한 말은 그 소년을 찾거든 소년에게나 많이 해주시지요.」 젠장! 젠장! 오토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여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알았어야 하는데 사내를 후리고도 남을 여우같은 계집이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이제 그 터번아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관례상 터번을 벗길 수 없음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찌되었던 여자의 말대로 세르판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르판으로 가보면 분명 자신의 소중한 소년을 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희망에 오토는 기분이 들떠 비하린에 깔리는 병사들의 무리에 눈을 둘 수가 없었다. 여관주인에게 값을 치루고 나올 때에 오토는 비하린에 거주하는 귀족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나 귀동냥으로 주어 듣는 것이 생긴다면 그 어린 계집에게 우쭐거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죽었다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도록 싫어했지만 가끔 이름을 대면 다 통용이 되는지라 종종 그 이름을 사용하던 오토는 들어선 으리으리한 저택의 집사에게서 비통한 대답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다. 「네. 어젯밤.. 흐흑.. 주인어른께서..」 「에에.. 그럴 수가!」 「지금 병사들을 풀어 범인을 찾고 있습니다.」 저택은 죽은 주인으로 인해 초상집이 되어있었다. 더 어떻게 말을 붙일 수도 없는 오토가 돌아 나오자 저택의 앞에 기다리던 사람이 눈에 띄었다. 「젠장... 어제 죽었다는군. 허! 기가 막혀서 원..」 투덜거리듯 말하는 자신의 말에도 별 반응이 없는 여자는 반보 앞서 걸음을 옮겼다. 뒤태가 매우 가늘고 키는 제법 호리호리하게 컸다. 가냘퍼 보이는 그 겉모양과는 반대로 알 수 없는 냉기가 있어 오토는 섣불리 그 옆에 나란히 서기가 힘들었다. 아무 말 없이 비하린의 중심부로 터덜터덜 그녀를 따라 걸었다. 갑자기 눈에 띄게 많아진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중심부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를 지나치던 오토의 귓가에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지나는 길이 좁은 골목길이라 서민들이 많은 곳이라는 것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 중심부까지 오게 된 사내는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중심부로 가는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에 놀랐다. 떠도는 집시주제에 제법 길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키킥.. 잘 죽었지 뭐야. 안 그래도 전쟁 때문에 먹고살 것도 없는데 세금만 왕창 뜯더니.> <쉬쉬.. 누가 듣겠다. 잡혀가면 어쩌려구.> <키킥~. 천벌을 받지 뭐... 끔찍하게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오~> 그들은 농담하듯 서로 키킥 거리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 사이로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감상을 듣는 것은 곱게 자란 그로서는 상상치 못할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거의 넋이 나가버린 오토는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탁자에 올려놓은 술을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섭군....」 콸콸.. 병을 쥔 손이 흔들렸고 그리고 잔에 따라지는 술의 일부가 탁자로 흘렀다. 한참을 마시다가 거의 다 비어져 버린 술병을 들어 탈탈 털던 오토는 여관주인을 불렀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에게 술을 주문하자 여관주인은 싱글거리는 웃음으로 새로운 병을 들고 나타났다. 「이런~ 손님. 속상하신 일이 있으셔도 천천히 드십시오. 생각보다 독하답니다.」 「하하하. 그래? 뭐... 독하다고 해도 죽지는 않겠지. 무서운 세상이야.」 「그러게요. 그렇게 피한방울 안 흘리는 시체라니...」 「딸꾹~.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게요..」 말을 하던 여관주인은 속삭이는 목소리로 귓가에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행복한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죽는답니다. 심장에 꽂힌 단도를 빼기 전에는 피도 안 흘린다는군요. 으아.. 그래서 말인데요. 악마가 나타났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악마?」 「예. 악마가 아니고서야 난공불락의 저택에 사는 귀족들만 다 죽을 수가 있을까요? 병사들도 많다는데.. 그 방안까지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더구나 이것은 소문으로 도는 이야기인데.. 모두 쉬쉬하지만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아~ 무서운 일이예요.」 딸꾹..딸꾹.. 오토의 취기가 극에 달하자 여관주인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떴다. 편해 보이는 옷차림의 사내에게 너무 많이 떠든 것을 후회하며 돌아섰다.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사내의 쓰러진 뒷목에 걸린 목걸이가 고가라는 사실에 씁쓸해진 여관주인은 황급히 주방으로 사라졌다. 「휴우....」 딱~ 하고 손가락을 부딪치는 소리에 두 명의 사내가 여관으로 들어섰다. 「윗방으로 옮겨. 이런 뒤치다꺼리는 안한다고 마마에게 말해.」 「예.」 대답을 마친 사내 둘이 술에 뻗은 사내를 들쳐 매고 사라졌다. 인상을 찌푸린 눈동자가 불빛에 반사되어 파랗게 빛났다. 그리고 그녀는 걸쳐진 옷을 단단히 여미고 밖으로 향한 문으로 걸어갔다. 3. 시종은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오랫동안 섬김을 일상으로 삼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는지도 몰랐다. 뒤돌아 나가는 그를 잡고 싶은 레디미온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 한번 움직였고 그리고 스르륵 떨어졌다. 달그락.. 손에 잡힌 찻잔이 탁상에 부딪혀 소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분주히 손을 움직이던 레디미온의 등 뒤로 사내가 다가왔다. 「됐어. 레디미온.」 「하.... 오..오랜만이야. 레스터. 이런 내 정신 좀 봐. 차를 따른다는게.....」 주르륵.. 탁자위로 쏟아진 담갈색의 액체가 책상위에서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둥근 탁자위에 어쩔 줄 모르는 하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렌. 그만 날 봐.」 「아... 다시 갖다 달라고 할....... 흑.」  와락~ 하고 안겨버린 품속에서 작은 사내는 발버둥쳤다. 레디미온의 떨리는 어깨를 다잡으며 레스터는 더욱 힘을 주어 그 작은 몸을 받아내었다. 「거짓말쟁이..........나쁜 놈.」 「그래. 미안해. 렌. 널 지켜주지 못했다.」 「나쁜 놈............. 왜 이제야 나타나서.......흐흑.....」 「미안. 렌.」 레스터는 손을 들어 작은 사내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이 레스터의 마음속을 아프게 했다. 「보고 싶었어.」 「거짓말.」 레스터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레디미온은 투정을 부리듯 대답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이제는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입술을 깨물며 강인한척 하려는 사내도 이국의 땅에 포로로 잡혀있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만나게 해준 여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어쩌면 여신은 새로운 운명에 앞서 그를 보내셨는지도 몰랐다. 일생에 한번 자신의 소원. 그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 분명했다. 우연도 아닌 그렇다고 필연일수도 없는 그와의 만남에서 레스터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숨을 골랐다. 이제 그는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자신을 떠나야 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남은 한조각의 마음도 미련도 버릴 수가 있다. 그를 봤으니 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수는 없다. 그동안 수없이 머리를 어지럽히던 감정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아픈 배신감을 잊어버리지도 못하면서 그를 보고 싶어 했고 다시 만나고 싶어 했고 그리워했으니까. 그를 떠올려도 미워할 마음은 없으니까. 「나와함께 우크란으로 가자.」 레디미온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레스터는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가 떠난 뒤로 몇 년 만인지 몰랐다. 그는 어리고 약한 렌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변화된 감정을 추스르며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차가운 말투. 무색의 표정. 감정을 닫은 사내를 바라보는 레스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잠시간 흔들렸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편안한 표정으로 변하였다. 「왜?」 「세르판 황제와의 약조입니다. 여신께 감사드려야겠군요. 마지막으로 당신을 볼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건강해보여서 다행입니다. 다음번에 세르판에 오시더라도 이제 당신을 보지 않을겁니다. 죄송하지만 독서시간입니다. 나가주세요.」 레스터는 손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 차가운 눈빛이 흔들리기를 바랐다. 왜 떠났는지 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지 아니 그보다 다시 만나게 된 지금에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지 그런 이유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신께서 다시 레디미온을 돌려준다면 마지막 여력으로 그를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을 뿐이었다. 그래. 다시 만나기만 하면 다시는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거부한다. 온몸으로. 저 쓰러질 것 같은 작은 몸으로 가시를 내밀어 방어벽을 치고 자신을 바라본다. 「황제에게 진언해서 널 우크란으로 데려가겠어.」 「전 이곳에서 행복합니다. 무사히 우크란으로 돌아가시고 싶으시다면 그냥 돌아가세요.」 하아... 하고 커다란 사내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확인하고 다시 본국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레스터는 커다란 방안을 둘러보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사하다. 그리고 눈앞에 살아있다. 또한 그가 머무는 거처를 보건대 황제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황제와 담판을 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를 데려가야만 했다. 반드시! 「불허한다.」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황제의 날카로운 눈은 변하지 않았다. 레디미온을 우크란으로 데려가기 위한 간절한 사연을 말할 수는 없었고 본디 그가 우크란 귀족의 아들이라는 것 또한 황제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분명하였기에 더 이상 요청할 수 없었다. 단지 아무것에도 흥미 없어 하는 그의 얼굴에 약간의 호기어린 표정이 스쳐지나갔고 그리고 그 뒤는 침묵이었다. 「네. 폐하. 그러면 다음번에 뵙겠습니다. 이제 저희 사절단은 오후에 본국으로 출발합니다. 환대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훗...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군.」 「..........!」 고개를 숙인채로 황제가 하는 말을 듣던 레스터의 머리에 번쩍하고 불이 나는듯했다. 황제는 자신의 눈빛을 꽤 뚫어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다는 것이 레스터로서는 기분이 나쁨과 동시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별궁에 있는 그는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곧잘 대답하더군.」 「무..무슨.」 「세이카의 책사였다. 그를 살려두는 이유가 궁금한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세르판의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숙이고 있던 머리에 뒷덜미가 저려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끔 그는 엄청난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황제는 책사를 살려둘 사람이 아니다. 그것도 전쟁을 오래도록 이끈 세이카의 머리라면. 아니 그것보다도 자신의 렌이 그런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던가! 「후훗.... 별궁의 사내가 그대의 정인인가? 그 놀라는 표정은 어울리지 않는군. 쿡.. 어떻게 보면 그대는 나와도 비슷해. 그 오만한 표정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지? 마음에도 없는 충성심은 보일필요가 없어. 겁도 없이 내게 도전하는 그 행동을 높이 사주지.」 놀라서 바라보는 사내를 황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황제의 말은 다 알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뛰고 날아도 자신을 넘을 수 없다는 자신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머릿속을 혼란하게 하였고 오직 그가 말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만 가슴속에 남았다. 순간 둘만 있는 공간처럼 조용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가운데 황제가 나직이 속삭였다. 「부탁을 하겠다.」 부탁이라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명령이었다. 황제가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자신의 정인은 황제에게도 중요한 인물인 것은 분명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세이카의 책사임에도 살려두는 것이 분명하겠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에도 굴하지 않고 또다시 그 인질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부탁이라는 허울의 명령을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후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하려는 말은 모든 것을 묵과할 수 있는 중대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저 정점에 선 사내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정도면. 아니면 그만큼 절실한 무엇인가가 그 배후에 있거나 혹은 그 이상이거나. 레스터 카이사르는 황금의 궁전을 뒤로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담긴 서늘한 어조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박혀 숨을 쉴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쿡쿡 찔러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 훗.. 아무래도 좋아. 그것이 원하는 바라면.. ’ 레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미래를 위해 한발 양보하지. ’ 우크란에서 온 사절단이 세르판의 궁성을 떠났다. 언제가 될지 모를 혹은 다시 안 올지 모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래도 한동안 즐거웠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태양의 빛이 땅에 내리고 푸르른 대지가 물을 기다리며 바람에 흩날리는 여름이었다. *----------*----------* 「도저히 못 참겠다!」 사내의 목소리에 마부는 당황했다. 자신들의 이동에 외부 인을 태워본 적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마다 짜증을 부리는 그에게 반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어느 것이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차의 뒤편에서 사지를 뻗고 누워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사내는 그들에게 당황스러움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어이~ 이봐! 도대체 왜 이런 길로 다니는 거야! 좋아! 다 좋다구! 하지만 좀 쉬었다 가자고 더워죽겠어.」  사내의 외침에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즐겁게 놀러 다니는 여행길도 아닌 것을 편히 자란 그 여유로움으로 투정을 부리는 그를 보며 마차안의 무리들은 한숨을 삼켰다. 왜 라투야가 저 귀족 나리를 자신들의 마차 안에 속하게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세워라.」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자 오토는 뛸 듯이 기뻤다. 불편하게 이런 식으로 여행해본 적이 없는지라 온몸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그리고 마차 문이 열리면서 역시 긴 천으로 둘둘 감싼 여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리십시오.」 얼음장같이 서늘한 목소리였다. 「뭐...뭐야. 다 온 거야?」 어눌하게 대답하면서 마차 밖으로 몸을 내린 오토는 단박에 목덜미에 스치는 긴 장검에 놀라 소리를 쳤다. 「무슨짓이냐. 너희들은 내가 고용....」「시끄럽다.」 「감히! 라투야를 데려와!」 「훗.. 웃기는군. 당신을 편히 세르판으로 데려가라는 분부만 없었다면 죽여버렸을거다. 입만 살은 귀족나리.」 「뭣이?」 「눈이 있으면 보시지? 저 뙤약볕에 마차를 모는 마부는 7일째 내리쬐는 볕에 허덕이고 있어. 당신만 아니었으면 끝났을 고행도 이 넓은 대로를 타느라 인원이 늘었지. 그러고도 느끼는 바가 없으신가?」 「훗.. 좋다. 계집아. 300다니르를 먹고도 달랑 계집하나 붙여준 너희 마마라는 여자는 그 뒤 코빼기도 안 비췄다. 네가 뭘 할 수 있지? 세르판으로 가자는 그 말에도 넌 반대만 했어. 너 아닌 다른 사람을 붙여달라고 했지 너를 포함한 일행을 달라고 한적 없다. 왜지? 그 일을 할 사람이 하나도 없냐?」 「내가 뭘 할 수 있나 보여줘야겠군.」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휘리리릭~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긴 장검이 몸을 스쳤다. 그 순간 투툭.. 하고 걸쳐진 상체의 옷가지들이 너덜너덜 떨어져 나갔고 놀람을 표시할 순간도 없이 그 긴 검의 끝은 다시 목을 겨눴다. 「아아~ 이런 나리. 계집이 휘두르는 검조차 피하지 못하시다니. 쯧쯧. 이래서는 큰소리 친 입장이 난처하시겠군요.」 「이익!!」 오토가 이를 악물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그 때부터 그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마차에 같이 앉은 사내들은 키득키득 웃음을 삼켰다. 「하하. 너무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누..누가 억울해 한단 말이냣!」 「하하.. ‘라’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검술이 뛰어납니다. 저도 당해봐서 아는데.. 처음에는 엄청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도 세이... 아무튼 예전에는 검을 잘 다룬다고 명성이 자자했는데 말입니다.」 「라?」 「아앗. 이름도 안 알려주던가요?」 「이름은커녕 지금까지 들은 말은 몇 마디 되지도 않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본국에 요청해서 직접 가보는 건데.」 「하하하.. 미움을 받고 계시는군요. 하긴 우크란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원래 귀족을 매우 싫어합니다. 마마는 좀 나은 편입니다. 마마는 이래도저래도 도움을 주는 사람은 다 좋아하지만 라는 굉장한 귀족혐오증이죠.」 「귀족혐오증?」 「아아.. 죄송합니다. 너무 말이 많아졌군요. 귀가 밝은 녀석이라 히익~~~~~~~~」 푸욱! 하고 마차 안으로 찔러 들어오는 검은 말을 하던 사내의 목 근처까지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그리고 쑤욱~하고 처음 들어왔던 그 모양처럼 사라졌다. 오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말을 하던 사내도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솜씨는 생각보다 월등한 것 같고 그 칼날의 매서움처럼 성격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간부터 오토는 조용하게 그들을 따랐다. 두 대의 마차에는 라투야의 무리 다섯 명과 여자 그리고 자신이 전부였다. 「혹시 통행증이 있나?」 오토는 국경이 다가오자 근심을 담아 물었다. 물론 처음 자신에게 말을 하던 사내에게 물었지만 눈은 정체모를 여인에게 향해있었다. 쓰윽.. 눈을 한번 바라보고 고개를 돌린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옆에선 사내에게 조용하게 무엇인가를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말수가 무척 적고 그리고 여러 명의 사내들 무리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혼자 있는 그녀의 당당함도 놀라울 뿐이었다. 「아! 저희들에게는 통행증이 따로 없지만 나리께서 통행증을 보여주셔도 좋습니다.」 「내가?」 「가지고 계신 목걸이면 될 것이라고 라가 그러더군요.」 뜨악한 표정으로 여자가 사라지 방향을 바라본 오토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빼내었다. 가문의 문양을 적어놓은 목걸이가 무슨 용도인지 알고 있는 그녀의 정체가 갈수록 의심이 갈뿐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아... 국경을 지나기 전에 잠시 들렸다 가볼 곳이 있습니다. 나리께서도 필요한 물품이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사다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가지.」 오토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에 위치한 곳이라면 우크란의 마지막 땅이었고 그곳에 자신의 친우가 살고 있었다. 처음 자신이 집시의 무리를 찾기 위해 들렀던 곳. 그 곳에 묵을 수가 있다. 그 생각에 오토는 단박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만 있으면 따뜻한 물과 음식 그리고 포근한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몰랐다.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끼며 오토는 마차의 한편에 누웠다. 마차는 쉼 없이 달렸다. 한참 후에 오토의 눈 저편으로 보이는 커다란 대저택이 붉고 찬란한 노을빛에 물들 때 비로소 오토는 피곤한 몸을 달래며 웃을 수가 있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저택의 정문에서 기다리는 집사에게 단박에 달려갔다. 흰머리가 군데군데 섞여있는 지긋한 나이의 남자는 갑자기 많아진 손님을 맞느라 정신이 없는듯했다. 그래도 귀족과 평민 그리고 하인의 위치는 달랐다. 오토가 자연스럽게 집사에게 언질을 주었고 그들의 마차는 저택의 마부 손에 사라졌고 라투야의 무리들은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안내되어졌다. 「아아~~~~~~~· 살 것 같다!」 둥그런 의자에 기대어 어깨를 늘어트리고 거의 쓰러질 듯 한숨을 내쉬는 오토를 보고 사내가 웃었다. 그렇게 피곤해 하면서 돌아다니기는 왜 이리 좋아하느냐고 핀잔을 주고는 탁자위에 술잔을 내밀었다. 「하하하. 자네 드디어 찾았군. 그런데 왜 인원이 저거밖에 안되나?」 「후훗. 그러게 그 무리들은 상당히 바쁘더군. 한가한 몇 명만 데려가는거야.」 「그래? 경께서 그만 좀 돌아다니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 같더군. 이제 그만 안착하지 그래? 아직도 노예시장이나 잡배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니겠지?」 「이익!! 자네한테 그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하하하. 알았네. 결국 경께서는 자신이 키운 귀한 아들한테 이리 당하시는 것이니 별 할말도 없으시겠군. 예전부터 자네 말이라면 뭐든 다 해주셨으니. 그것보다 이왕 데려온 김에 공연 좀 해보라고 하지? 돈도 꽤 들었지 않나?」 돈은 들었지만 그들의 공연은 본적이 없었다. 목적은 그게 아니었지만 친우가 보기에는 공연도 보지 않고서 그들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수도 있었다. 「아! 그렇군. 그래 멋있지.」 「하하. 친구 덕에 오늘 좋은 구경하게 생겼군.」 「잠깐만! 그들이 어디에 있지? 잠시 다녀오겠네.」 「아마도 하인들이 기거하는 쪽에 있겠지. 불러오면 될 것을........이..이보게!」 말도 끝나기 전에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면서 사내는 술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미치겠군.」 아무거나 준비해라! 라고 말만 하고 사라진 사내를 생각하면서 라투야의 일행은 각자 여독을 풀던 몸을 일으켜 탁자에 모여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냐. 라?」 「오늘은 안돼. 해야 할일이 있어. 간단한 것으로 하자. 안하고는 무사하지 못하겠지. 아무래도 여긴 귀족나리의 저택이니까.」 「그럼 나가자. 마을로 나가면 묵을 곳은 충분해.」 사내의 나가자는 말에 아무도 호응이 없었다. 모두 지친 표정이었고 힘들었다. 「휴우...... 알았다. 점술로 해. 이건 그냥 시간 끌기야. 여기 공연할만한 능력 있는 사람도 없잖아. 웃기는군. 이런 일은 생각도 안했는데. 입만 살은 귀족 녀석.」 「정말이냐? 할거야?」 「그래. 하더라도 씻고서 하자. 피곤해.」 그리고 모든 이들이 쓰러지듯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고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들은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항상 어딘가로 사라졌고 그리고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언제나 필요할 때는 돌아와 있었다. 언제나 그 옆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길고 긴 검은색의 드레스. 몇 개만 남기고 다 꺼버린 횃불. 그리고 은은한 향기. 가장 구석에 붉은 빛을 등지고 이글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여인이 노래를 하자 오토는 그 묘한 광경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친구는 이미 그녀의 앞에서 몇 개의 종이조각을 들고 미소 짓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오토는 일행 중 한명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그냥 점을 보는 겁니다. 저게 상당히 잘 맞나봅니다. 전 잘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유명하죠. 언제 시간이 되면 그녀의 검무도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보기 힘들기는 하지만.. 하하. 한번보시면 잊지 못하실 겁니다.」 「검무를?」 「네.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리고 오토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신의 친구와 여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탁자위에 은은한 향기가 코 끗을 스쳤다. 굉장히 나른하고 그리고 어지러움이 느껴져 오토는 쉬고 싶어졌다. 그때 자신의 친우가 맞은편에서 일어나 여자의 옆에 앉았다. 저..저런 미친! 결혼할 여자도 있는 녀석이!! 헉.. 미치겠군. 「제..제길...!」 달려가려는 것을 막은 것은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내였다. 「그냥 두십시오.」 그리고 친우와 여자가 홀 밖으로 사라졌다. 검은 베일로 머리부터 얼굴의 반을 가리고 검고 긴 치마가 몸에 휘감겨 흐느적거렸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훗....... 그 얼굴이 보고 싶구나.」 「그냥 약조대로 노래만 불러드리겠습니다.」 「하하. 그 말을 믿었느냐? 그 목소리를 내는 네 얼굴을 보고 싶어.」 사내의 손이 긴 치마 속을 더듬었다. 「제가 점을 봐드렸죠? 너무 욕심을 내면 일찍 죽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나긋나긋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에 사내의 얼굴에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못 참겠다. 그 얼굴을 보여줘. 돈을 주마.」 「아...! 욕심도 많으신 분. 후후훗...」 사내의 손이 여자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검은 베일을 벗겼다. 「헉!」 가느다란 손이 사내의 입술을 살짝 어루만지고 그리고 붉게 도드라진 입술이 사내의 입술에 다가왔다. 「아름답구나!」 「감사드립니다. 후훗....... 이제 그만 주무셔야죠.」 「자........고 .....싶....지..... 않.......아.........」 다가왔던 사내의 몸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제가 보는 점은 잘 맞는답니다. 나리.」 여인이 다시 부드러운 동작으로 일어났다. 방 한편은 달빛이 비치는 창이 있었지만 너무 어두웠다. 그리고 끼이익 소리를 내며 육중한 방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리고 방안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거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커다란 방문 앞의 복도 그곳에서 오토를 발견한 여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서있던 오토는 방문을 나선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누가 너한테 이런 짓을 하라고 했지?」 「무슨말씀이신지요?」 「아무 사내에게나 몸을 팔라고 하지 않았다.」 「하하. 거만하신 귀족나리.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답니다. 당신의 친구는 다행히도 노래 한곡에 주무시더군요. 궁금하시면 들어가 보셔도 좋습니다.」 여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방문을 연 오토는 어두운 한편에 죽은 듯이 쓰러진 친구를 향해 뛰었다. 묘한 향이 방안가득 풍기고 있었다. 4. 어두운 방의 한편에 쓰러지듯 잠든 사내를 본 오토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른 숨을 내쉬며 정말 포근해 보이는 침상위에 미소를 띠고 잠든 친구를 보며 오토는 잠시나마 자신의 친구와 여자에게 이상한 상상을 품었다는 것이 몹시 창피해졌다. 안 그래도 여자의 독설에 죽을 맛인데 하나 더 보태었다는 사실에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 ‘ 젠장.. 귀신같은 여자. 속으로 엄청 비웃겠지. ’ 오토는 그길로 방문을 닫고 돌아 나왔다. 방안에 가득한 풀잎의 향기는 홀 안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다. 아니 홀에서보다 조금 더 짙은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왜 그런 향을 피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나른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길로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오토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의 하인의 부름에 눈이 뜬 오토는 머리에 지끈한 통증과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속이 울렁거리고 내디딘 바닥의 땅이 흔들리는 느낌에 머리를 부여잡고 얕은 신음을 내뱉었다. 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고 그리고 차가운 물을 가져오겠다고 말하고는 나갔다. 손을 들어 머리를 누르던 오토는 발소리도 없이 들어온 여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훗. 머리가 아프신가요?」 「아욱~ 죽을 맛이야. 술도 얼마 안마셨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아.」 「흠... 그래요? 갈증 나시죠? 자 드세요.」 의외로 상냥하게 말을 하는 모습에 오토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여자가 내미는 물잔을 받아든 오토는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목이 매우 가늘었다. 물 잔을 내미는 손목의 하얗고 투명한 피부 안으로 파란 심줄이 보였다. 순간 저 여린 손목으로 어떻게 검을 잡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오토는 여자의 날카로운 말투에 화가나버렸다. 「쯧.. 독을 타지 않았습니다. 의심 많은 나리.」 독을 타지 않았다니. 네가 말하면 진짜처럼 들린다구! 젠장. 오토는 여자의 손에서 낚아채듯 잔을 받아들었다. 그 투명한 액체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그 씁쓸한 뒷맛에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맛이 이상해!」 「흠. 미각은 정상이시군요. 정신이 맑아지실 겁니다. 숙취에는 최고로 잘 듣죠.」 여자가 나간 뒤에 오토는 침대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것저것 생각하기가 귀찮아졌다. 어찌되었던 자신이 세르판에 도착해서 잃어버린 소년을 찾을 때까지 도와준다고 했으니 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을 깨웠던 하녀가 돌아왔고 하녀가 주는 또 한잔의 물을 마신 오토는 출발을 위해 떨어지고 싶지 않은 침상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인님은 몸이 좋지 못하셔서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집사가 식당에서 주인 없이 홀로 앉아있는 오토에게 말했다. 아침식사 치고는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위의 음식을 둘러보던 오토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가 아픈건가?」 「아.. 두통이 심하시다고 하시더군요. 오후에는 괜찮으실겁니다. 종종 술을 드시면 그러셨으니까요. 걱정 마시고 식사를 하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머리가. 앗!」 「예?」 「아니다. 아니야. 그러고 보니 두통이 사라졌군.」 오토가 식사를 끝내고 떠날 차비를 했을 때 비로소 친우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굉장히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미처 그 흐트러진 옷차림을 단정히 하지도 못하고 배웅을 하는 그 모습에 오토는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쁘다는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어버린 오토는 황급히 마차에 올랐다. 정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마차가 달리는 뒤로 저택이 작게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도시의 안쪽으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에 따른 병사의 숫자도 늘어났다. 그리고 넓은 대로로 들어서는 커다란 길에 마차는 멈추었다. 「세우시오!!」 병사가 긴 창을 들어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하였고 이내 마차안의 사람들을 다 내리게 하여 그 안을 수색하였다. 본디 도시에서 사람들을 수색하는 경우가 없었던지라 오토는 당황한 심정을 누를 수가 없어 예의 그 팔팔한 성격으로 화를 내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휴란경이 돌아가셨습니다. 정확히는 살해되셔서 그 범인을 수색하는 중입니다.」 「뭐라고? 휴란경이?」 「예.」 병사는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는 말과 함께 오토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사교계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던 자였지만 그래도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로서 소문으로 도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자 기분이 몹시 불쾌해졌다. 안면은 없다지만 그는 우크란의 귀족이었다. 그리고 병사는 아무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오토의 뒤에선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병사의 눈길을 따라 뒤를 돌아보던 오토가 병사를 위해 말하였다. 「아. 이들은 내가 데리고 다니는 자들이다. 신원은 내가 책임지지.」 「예. 알겠습니다.」 병사가 길을 비켜주었고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머릿속에는 연이어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목마다 생기는 의문의 사건 등이 차례로 스쳐지나갔다. 그렇지만 한참을 생각하여도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묻고 싶은 말들이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알고 싶은 내용은 마차 안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물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의심하는 것에 대한 답변을 듣게 된다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긴 생각을 마무리 짓는 동안 마차는 바퀴의 속도를 더 빠르게 하여 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우크란의 끝. 그리고 여신의 강 하부. 그곳에서 마차의 방향이 이상한 곳으로 간다고 생각한 오토는 마차문 밖으로 커다랗게 소리쳤다. 길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 의아했다. 분명 이 길을 타고 가면 수도로 가는 대로를 타고 갈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방향으로 빠지니 애가 탔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왜 이 길로 가는거냐? 저쪽으로 가면 이헤르대로를 타고 갈수 있잖아.」 「지금같이 좋지도 않은 시국에 대로를 타고 싶지 않다는데요.」 마부가 어색한 얼굴로 답변했다. 자신이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항변하듯 답변했지만 그간 지내온 결과 여자에게 말해보았자 자신의 말에 날카롭게 대꾸할 것이 생각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기가 막혔다. 집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슬며시 화가 치솟고 있었다. 건방진 계집. 저 오만한 것을 어떻게 꺾어놓는다지? 오토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마차는 샛길의 고르지 못한 길로 들어서는 듯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누가 위인지 알려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오토가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역시나 갑작스럽게 세워진 마차의 문을 열고 여자가 나타났다. 오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화가 난 자신의 얼굴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여자는 더욱더 열을 부추기고 있었다. 「빨리 가야해! 이헤르대로로 간다.」 「.....」 여자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의 방향을 보고 그리고 가늠하듯 땅을 바라보았다. 예의 그 딱딱거리는 말대답도 없어 오토는 혼자 어색해졌다. ‘ 쉽지가 않군. ’ 마마와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 뒤의 자유. 그것을 위해 사내의 오만함은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그래 그도 지쳤을 테지... 그래도 당신의 그 끝도 없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싫어. 「그래서 이헤르대로를 타고 가면 그 뒤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사내의 답변을 기다렸다. 뭣도 모르고 있는 대로 성질만 부리는 그를 매번 제어하기도 지쳐갔다. 라투야에게 좀더 짜증을 부려볼 것을 그랬다고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저런 철없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을 해결해야 한다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취미삼아 여행이나 하는 귀족나부랭이가 시국의 불안함을 어찌 알겠는가! 아무것도 확신할 것도 없이 이헤르대로를 타고 가서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소년을 어찌 찾겠다고 저러는 것인지. 그럴 것이라면 정말 그 가진 재산과 지위로 직접 요청을 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라투야와 자신의 약속. 저런 사내라도 있어야 세르판의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이 억울할 뿐이었다. 「뭣이? 그 뒤는...」 갑자기 공손해진 여자의 말투에 오토가 우물거렸다. 「그 뒤는 세르판에 대놓고 소년을 찾아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그건..」 「만약 당신의 방법을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저희와 동행하실 필요가 없으시겠죠. 귀족나리. 굳이 이런 힘든 여행이 무에 필요하겠습니까. 전령을 보내 심부름을 시키시면 될 것을. 이들의 신분을 잊으셨습니까? 당신은 잘못돼야 우크란으로 송환되겠지만 우린 목숨이 달아납니다.」 「황제에게 부탁해보겠다!」 「하! 웃기는 소리.」 「뭣이?」 「당신은 황제의 근처에도 못갑니다. 설사 황제궁에 소년이 잡혀있다면 더더욱 어렵지요. 앞으로 제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지금이라도 이일에서 빠지겠습니다. 아쉬운 것은 당신입니다.」 「근처에도 못 간다고? 넌 황제를 만나봤냐?」 이상하게 허를 찌르는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일개 떠돌이가 어찌 위대한 세르판 황제폐하를 알겠습니까. 실언했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이헤르대로로 가겠습니다.」 「조..좋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냐. 아무리 내가 잘 모른다 해도 설명도 없이 빙빙 둘러 가면 내 마음은 어떠하겠느냐. 젠장.. 좋아. 어떻게 하든 좋으니 방법을 말해줘.」 이제 한풀 꺾인 사내의 목소리에 여자의 눈에 살짝 미소가 돌았다. 「세이카로 갑니다. 그곳에는 세르판에서 온 귀족들이 있을 것입니다. 정확히 그들에게 소년의 위치를 알아봐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세르판으로 가서 소년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가급적 빨리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세이카?」 「아...! 세이카는.... 사라졌군요. 여신의 강 동쪽에 새로이 귀족들이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곳의 사교계라면 세르판 본국의 사교계보다 소문을 듣기 쉽습니다. 아무래도 본국과 멀어진 곳이니 감시하는 자들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 멀리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아니요. 수도와 가까운 곳에서 소년의 행방을 찾는 것보다는 안전합니다. 만약 그가 황제궁에 있다면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로부터 여신의 강은 가깝습니다. 배를 이용하면 오히려 대로를 질러가는 것 보다 쉽지요.」 「으아~~~!!!! 알았다. 빨리 가자!」 여신의 강에 놓여진 다리 그 굳건한 다리를 지나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병사들도 우크란의 귀족인 오토가 내미는 목걸이를 보고 별 말없이 다 통행허가를 해주었다. 사막의 땅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들은 단거리를 달릴 때 가장 유용한 말을 구매하였다. 물론 오토의 돈이 들었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구름 한점 없는 태양의 빛은 매우 건조하고 뜨거웠다. 단지 그 열기가 두려웠을 뿐이었다. 대지의 반이 숲인 땅에서 살던 오토가 대륙의 중반쯤 들어섰을 때. 드디어 몰려오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으음.........」 뒤척이는 사내의 몸을 바라보았다. 열기에 약한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그 푸른 땅. 숲의 대지에서 건너온 그의 몸이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준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말을 모는 모습은 그 만의 순수함이 보이는 듯도 해서 웃음이 돌았다. 오아시스 중심으로 꾸며진 마을의 한편에 여행자들이 묵어갈 수 있는 여관에는 쓰러진 오토와 여인만 남아있었다. 다른 이들은 다시 밟을 수 없던 모래땅을 찾게 된 기쁨에 정신이 없는 듯 했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침상위에 쓰러진 사내의 머리에 젖은 천을 올려주던 여자의 손이 잠시 허공에 멈추었고 그리고 조용히 목에 닿았다. 「괴로운 거죠.」 여자의 한탄 섞인 목소리가 허공에 떠돌았다. 드문드문 눈이 떠졌다. 은은한 향이 감도는 실내에 그리고 머리에 올려진 차가운 천의 느낌. 그리고 또다시 눈이 감겨왔다. 아른거리는 시야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한 사람의 인영. 가냘픈 체형에 하얀 목덜미가 눈에 스쳤고 뒤이어 가지런하고 긴 머리칼이 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뿌연 시야로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왜 누워있는지 그리고 이곳은 어디인지 심지어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곧이어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황홀한 감각이 찾아왔다. 「잠이 잘 올 거예요.」 누군가가 속삭였다. 끊어질 듯 한 목소리가 가냘프게 귓가에 울린다 싶더니 다시 눈이 감겼다. 흡사 물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안락함. 그리고 이어지는 환상. 「리젠.. 보고 싶었어.」 사내의 손이 허공을 쥐어잡듯 허우적거렸다. 아련한 목소리에 그를 돌보던 여자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환상을 보는군요. 때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괴로워하지 말아요. 잊어버릴 수 있어요.」 「계속 찾았어. 리젠....」 긴 머리가 차르륵.. 흩어졌다. 입술을 간질이는 느낌. 「이제 잊어요.」 눈을 뜨자마자 오토는 벌떡 일어났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사라졌고 뒤이어 심한 갈증이 찾아왔다. 그에 맞추어 준비된 차가운 물이 침상 옆에 놓여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무엇인가 아주 애절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리젠이었어. 사내가 중얼거렸다. 창피하게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도 자신의 기억 그대로였다. 좀더 길어진 머리가 이상하긴 하였지만 그것은 별로 관계없었다. 그저 그 얼굴이 더 자세히 기억났으면 싶었다. 다시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그리고 그와 함께 거리를 거닐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두 꿈이었다. 지금은 모래땅의 그 지긋지긋한 열기아래였고 그리고 그의 행방도 잡을 수 없었다. 괴로웠다. 이제 잊어요..... 왜 머릿속에 그 말만 맴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라투야의 일행이 들어섰다. 얼굴색이 많이 좋아 보이지 않은 그 모습에 근심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물을 마시는 모습에 빙긋 웃었다. 「꿈을 꾸셨군요.」 「어떻게 알지?」 「그녀가 향을 피웠나 봅니다. 지친 심신에 아주 그만이지요.」 사내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에 사내는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아.. 옅게 피우면 괴로운 기억을 잊을 수 있어요. 너무 많이 맡으면 중독이 됩니다. 그 제조법을 모르지만.. 상당히 여러 개의 약초를 섞는 거라... 꿈을 꿉니다. 아주 행복한.」 행복하지 않았다. 오토는. 사내의 말에 단숨에 얼굴이 굳어졌다. 「여자는 어디에 있지?」 「밖을 살펴본다고 나갔습니다.」 오토는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남겨진 물의 나머지를 목안에 털어 넣었다. 서민들은 그 실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지표 같은 존재였다. 때로 누군가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걷다보면 귓가에 들려오는 말과 그리고 숨기려는 말 더불어 현재의 상황 등이 확연히 귀에 들려왔다. 이미 분주해진 사람들의 모습에 정오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각기 오전의 할일을 끝내고 오후의 일을 위해 어딘가로 가는 듯 했다. 여관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두어 개의 물품을 샀다. 여행에 필요한 것.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 여관을 들어서자마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내의 모습에 단걸음에 그를 향해 걸어갔다. 탁자위에 놓여진 술병을 낚아채자 그가 노기를 담아 올려다보았다. 「아직 술을 하시기에는 이릅니다.」 「앉아라!」 다른 때라면 분명 코웃음을 쳐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내의 눈매가 틀렸다. 무엇인가 단단히 화가 난 듯도 하고 그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 그것은 사내의 눈빛이었다. 어린아이의 탈을 벗은. 「정체가 뭐지?」 「...........」 「대답해!」 「제 정체를 아시는 것이 나리께 도움이 되십니까?」 「그래!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난 알아야할 권리가 있다.」 탁! 하고 성질 것 내려놓은 잔이 탁자에 부딪히면서 담겨있던 술이 탁자위로 흘렀다. 성난 그를 대변하듯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따라오세요.」 차분하게 앞서는 그녀를 따라 오토는 뚜벅뚜벅 걸었다. 방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둘의 모습에 방안에 있던 라투야의 일행들이 스르륵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 둘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들떠있던 일행들이 순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후훗.. 뭐가 그리 대단하지? 계집주제에 건방진 말투하며 이상한 향이나 피워대고 그래 어제 나 혼자 헛소리 하는 것을 보면서 아주 즐거웠겠구나!」 「쿠쿡...」 「뭐가 웃겨!」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오토님. 그렇지만 지금은 충분히 즐겁군요. 이렇게 화를 내시는 이유는 제게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가요?」 「이잇!! 말돌리지마. 도대체 넌 누구냐!」 「제가 누군지 알면 후회하실 지도 몰라요.」 가라앉은 목소리. 그리고 여느 때와는 다른 목소리. 그래도 오토는 알고 싶었다. 「그래도 알고 싶다!」 「알려드리죠. 하지만....」 여자가 터번의 자락을 손으로 쥐었다. 오토는 순간 숨을 죽이고 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굉장한 긴장감이 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직시하며 그 손가락을 조용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벌컥!! 하고 방문이 열렸다. 무리 중 사내 하나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자가 뛰쳐나갔다. 황당해진 오토는 이것이 혹시 그들 사이의 작전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렇지만 그러기에 여자의 얼굴은 너무 급박해보였다. 여자의 커다란 눈에 어린 알 수 없는 감정이 오토의 심장을 아프게 하였다. 「키리온 실버리안?」 「그래. 라. 황족이 이곳으로 온다는군. 아무래도 길을 변경해야겠어. 이러다간 다 죽을거야. 이런.. 왜 황족이 이런 사막의 땅에 오는 거지? 일이 꼬이는군.」 「라? 내말 듣고 있어?」 이를 갈 듯 사나운 표정이었다. 그 터번아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기어린 눈빛이었다. 5. 이헤르대로의 넓이는 육두마차 10대가 지날 만큼 굉장한 폭을 자랑했다. 그 웅장한 넓이와 그 끝을 알 수 없는 긴 거리 그리고 그 주변으로 펼쳐지는 널따란 초록의 대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가기 충분했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그리고 그 중간 중간 대로를 지나는 여행객들을 감시하는 세르판 병사들의 시선도 날카로웠다. 대로의 중반쯤 타고오던 우크란의 사절단은 잠시 쉬어가기 위해 여행자의 도시에서 발을 멈추었다. 우크란에서부터 세르판 황도로 오기까지 달 반이 넘게 걸린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이 본국에 도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긴 여행임을 감안하여 중간 중간 자신들의 행로를 알리기 위해 본국으로 서신을 띄우기도 하였다지만 레스터 카이사르의 부재가 큰 것은 사실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도착한 서신의 내용은 다소 길었다. 그 긴 서신의 끝에 다급하게 덧붙여진 글씨가 흐트러진 것으로 보니 특히 이 글을 적을 때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짐작이 갔다. 전과 다르게 서신을 가져온 사내의 얼굴빛이 흙빛이었다. 급히 달려온 모습을 짐작케 하듯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서신을 읽는 레스터에게 간간이 필요한 보고를 올렸다. 열두 명. 모두 죽은 자의 이름이었다. 그 많은 인원의 숫자를 제외하고도 서신에 올라간 몇몇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우크란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제 막 자리잡혀가는 우크란의 정세를 정체모를 누군가가 흔들고 있었다. 그 뿌리부터 아주 깊숙이 흔들어 버리는 엄청난 사실을 알리는 그 글의 내용에는 몇 가지 이상한 사항도 같이 보고 되었다. 하지만 적혀있는 내용만으로는 원인을 짐작할 만한 어떠한 내용도 단서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죽은 귀족들의 이름을 쭈욱 훑어보았지만 그들의 연관성 또한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초 일이 발생한 때가 자신이 사절단으로 떠나던 시점이라는 것뿐이었다. 독살인가? 한결같이 심장에 칼을 꽂고 죽었다면 그것은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지만 그 죽은 명단에는 무관도 있었다. 얌전히 심장을 내놓고 죽는다라는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서신의 끝에 악마의 소행이 아니냐는 덧붙임에 레스터는 인상을 찌푸리고 손에 잡힌 종이조각을 구겨버렸다.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만들고 있었다. 잠깐! 무엇인가 이상하다. 「제일 나중에 죽은자가 누구지?」 「휴란경입니다.」 레스터의 얼굴에 잠깐 스친 표정을 병사는 알지 못했다. 다만 무엇인가 골몰한 그의 모습에 다음 말을 기다렸고 곧이어 사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세르판 황궁으로 돌아가겠다.」 떠날 차비를 하는 사내를 바라보는 병사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서신을 읽은 그가 떠나기에는 너무 야심했고 황궁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먼 곳을 지나쳐왔기 때문이었다. **---------**--------** 갑자기 분주해진 일행들의 모습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방한구석에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사내가 분노에 떨면서 소리쳤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시에 가까웠다. 처음처럼 자신의 말에 대꾸도 없었고 그나마 말붙이면 대답이라도 하던 사내들은 한통속이 되었는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들을 따라 여신의 강 상부까지 여행을 하던 사내로서는 그 침묵은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싶었다. 최초 묵었던 곳에서도 일주일을 달려온 그들이다. 아무리 자신이 그들에게 이의 없이 동행한다고 약속했지만 이 상황은 참기 힘들었다. 결국 사내가 폭발했다. 그 날은 전세이카령의 가장 큰 오아시스 도시에 도착한 날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엉?」 방안 한편에 기대어있던 오토를 보던 사내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들어왔다. 오토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만나기만 한다면 한껏 쏘아주리라며 연습한 불만의 단어들을 내뱉으려 입을 땠을 때에 여자는 들고 있던 옷가지를 건내었다. 그것은 여행에는 불필요한 옷이였다. 얼결에 그 찬란한 무늬와 화려한 문양의 옷을 받아든 오토는 놀란 눈을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놀란 표정에도 여자의 눈은 여자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무색의 빛깔이 돌고 있었다. 무엇인가 물으려던 오토의 말을 가로막으며 여자가 말했다. 「오늘 가실 연회에서 입으실 옷입니다. 원하시는 바를 얻으실 수 있으실겁니다.」 「연회? 누가 주체하는?」 「아.. 초대장을 잊을 뻔 했군요. 받으세요.」 밀랍으로 봉인된 초대장을 받아든 오토는 투욱 그 봉인을 뜯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세르판 귀족이 주최하는 곳이라니.. 그런데 이 초대장은 어떻게 가져 온 거지? 미처 그 방법에 대해서 감탄할 새도 없이 여자와 사내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처음 들어왔던 그 모습 그대로 모두 사라졌다. 정신없이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던 오토는 혼자 남은 여자를 바라보고는 머쓱해졌다. 「이봐. 난 남자라고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어떻게 옷을 갈아입나.」 「아......!」 여자가 낮은 감탄사를 내뱉고 사라졌다. 괜시리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이상한 여자였다. 갑자기 그 무신경한 여자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가끔 느끼지만 아니 사실 매번 생각하지만 미묘하게 감춰진 여자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날이 선 단도같이 서늘하게 구는 것인지. 왜 자신의 주위로 아무도 못 오게 얼음처럼 차가운 말들만 골라하는지.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만 말해준다면 못해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문득 자신에게 주어진 옷들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위해서라도 그 연회에서 리젠의 소식을 들어야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오토는 가져온 옷을 하나하나 걸치기 시작했다. 기가 막히게도 어디서 구했는지 걸치는 것마다 굉장히 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상념에도 불구하고 모처럼 화려한 연회를 기다리는 오토의 마음은 붕 뜨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던 집을 떠난 지 거의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즐겨보는 화려한 파티였으므로 그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재주도 좋지. 라고 중얼거리는 오토를 보며 비로소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점점 한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귀족이 이런 무리들에게 섞여서 여행을 하며 (그것이 비록 목적이 있는 것이라지만) 이런 소소한 옷가지에 기뻐하며 (이런 옷은 사실 눈도 두지 않았다.) 이런 낡아빠진 마차로 파티에 간단 말이더냐! (옷과는 너무 대조적이라 창피할 지경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에 마차가 멈추었다. 그렇지만 그 황량한 벌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란 것이 아쉽고 허무하다고 생각할 때 맞은편에서 화려한 마차가 다가왔다. 기이했다. 이런 황량한 벌판에 저런 마차는 무엇이지? 라며 짧은 생각을 할 때 화려한 마차에서 한 사내가 내려섰다. 마차에서 내린 사내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뒤이어 내려서는 사람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하는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뒤이어 내려섰다. 「라?」 자신보다 입을 먼저 땐 것은 라투야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내였다. 그래.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내려서는 여자가 그렇게나 쌀쌀맞던 ‘라’ 임을 눈치체지 못했을 것이다. 한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바라보는 것을 탓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선 모든 이들이 그러했으니까. 「마차를 구했어요. 빨리 타요. 너무 늦으면 오히려 질문이 많아집니다. 자연스럽게 섞.....」 아마도 그 말은 허공 울리는 리듬같이 들렸으리라. 「다들 뭐야!!」 순간 지나가는 붉은 홍조는 아무도 눈치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적이 없는 오토로서는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다. 왜 그녀가 그렇게 둘둘 말고 다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저 얼굴로 칼을 잡고 다닌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혼자 납득했다. 그녀는 가리고 다니기에는 너무 아까운 미모를 지녔다. 「타세요. 빨리! 늦으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이어 다가온 그녀가 재촉하는 말이 들렸다. 뒤이어 걸음을 옮기려는 오토에게 라투야의 사내가 속삭였다. 「라를 지켜주세요.」 지켜 달라........ 누구를? 저 얼음 같은 여자를? 대꾸도 못했다. 오토가 올라서자마자 마차는 출발했다. 허름한 마차는 뒤로 밀려났고 바람은 뜨거웠다. 「마부가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빨리 자연스럽게 알고 싶으신 것을 타진하신다음에 후원으로 가십시오. 마차를 잘 기억하셨다가 타고 가시면 됩니다.」 「너는? 너는 안 간단 말이냐?」 「할일이 있어요.」 「어떤 할일이지?」 「...........비밀입니다.」 무슨 비밀이 이리도 많은지. 자세히 본 여자의 얼굴을 보니 매우 앳되었다. 오히려 그 행동과 모습이 일치하지 않아 오토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잠시나마 상상했던 여자의 얼굴과는 정말 틀렸다. 입안이 씁쓸했다. 「왜 가리고 다니는지 알겠군.」 「맞습니다. 얼굴을 가릴 것입니다. 오토님은 저를 정부로 소개하시면 됩니다. 초대장은 오토님에게 날아온 것이니까요.」 「쿠..쿨럭~ 정부?」 「네. 아직 결혼하지 않으셨잖아요. 몇 가지 말을 맞추어야겠군요. 그럼..........」 그 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다. 단지 마지막으로 ‘조심하세요.’ 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도 그녀의 긴 머리칼과 목선을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으니까. 마차를 세우고 하인들의 시중을 받아 홀 안으로 들어서는 오토의 왼손에는 긴 검은 장갑을 낀 여자의 손이 올라가 있었다. 살며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한발 한발 홀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 익숙해진 분위기를 음미하듯 오토가 귀족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뵐게요.」 「어? 어디가는거냐!」 「오토님이 편히 얘기 하시는 동안 잠시 물러나있겠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검은 베일로 가린 얼굴을 살짝 숙여 인사를 올리고 홀의 저쪽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그 사라지는 뒤태만 바라보던 오토는 자신의 앞에 술잔을 내미는 사내에게 얼굴을 돌렸다. 「초면이시군요.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직감적으로 말을 거는 사내의 옷차림을 보건데 그가 초대장에 적힌 키리온 실버리안임을 알 수 있었다. 「아~!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토 칼스타인입니다. 칼스타인 공작의 장자이지요. 그녀는 우크란에서 만났습니다. 굉장한 미인이지요?」 「훗.. 그렇군요. 얼굴을 가린 것은 칼스타인경이 직접 말씀하신 것인가요? 궁금하군요.」 「아.. 그렇지요. 후훗.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보이고 싶지 않답니다. 그것보다 요즘도 세이카에서는 금발소년을 찾습니까?」 「훗.. 그렇답니다. 오토님. 제가 오기 전에도 황도에는.........」 그들의 이야기는 길어졌다. 그리고 오토는 원하는 바를 듣게 되었다. 우크란의 사절단이 데려온 아이가 있고 그들은 진짜로 금발의 소년을 공물로 올려 황제의 환심을 샀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을 때에 오토의 손에서 잔이 떨어졌다.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나고 그리고 기가 막힌 마음에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스르륵 발소리도 없이 여자가 다가왔다. 「어머~ 이런. 오토님. 저 외롭단 말이에요.」 누구지? 모르는 여자였다. 오토는 황당함에 한참을 안절부절 해야 했다. 맞은편의 사내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을 감출 사이도 없이 춤을 추자는 여인의 손에 질질 이끌려 오토는 홀의 가운데로 끌려갔다. 「이대로 돌아보지 말고 가시라는 전갈입니다.」 「누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주위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즐겁지 않았다. 이런 촌스러운 파티는. 키리온 실버리안은 쫓겨나듯 자신이 먼 땅에 유배되었다는 심정에 화가 치솟을 지경이었다. 이런 울컥거리는 심정을 파티로나마 달래보려는 생각도 그의 화를 누그러트릴 수는 없었다. 불쾌한 가장 큰 요인은 초대된 손님들의 행장이었다. 본국 황도에서 열리는 파티는 그 화려함과 규모가 이루 말 할 수없이 장대했건만 지금은 그 반도 안돼는 손님에 그 행색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무료한 가운데 들어서는 사내의 화려한 옷이 눈에 끌리는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그 옆에 들어선 여자의 옷차림은 세르판의 유행을 아는 것처럼 화려하고 기품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눈길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가선 사내 옆에선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파티에 들어선 어떤 여자에게도 들을 수 없는 요염함이 담겨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물 만난 고기처럼 키리온은 흥미를 느꼈고 곧이어 사내의 환심을 사기위해 술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들어선 사내의 옷차림을 보고 파티장의 여자들은 눈을 돌렸다. 곧이어 꽃에 이끌린 벌 때처럼 여자가 꼬이기 시작했다. 열 여자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 사내는 얼마 안 있어 다른 여자와 함께 홀을 떠나버렸다. 「어머~ 이런!」 놀라는 목소리. 키리온은 슬며시 미소가 흘렀다. 사라졌던 그녀였다. 돌아올 때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아 조바심을 내며 그 여자를 기다리던 차였다. 새침하게 두리번거리는 모습도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검은 드레스 위로 그녀의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렸고 가느다란 팔목을 감고 있는 긴 검은 장감도 우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런.. 혼자 계시는군요. 같이 오신 분은 방금 전에 홀 밖으로 나가셨답니다.」 「어머.. 어떻게 이럴 수가. 돌아가봐야겠군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분은 쉽게 질리는 분이라 가급적 안 만나려고 했는데..」 「제가........ 그분대신 당신의 벗이 돼드리고 싶군요.」 긴 머리체가 흔들 하고 흔들렸다. 거절의 표시. 키리온은 애가 탔다. 「재밌으신 분이세요.」 언제 단둘이 방으로 오게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가히 예술이었다. 내미는 술잔의 술을 받아든 키리온은 단숨에 술을 목뒤로 넘겼다. 가벼운 취기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음악으로 들리자 그때부터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솟아나왔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살풋 살풋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에 애가 탈 지경이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검은 베일만이라도 벗겨내고 싶었다. 그래 못할 것도 없었다. 새침을 떤다 해도 여자는 한 사내의 정부였다. 자신이 누군지 알면 같이 온 사내쯤은 당장이라도 버리고 올 여자가 분명했다. 「내 누이는.... 세르판의 왕비가 될거요.」 먼발치에서 우아하게 노래하던 여자가 순간 노래를 멈추었다. 「...........좋겠군요.」 「그래. 그 사내를 버리고 내게 오면 그대도 그 영화를 누릴 수 있지.」 「그런가요?」 「당연하지. 난 키」「키리온님이시죠? 알고 있어요.」 「쿡.....! 역시 요물이구나. 알고 있다면 얘기는 더 빠르지. 나와 같이 있겠느냐?」 「원하신다면........ 전 이제 키리온님 것이랍니다.」 여자가 한발 한발 다가왔다. 키리온은 편하게 기댄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여자의 손이 볼을 스쳤다. 그 손을 잡아 씌워진 장갑을 벗겨내었다. 「훗.......」 여자가 짧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지?」 키리온의 눈이 여자의 입술을 향했고 그리고 여자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가까이서 보니 굉장히 오밀조밀 작고 아름다운 입술이었다. 그리고 꺼질 듯 한 목소리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타이라 세이카.」 「뭐?」 벌떡 일어나려던 키리온은 극심한 현기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 순간 공간이 찌그러지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엄청나게 수축되면서 자신 앞에선 여자의 검은 드레스가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으.....으윽......아니야..... 타이라 세이카는...... 죽었어.」 키리온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렀다. 「너.....넌..... 어떻게..........」 그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쉴세없이 눈물이 흘렀다. 손발이 저리고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아파왔다. 「왜 같이 마셨는데 난 멀쩡한지 궁금한가? 키리온. 후훗.. 숨쉬기도 힘들겠지.」 허억............허억.........허억......... 키리온의 손이 허공에 올랐다가 순식간에 옷으로 떨어졌고 고통스러운 듯 옷을 쥐어짰다. 으......으.........으으........... 듣기에도 괴로운 신음이 방안을 어지럽혔다. 「여신의 축복이 이어지기를..」 붉은 입술에 미소를 띠우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의 모습에 키리온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여자의 손에 쥐어진 짧고 가느다란 단도가 눈 안 가득 들어왔다. 푸...욱....... 하고 심장으로 깊이 박힌 검과 동시에 사내의 눈 안의 동공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주르륵......... 붉은 선혈이 옷을 적시고 바닥을 적시고 그리고 방안가득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모습을 여자는 미동도 없이 계속 지켜보았다. 고요한 복도를 울리는 발자국소리. 그리고 흐르는 눈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정신. 잠시 주저하듯 벽에 기대선 타이라는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벗어나야해! 「거기서!」 어두운 복도 저편으로 발을 멈추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6. 화려한 홀과는 대조적으로 몇 개 켜지지 않은 복도의 횃불. 그 어두운 그림자 아래 숨을 고르는 사람과 그리고 다가오는 사람. 타이라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벽에 기대선 타이라는 착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흐르는 피와 함께 스쳐지나가는 머릿속의 영상. 그는 키리온이었고 곧이어 그레이스가 되었다. 쿵.쿵.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투다다닥...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의 양쪽을 부여잡고 재빠르게 뛰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한달음에 따라잡겠다는 듯 복도의 저편에서 사내가 뛰어오기 시작했다. 급박한 나머지 복도 옆에 있는 방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건물이 높지 않으니 뛰어내리면 따라오는 자를 따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피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안락한 죽음을 주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욕심이 부른 결과는 참담했다. 죽어가는 동공이 괴로운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지켜보는 내내 그 검붉은 피는 바닥으로 그리고 뒤이어 자신의 온 몸을 적시듯 뜨겁게 쏟아져 내렸다. 휘감기는 검붉은 피. 진저리처지는 기억이 전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들어선 방은 어둠 속에 있어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숨을 고르고 드레스의 한 자락을 칼로 찢어내었다. 찌이익.. 고요한 공간에 울리는 천의 소리와 함께 긴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이 찢어지면서 울리는 소리는 자신이 차마 내지르지 못하는 비명처럼 들렸다. 창을 열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층계를 하나만 올라온듯했는데 의외로 높아보였다. 삐그덕 하고 오래된 문이 창틀에 부딪혀 마찰을 일으켰다. 방 안으로 미지근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하아.. 하고 낮은 신음을 내뱉고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실패할 수 없었다. 창 둔턱에 올라가 몸을 둥글게 접고 바닥으로 눈길을 준 다음에 풀쩍 뛰어내렸다. 뒤이어 방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비켜!」 초췌한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라투야의 일행들은 사내의 모습에 움찔 하고 놀랐다. 지금까지도 여러 번의 다툼이 있었다지만 이번경우는 달랐다. 문 앞에 서있던 남자는 들어선 사내의 성난 기에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돌아왔나? 어딨지?」 당연히 자신들의 ‘라’를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간 옆방의 문은 잠긴지 오래였다. 물론 들어서는 사람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덜그덕. 하고 잠기는 방문의 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방해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방해하지 말라는 말이 분명했다. 그 말을 하는 사내는 매우 난처한 듯 곧이어 우려의 표정을 내보였다. 방 밖으로 나서려는 오토를 막은 사내는 다시 한번 경고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비켜!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주춤.. 오토의 일갈에 사내가 비켜섰다. 할 만큼 했으니 그 뒤의 원망은 사내의 몫이라고 라투야의 일행은 불만을 삼키고 성난 발걸음으로 나가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굳게 잠긴 방문 손잡이를 두 번 흔들어보고는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밟고 내려간 그는 여관주인에게 방 열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방까지 뛰듯이 걸어간 오토는 방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은 천으로 모두 가려져있었고 코를 찌르는 풀잎향기가 방안에 넘실댔다. 순간 인상을 찌푸리고 코를 그러쥔 오토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바람이 잘 불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방안은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독한 향기가 가득차있어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젠장... 숨막혀죽겠다.」 오토가 커다랗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침상위의 여자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순간 여자가 죽은 줄 알았다. 침대의 오른편에 피어놓은 향을 발견한 오토는 향 위로 물을 뿌렸다. 치지직.. 소리를 내며 방안을 어지럽히던 향이 꺼졌다. 「이봐! 정신 차려. 왜 이러는 거야!」 당황스러웠다. 분명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났었는데 하얀 얼굴에 얼룩진 눈물자국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답답해 보이는 그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덜너덜 찢겨진 치마를 그대로 걸친 여자의 몸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조금 느슨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여자의 옷에 있는 끈을 풀렀다. 역시나 미동조차 없었다.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자세히 듣기 위해 여자의 얼굴 쪽으로 귀를 가져다 대었다. 여자의 얼굴에 한 줄기의 맑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미처 천으로 닦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손이 올라갔다. 엄지손으로 여자의 눈가를 쓸어내리던 오토는 손목을 잡는 여자의 손에 흠칫 놀라 숨을 삼켰다. 「아레스.............」 아레스? 「흐흑.........아...레..스..........」 웅얼거리는 틈틈이 새어나오는 말은 분명 사람의 이름이 분명했다. 서늘하게 땀이 식는 기분이었다. 긴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있었고 곧이어 여자는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화를 내기도 전에 그녀는 시체처럼 숨을 죽이고 다시 그 수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길로 소리 없이 방문을 닫고 나왔다. 뚱한 표정으로 들어선 사내를 보는 단원들은 선뜻 말붙이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자신의 일행인 ‘라’조차도 방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일행들은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밤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리. 식사를 하셔야죠.」 벌써 하루를 꼬박이 지내고 아침이 왔다는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밤새 침대의 한편에 멍하니 앉아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첨예한 신경위에 피곤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 상황이 되자 강인한 체력이라고 자부하던 사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방에서 약간의 향 만 맡았다고 생각했는데 두통이 오고 있었다. 그것이 향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끈한 두통은 참기 힘들었다. 「마셔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투명한 잔을 내미는 여자는. 「거기 앉아라.」 「나리는 식사하러 안가셨군요.」 「몸은 괜찮은게냐?」 「..........」 「휴우..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원하시는 대로.」 의외로 간단하게 대답하는 여자의 음성에 오토는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터번으로 가려진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 여자가 서있었다. 무리하게 욕심을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에게 정체를 들키면서까지 키리온을 죽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몰랐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쳤으니 곧이어 세르판에서 병사들을 풀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여파를 안다면 저 묵직한 사내는 가만히 있지 않을테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슬며시 미소가 흘렀다. 아무래도 좋다.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뭐가 웃기지?」 「이제 비겼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 「당신을 살려줘야 할 이유. 그 이유가 생겼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라투야를 믿으셨습니까? 당신은 세르판으로 가는 통행증입니다. 소년을 찾고 안 찾고는 라투야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요. 당신도 저도 그녀의 도구입니다.」 오토의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훗... 보이시나요? 붉은 피가 보이는군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여자의 파란 눈에 절망이 스쳤다. 자신의 작고 아담한 두 손을 내밀며 금방이라도 투명한 눈물이 뚜욱 떨어질 것만 같은 눈을 들어 속삭였다. 오토는 경악에 찬 눈으로 여자를 마주보았다. 여자가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밀어진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주르륵 붉은 선혈이 흐를 것만 같았다. 「서..설마!」 「눈감아 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돕지요. 소년을 찾게 해드리겠습니다. 약속합니다. 당신의 소년을 찾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십시오. 그냥... 악몽을 꾸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금 긴 악몽이 되겠지만.」 「서..설마.. 네가.. 귀..귀족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여자가 방 밖으로 나간 뒤에 오토는 건내받은 잔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잔속의 투명한 물이 흡사 죽은 자들이 흘린 피처럼 느껴졌고 곧이어 맑은 눈물처럼 보였다. 여자의 눈에서 흐르던 그 맑은 눈물처럼 투명했다. 「이봐요! 귀족나리. 더 이상 얘기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수군덕수군덕. 마차 안에서 자신들의 일행이 떠드는 목소리에 타이라가 소리쳤다. 사내는 이상하게 변했다. 서글서글한 성격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거기에 보태어 유들유들하고 뺀질뺀질해지기 시작했다. 발끈.. 화를 내면 그런 자신을 비웃듯 낄낄 웃는 모습까지도 타이라의 염장을 지르기 충분했다. 무슨 속셈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봐. 그렇게 화내지 말라구~ 여자란 말야 자고로 나긋나긋해야 한다니까.. 하하하!」 「그....그만하시죠. 나리.」 「자네들이 그러니까 여자가 저모양이 되는 거야. 좀 뚝심 좀 있어보라고~ 쯧쯧.」 휘익! 소리를 내며 검 날이 오토의 목을 스쳤다. 마차 안 좁은 공간에서 절묘하게 목을 노리는 검에 일행들은 숨을 삼켰다. 자칫 잘못하면 목안으로 시퍼런 날이 뚫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쳇. 성질은.. 알았다구. 치워. 안한다니까!」 항복의 표시로 손까지 번쩍 올리며 털털하게 내뱉는 사내의 말에 타이라는 웃음이 났다. 무의식적으로 피식~ 하고 흘리는 웃음에 일행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 있는 광경이었다. 웃음은커녕 말도 없는 타이라의 자연스러운 미소는 일행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거봐. 웃으니까 예쁘잖아. 으아아아아~~~~~~~~~~~~~」 꺾인 팔을 주무르면서 오토는 마차에서 내렸다. 「젠장. 웬 여자가 저렇게 힘이 세!」 그리고 쫓겨나듯 두 번째 마차로 옮겨 탔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가벼운 리듬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여자는 웃어야 한다니까! 라며 오토는 중얼거렸다. 복잡한 것은 생각하기 싫었다. 무슨 약속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열쇄가 되고 여자가 일을 해결하게 되면 리젠과 함께 돌아가서 도움을 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간밤의 시체처럼 누워있던 여자가 생각났다. 그런 모습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만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것과 동시에 차례로 벌어지는 귀족들의 죽음에 관한 주범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엄청난 말이 머리를 가격했다. 순간 여자의 자백 같은 말을 듣고도 자신이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버렸다.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은 더 이상 오토에게 아무런 일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여자의 가냘픈 어깨에 내려앉은 무거운 운명이 보이는듯해서 오토의 마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여신의 강 상부. 그곳까지 오게 된 라투야의 일행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침묵으로 그 강의 아름다운 흐름을 눈에 새기고 그 푸르른 강물을 손으로 느꼈다. 감격에 복받친 사람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는지 옷소매로 눈가를 훔쳐 내리기 바빴다. 그 가운데서 역시 오토는 장엄한 물의 그 폭에 감동한 듯 한참을 강을 두리번거렸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는 감격어린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다. 결속된 그들의 의지는 강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뜨거운 태양과 모래로부터 오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실로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인원을 나누겠습니다.」 타이라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지금쯤 키리온이 죽은 사실이 본국에 알려졌을 것이 분명했다.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도 그리고 모두 죽음의 길로 갈 필요도 없었다. 라투야가 지시한 임무 중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루었다. 이제 달리 자신이 할 것은 없었다. 「뭐라고? 여기까지 온 우리들을 내치려는 거냐?」 「말도 안돼! 혼자 뭘 어떻게 하겠다고..」 제각기 떠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타이라는 강을 바라보았다. 어려운 여행길에 동행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비록 명령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목숨을 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병사들의 눈을 따돌려주십시오. 오토님과 함께 강을 건너겠습니다. 많은 인원은 필요 없어요.」 「너 혼자 간단 말이냐?」 「훗.... 아직도 절 못 믿으시는 겁니까? 원하시는 소년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글쎄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늘 뒤로 숨기는 여자의 말에 오토가 불쾌해 하는 동안 일행이 나뉘었다. 그동안 자신과 같이 여행을 하던 사내들이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타이라의 마음속이 서늘하게 식었다.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렀으면 좋으련만 메말라버린 눈동자에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울기위해 향을 피울 수는 없었다. 암울한 향은 눈물과 함께 쓸때없는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악 효과가 있었다. 이제 그런 추억은 필요 없었다. 「아.. 정신이 없군요. 이제 강을 건너는 배만 타면 세르판입니다. 소년의 행방은 알아보셨습니까? 만약 못 알아보셨다면 제가 알아오겠습니다.」 타이라는 강 저편을 바라보고 한편에 어두운 얼굴로 서있는 오토에게 물었다. 빨리 그의 일을 해결해주고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황궁에 있다더군.」 「.......!!」 「내 아버지가 그를 팔았다. 세르판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젠장. 모두 죽여 버리고 싶어. 리젠을 팔아버리다니... 이봐. 이봐! 정신 차려!」 아득히 멀어지는 공간. 그리고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어지러운 호흡. 우욱.......... 「이런! 거봐 그 향은 몸에 좋지 않다니까..」 그 한 자락의 희망. 그것도 무너트리는 그의 음성. 먹은 것도 없이 속이 뒤집히는 토기가 올라왔다. 죽을 것만 같아. 죽을 것만. 「하.........아... 괜찮습니다. 그 향은 제게 아무런 효과도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출발하겠습니다.」 어깨를 잡은 손을 밀어내며 타이라는 일어섰다. 그리고 범선이 정박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행자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니기에 병사들의 움직임은 적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조심해야만했다. 사내가 가진 통행증이 어디까지 먹힐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품안의 단도를 다시 한번 쓸어내렸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라. 사내야. 난 당신을 죽이려 했어. 사내의 걱정스러운 얼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머릿속을 휘감아 도는 지긋한 환상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줄 곳 어디에 서있어도 지옥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기억이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라투야. 집시들의 우두머리. 그녀는 집시도 아니었고 병사도 아니었다. 권력에 눈이 먼 세이카의 귀족이었다. 정확히는 세이카의 둘째왕자의 모친. 지략으로 뛰어난 여자. 그리고 인정사정없는 여자. 세이카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병사를 끌어 모으고 자금을 모으는 일에 열중한 듯 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은 여자의 손에 있었다. 원하는 대로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여자의 서늘한 미소가 생각났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제가 바라는 것과 일치하는군요. 협력입니까?  아니 명령이야. 넌 내가 살린 목숨. 살기 위해서는 때로 지독한 증오도 필요하단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지긋한 환상을 끝내줄 수 있다면..  호호홋.. 부군께서는 요물을 만드셨군. 좋아. 도와주마. 단, 내 명령은 절대적이야.』 바람이 분다. 시원한 물내음을 담아서.. 강을 건너는 범선 앞에서 병사들은 통행증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오랜 조약으로부터 오는 우크란 귀족만이 소유한다던 통행증을 유심히 살피던 병사는 가문의 문양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였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배에 오른 타이라와 오토는 잔잔한 물을 바라보며 제각기 상념에 빠졌다. ‘꼬맹아..’ 휘익~ 뒤를 돌아보았다. 배 위에는 몇몇의 사람과 병사뿐이었다. 아련한 추억 그 저편에서 머리를 어지럽히는 환상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세르판으로 다가갈수록 더 짙어지고 더 잦아졌다. 타이라가 향의 조제법을 알게 된 것은 라투야 무리 중에 속해있던 집시여자에게서였다. 그녀는 사실 점을 칠 줄 몰랐다. 환각을 일으키는 향을 약하게 피움으로서 자신의 점술이 정확하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곳의 무리에 속한 자들이 모두 패잔병이 아니었듯이 그 무리 안에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속해있었다. 기이한 점술을 구사하는 자.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자. 아름다운 춤을 추는 자. 그리고 독을 다루는 자. 그리고 하나둘 몸으로 익히면서 과거는 잊혀져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은 괴로움을 동반했다. 때로 미친 듯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한 자락의 행복을 느끼고 싶어 향을 피웠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든 행복한 꿈에서 눈을 떠보면 아른거리는 과거의 기억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허무하게 사라졌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거머쥘 수 없는 행복이었다. 「물살이 고요하군.」 감탄한 듯 중얼거리는 사내를 바라보며 타이라는 미소 지었다. 「물 안에 길이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강으로 떨어집니다.」 「그래? 고요해 보이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나리.」 머쓱해하는 오토의 등 뒤로 햇살이 비추었다. 부서지는 햇살은 강 위로 그리고 그 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빛을 만들었다. 7. 범선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에게 아름다운 푸른 땅이 펼쳐졌다. 물론 강으로부터 자갈과 모래가 섞인 축축한 땅이 조금 이어졌지만 곧이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병사가 고개를 숙이고 오토를 배웅하였다. 길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좁은 길을 타고 한참을 걷자 곧이어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의 행장이 가볍고 여행하는 사람의 복장치고는 매우 간편해보였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더운 열기 속에 환담을 나누고 있었고 병사들은 한가로운 풍경 중간 중간 주위를 휘휘 돌며 수상한 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표정을 살펴보려했던 오토는 가려진 얼굴위에 유일하게 보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처음 배에 올랐을 때에 흔들리던 눈빛은 처음과는 다르게 평온해보였다. 가만 보니 여자의 눈동자는 파란 보석 같았다. 반짝이는 빛을 뿜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 여자의 얼굴과 마주쳤다. 어색함에 아무 말이나 섞는 다는 것이 그 복장은 너무 드러나지 않겠냐는 말이 되었고 여자의 대답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흠.. 나리의 말씀이 맞군요. 날씨고 덥지 않은데 이렇게 둘둘 말고 다니면 수상하게 보이겠지요? 생각보다 군사가 많이 깔리지 않았군요. 세르판에서는 모르는건가.....」 「덥지 않다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예상외로 더웠다. 지금은 여름이었고 우크란의 서늘한 숲 속의 저택에 살던 오토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기온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덥지 않단다. 짐작한대로 여자의 출생은 사막의 땅이 맞는듯했다. 배에 오른 이후로 여자와는 말을 나눠보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여자가 가는 길을 따라 여자의 말을 듣고 행동할 뿐이었다. 처음과는 다르게 큰불만이 없었다. 이국의 땅을 밟아서 인지 아니면 곧이어 리젠과 만날 수 있다는 행복한 사실 때문인지 몰라도 아무튼 처음 여자를 만났을 때와 같은 이유모를 반발심은 없었다. 「신기한가요?」 「뭐가?」 「저 멀리 보이는 땅이 전부 푸른색이라는 것.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신기했지요. 눈을 땔 수 없을 정도로....」 오토는 여자의 손끝을 따라 푸르게 펼쳐진 땅을 바라보았다. 물론 어떻게 보면 신기할 수도 있었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땅은 한없이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 널따란 땅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군. 신기해.」 수긍하듯 대답하고는 답변도 듣지 않고 앞서는 여자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여자는 곧이어 저편에 서있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어라? 하고 여자를 따라가기도 전에 여자는 사라졌다. 심심하고 무료해. 라고 생각했다. 예전과는 달리 혼자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그녀를 많이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고요한 가운데 혼자 앉아있게 되자 주변의 소리들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시국이 불안한지라 여행객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제법 숫자가 되었고 몇몇 모여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며 흥분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아휴~ 말도 마시게. 내 아들은 16세가 될 때 결혼했지 뭔가.. 하하. 기가막혀서 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중년을 넘은 사내가 맞은편 일행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오토는 대략 이야기를 그러모으게 되었고 이윽고 세르판에 생긴 신 풍습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자식이 황제에게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이 생각해낸 방법은 다소 억지가 있었다. 혼인을 시키면 일단 소년은 이미 가정을 가진 사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찾는 17세 전후의 소년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는 것에 오토는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웃음을 흘리던 오토의 앞에 두 마리 말이 보였다. 갈색의 갈퀴를 휘날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오던 두 마리 말은 오토의 앞에서 멈추었다. 여자는 오토가 일어서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쥐고 있던 고삐하나를 넘겼다. 「여기서 말을 타고 가야합니다. 나리의 말씀대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해야하고.. 마차를 구하고 싶었지만 쓸만한 것이 없더군요. 하루정도 가서 숙소를 잡으면 말을 팔고 마차를 구해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훗.... 처음 듣는 것 같군요. 나리.」 대답하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볍게 들려 오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환영처럼 스쳐지나갔다. 반항기의 어린아이처럼 강한 척 하려고 악을 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했는데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단단해 보이는 겉꺼풀은 화려한 문양의 옷처럼 하나면 벗겨내려도 쉽게 상처 입는 피부가 나온다는 사실을. 여자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거부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오토는 있는 힘껏 말고삐를 그러쥐었다. 푸르른 하늘 아래로 두 마리의 말이 달려 나갔다. 「왜! 다시 돌아온 거야! 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레디미온을 바라보는 시종은 급기야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실내에 들리고 나서야 비로소 레디미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떠난 줄 알았던 레스터 카이사르가 돌아왔다. 분명 그 수많은 사절단 인원을 버리고 올만한 커다란 이유가 있었겠지만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고 그럴수록 불안한 마음은 커져서 평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초 기대하지 않았던 평화였지만 이처럼 흔들리는 감정은 없었다. 「레스터를....... 아니야. 그를 만나면 뭐한담.」 「말씀을 전해드릴까요?」 「아니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과 표정이 정 반대라 시종은 난감했다. 간절한 표정이 절절히 드러나고 있는 얼굴에 비해 목소리는 냉정해서 바라보는 자신도 안타까웠다. 레스터가 돌아온 지 8일째 되던 밤 레디미온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걱정하는 시종을 뒤로하고 방문을 나섰다. 해가 졌다고 해도 아직은 더운 열기가 남아있는 초저녁이었다. 병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길은 천천히 발을 옮겨 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지를 향해 걸었다. 별궁에 머무는 사내가 자신의 거처를 이탈해 돌아다니는 모습에 길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고 그리고 병사들 사이를 뚫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봐~. 여기는 산책로가 아니라고. 하여간 당신이나 그 꼬맹이나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거야? 겁도 없이!」 「꼬맹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레디미온과 눈을 맞추며 길은 눈살을 찌푸렸다. 타이라 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내의 키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병사들에게 검을 치우라고 하고 둘이 남게 되자 레디미온에게서 봇물처럼 질문이 터져 나왔다. 「아아.. 그렇게 한번에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다구.. 쯧.」 「죄송합니다. 여기 우크란에서 온 사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헤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시종들 입단속을 시켜야겠구만.」 「핫!」 얼결에 말하지 말아야 할 소리를 내뱉은 레디미온이 입을 가리자 길은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한동안 즐거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타이라와 같은 곳에서 왔다는 사내가 생각보다 자신의 흥미를 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알고 싶은데..........」 「흠.. 한동안 폐하와 숙덕숙덕 거리고 있던데..」 「다시 돌아올 만큼 중대한 일이 무엇일까요?」 「글쎄..........가야겠군. 당신도 괜히 오해 받을 짓 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도록 해.」 길이 말을 마치고 일어설 때에 돌아갔던 병사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선두에 선 병사 하나가 왕의 기사에게 허락을 구하듯 보고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의외의 일을 고하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레디미온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커졌고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곧이어 병사들 두 명이 옆으로 섰다. 「나도 가겠다.」 길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고개를 숙였고 이윽고 한 무리의 병사와 길 그리고 레디미온은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본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궁은 여전히 그 웅장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황제가 가신들과 함께 집무를 보는 곳이기도 하였고 대외적으로 황제가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기에 황제궁 다음으로 본궁에는 시녀들과 병사들이 많았다. 약간 굳은 레디미온에 비해 길은 자신의 안방을 거닐 듯 자유스러운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뒤쳐진 레디미온을 돌아보고는 피식 하고 웃었다. 병사들은 이미 길의 성격을 알고 있는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거만해보이지만 가장 친근한 기사로 통하는 길은 홀 안의 저편에 앉아있는 황제와 그리고 자신을 흘끗흘끗 바라보는 가신들을 마주보고는 황제에게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그의 행동은 뒤따라온 레디미온에게 도움이 되었다. 혼자 들어서기에는 역시 두려운 장소인 이곳이 길이라는 사내로 인해 딱딱한 분위기가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할 수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예. 폐하.」 고개를 든 레디미온은 오른편으로 보이는 레스터의 모습에 놀라 순간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에 자신이 이곳에 불려온 이유를 가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가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황제의 오른편에 서있는 레스터가 무엇인가 부탁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자신을 본국에 데려가고 싶어 한다고 할지언정 자신의 사절단을 길 위에 버리고 올 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레스터가 여러 가지 각도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에 황제궁의 무거운 공기가 움직였다. 그리고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일주일 후에 세이카의 책사를 처형한다.」 황제가 일갈하자 황제의 옆에 있던 사내가 낮게 신음했다. 그리고 오히려 당사자인 레디미온은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황제에게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자신의 처형을 말하는 황제에게 뜬금없는 답변을 돌리는 그를 보며 몇몇 사람들은 의아함에 눈을 찌푸렸지만 이윽고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세이카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사라지자 황제를 바라보는 레스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이윽고 호흡을 가다듬는 듯 두어 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원망어린 말투로 물었다.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그대의 조언에 감사한다. 덕분에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군. 물러가라!」 휘익~ 무례하다고 할 걸음으로 홀 안을 빠져나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길은 커다랗게 눈을 떴다. 그리고 황제가 나직하게 내 뱉는 말에 낮게 신음했다. 「화형이 좋겠군.」 황제가 미쳤다. 길의 눈동자에 슬픔이 어렸다. 예전의 황제가 아니었다. 비극적이게도 그는 이성을 잃었다. 「마침 잘 되었군. 그대는 책사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도록.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리 조심해두어도 좋을 것이야. 후훗.」 황제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젖어 길은 사시나무 떨 듯 떨기 시작했다. 그가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황제라는 커다란 굴레를 쓴 그저 강한 사내라고 생각했던 길에게 그는 이제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죽겠다. 왜 이렇게 넓은거야! 얼마나 남았지?」 「이헤르대로 근처까지 도착하면 금방입니다. 이곳에서 머물고 몇 일후면 도착하실 겁니다.」 「술한잔 하겠느냐?」 「아니요. 술은 하지 않습니다.」 도착한 여관에서 여장을 풀며 노곤한 마음을 달래려 독한 술을 시켰다. 여장을 풀지 않은 여자를 바라보며 옷을 벗으라는 권유도 할 수 없는지라 오토는 독한 술을 혼자 홀짝홀짝 들이켰다. 무엇인가 공통의 화제가 없어서 어색하던 찰나에 여자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 옷은 그만 벗지 그러냐?」 「아..!」 난감했다. 최초 사막의 도시에서 구한 검은 가루를 다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 더 이상의 여분을 사러 나가기에도 지쳤다. 그렇다고 사내의 말처럼 둘레둘레 감고 있기도 난감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호기심에서 의심으로 변하고 있었고 자신도 더 이상 덥지도 않은 날씨에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또 나가려는게냐?」 오토는 자연스럽게 여자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날카로움을 숨길수가 없었다. 행여나 여자가 또다시 나가서 누군가를 죽이고 온다면 병사들에게 들키는 것보다는 여자의 마음이 먼저 무너질 것만 같아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후훗.. 걱정 마세요. 이미 라투야는 저의 배신을 알았을 것입니다. 일행을 다 돌려보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라투야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오토님의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럼. 그 뒤는?」 「........?」 「리젠을 찾고 난 다음 넌 어떻게 할 거지?」 「..............」 「혹시 갈 곳이 없다면... 우크란으로 가자.」 하아.........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나. 저 사내의 투명한 눈동자에 해줄 말이 없었다. 손에 물든 피가 심장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었다. 「주무십시오.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사내가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누구도 헤치지 못할 여린 눈빛. 가슴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눈동자.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여관의 방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조용하게 닫혔다. 오토는 마지막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여관의 홀 안에서 홀로 앉아 있는 타이라에게 여관 풍경은 그림처럼 느껴졌다. 시원한 술을 목뒤로 넘기는 사람. 이미 곤드레만드레 취해 탁자위에 쓰러진 사람. 술을 나르는 종업원을 괴롭히는 사람. 입안가득 음식을 넣고 씹는 사람. 그리고 웅성거리는 목소리. 살아있는 사람들... 탁! 하고 탁자를 내려치는 손이 보였다. 「왜..」 「너무 머리가 아플 때는 종종 마셔도 좋다.」 「훗.. 그럼 오늘 못 주무실텐데..」 「까짓것.. 한숨 못자도 좋아.」 흔쾌히 대답하는 여자와 함께 방으로 올라간 오토는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독한 술을 주문했다. 물론 눈살이 찌푸려지는 여자의 얼굴을 무시했다. 어찌되었던 같이 술을 마셔본 경험이 전무 했기에 이왕 마시는 것이라면 불안한 순간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취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의 소년을 찾거든 재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셔야합니다.」 「당연하지. 걱정마라.」 「그리고... 저와 만났던 시점부터 모든 사실을 잊으셔야합니다.」 「너를 잊으란 말이냐?」 「예.」 「기억할 무엇이나 보여줬냐?」 「훗.. 딴에도 그렇군요. 평안한 삶을 영위하고 싶으시다면 집시 무리와 합류했던 순간부터 기억에서 지우서야 합니다. 가능하십니까?」 「약속하지.」 탁자위의 술과 몇 가지 곡식을 말린 안주를 바라보던 여자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작은 손을 들어 터번을 잡아 쥐었다. 새삼 여자의 얼굴이 궁금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단호한 눈동자는 무엇인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긴장감이 싫어서 오토는 술잔을 잡아 쥐었다. 어느 정도 마신 술이 취기를 가져와 여자만 아니었다면 당장 쓰러질 정도로 노곤하였지만 잔잔하게 스며드는 긴장감으로 인해 오토는 또다시 술잔을 들고 술을 삼키고 있었다. 스르륵.. 땅으로 여자의 옷가지가 떨어졌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긴 천이 땅으로 떨어졌고 한번 보았지만 잊혀지지 않은 얼굴과... 그리고 자신의 리젠과 같은 금색의 머리칼이 가지런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어색한 느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술잔을 든 채로 굳은 사내의 눈동자를 마주봐주다가 앞에 놓인 술을 들어 입안으로 넘겼다.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독한 술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싸한 느낌은 안겨주었다. 화끈할 정도로 독한 술. 그리고 그 냄새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향이 입안에서 감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내의 눈동자 속에 들어있는 수만 가지 질문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 「선체로 주무셔도 좋지만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셨으면 좋겠군요.」 「하..하지만!」 「황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저와 오토님 둘 다 자격이 없지요. 일단 오토님은 황제궁에 선납할 금발노예가 있다고 하시고 궁 안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헉.. 이럴 수가!」 「네. 이 머리색은 진짜 제 것입니다. 황제에게 보고를 올릴 때까지 적어도 3일정도 소요됩니다. 그 사이에 제가 라나궁에 들어가서 원하시는 소년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계획은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조각이 딱딱 맞았다. 아니 그렇게 들렸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황제에게 선납할 조건에 금발소년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황제궁에서 바라는 것은 금발이며 소년이어야 한다. 흔치않은 아름다운 머리칼이긴 하지만 여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가 해줄 수 있다고 장담할 만 했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훌륭한 대역은 구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안도감도 아닌 떨떠름한 기분으로 이미 취기에 쓰러져 잠든 여자를 바라보았다. 살포시 감은 눈썹이 살짝살짝 떨렸다.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여자를 안아들었다. 가벼운 무계감이 느껴졌고 그리고 내려놓을 때까지도 미동이 없었다. 침대위에 죽은 듯 쓰러진 여자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았어. 오늘 자기는 틀렸군.」 여자를 침대위에 올려놓고 오토는 또다시 술을 마셨다. 이미 한참을 마셨는데도 취기가 오르는 대신 신경만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흘끗.. 다시 한번 바라보는 오토의 눈동자 안으로 창안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 여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고요한 공기가 내리 누르는 느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고 홀 안으로 내려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어갔고 일부 사람들만 남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운가?」 깊은 밤. 레디미온 머무는 궁안으로 황제가 나타났다. 수행원으로 기사 한명만을 동반하고 나타난 그를 바라보며 레디미온은 희미하게 웃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폐하.」 「자네의 기사는 지금 잠도 못 이루고 있더군.」 「...........」 「그와 약속을 했지. 타이라를 찾는 대신 그대를 우크란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미 찾으셨지 않습니까?」 황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먼 곳을 바라보듯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그리고 다시 자신을 바라보았다. 「하늘아래 살아있다면 어디든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 일말의 희망이 없었다면 모두 죽였을 거야. 쥘 수 없는 것이 더 탐난다고 했던가? 내게 그는 그런 존재야.」 「사랑하십니까?」 「글쎄. 이제 그 감정을 확인할 때가 오겠지.」 「.......그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훗.. 그렇다고 하면 그대는 자신의 죽음을 편히 받아들일텐가?」 레디미온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물론입니다.」 황제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는........」 황제가 떠난 뒤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방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레디미온은 빨개진 눈동자로 들어서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숨을 헐떡이며 성난 표정으로 다가와 레디미온의 팔을 잡았다. 「나가자. 저자는 미쳤어.」 「어디로 간단 말이죠?」 「............」 「지금까지 살려준 것도 감사할일입니다. 그는 지쳤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정신을 잡기위해 가장 빠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제가 죽는다면... 타이라는 처형장에 오겠지요. 그럴 것이라고 믿어요. 얼굴이 보고 싶어요. 나의 타이라. 그렇게 떠나보내는게 아닌데....」 「안돼!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여기는 세르판이고.. 황제의 말은 법입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레스터.」 쫓겨나듯 밀쳐진 레스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초연하게 말하는 황제나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레디미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황제와 약속이고 뭐고 간에 그를 우크란으로 데려갔어야 했다고 후회하듯 욕을 내뱉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없이 작아 보이는 레디미온의 어깨가 그날따라 더 초라해보였다. 레스터는 황급히 발을 옮겼다. 시간이 없음이 아쉬웠다. 황제가 말한 처형 일까지 이 밤만 지나면 7일의 여유밖에는 없었다. 그전에 무엇인가 수를 써야만 했다. 8. 다리를 다친 병사를 돌보던 헤론은 이른 새벽부터 들이닥친 사내를 바라보고 기운 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빗지도 않은 헝클어진 머리부터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옷 모양새를 보니 날이 새기만을 기다린 듯했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잘 웃지 않는 헤론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큰일 났어. 헤론. 이건 키리온이 죽은 것보다 더 큰일이야!!」 키리온 실버리안의 죽음을 아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황궁에 그 사실을 알리러 온 병사는 물론이고 그 근처에서 그 사실을 들었던 모든 이에게도 모두 함구령을 내렸다. 그만큼 쉬쉬하는 중대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모습에 헤론이 꾸중하듯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았지만 길에게는 별로 중대하지 않은 일인 듯 아무렇지도 않게 헤론을 향해 다시 한번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젯밤에 폐하가 저기 별궁의 사내를 처형한다고 하셨어! 이게 어찌된 일이지? 지금까지 계속 그냥 두었잖아. 왜 갑자기 죽인다는 거야?」 「어젯밤에 말인가?」 「그래. 헤론. 농담이 아니라고. 그 우크란에서 온 사내랑 며칠동안 숙덕거리더니만 결국 이렇게 됐다니까!」 「기이한 일이군. 라나를 찾으셨는가?」 「그게 이거랑 무슨 관계가 있어?」 「흠...... 폐하께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면 짐작 가는 것이 없군. 그는 원래 죽은 목숨이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그 사내에게 관심이 있는겐가?」 「에잇!! 무슨 소리야. 이 늙은이야! 젠장~ 하여간 도움이 안돼!」 처음 왔던 그대로 화를 내며 사라지는 길을 바라보던 헤론은 병사의 발목을 천으로 감싸주었다. 배어나오는 핏물이 하얀 천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라고 숨기려 해도 어느 순간 배어나오기 시작하면 붉은 핏물처럼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라고 사람의 마음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를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은 지울 수 없는 것이라고 헤론은 혼자 되뇌었다. 키리온 실버리안이 암살된 사실을 함구한 황제는 그 죽음으로부터 무엇인가 결론을 얻은 듯 했다. 물론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크란의 사내 또한 무엇인가 중요한 사실을 황제에게 알려준 것은 틀림없었다. 그가 황급히 궁성에 도착한 이후로 황제는 집무도 미루고 몇 일간을 그와 함께 본궁의 집무실에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였고 그 이후로 한동안을 나라 안팎 무수히 깔린 병사들도 모두 회향시켰다. 「어디보자. 망할자식. 어디에 있더라?」 본궁으로 난 풀밭의 길을 걸으며 길은 씩씩거렸다. 새벽의 공기는 시원했다. 건물 사이에 놓인 돌길을 벗어나 풀숲을 마구 밟으면서 그는 발끝에 스치는 풀을 짓이겨 버렸다. 화가 치밀었다. 누가 죽던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카라는 이름 하나로 무한정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밤사이 잠을 이루지도 못하고 타이라 세이카가 사라진 시점부터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을 하고 또 하고 그리고 다시 그 원인을 따져보아도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결론을 내렸다. 우크란에서 온 녀석이 분명했다. 분명 황제는 세이카의 사내를 죽일 의도가 없어 보였다. 갑작스럽게 세이카 사내가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그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황제의 심기를 거슬린 그 사내밖에는 없었다. 쿵! 하고 방문을 거세게 발로 찼다. 예의 따위는 이미 물 건너 간지 오래였다. 있는 힘껏 성질을 담아 그 안에 누가 있던 관여하지 않았다. 창문 옆에서 그 사내를 발견한 순간 길은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크란 사내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가격했다. 퍼억.. 소리와 함께 사내가 나뒹굴었다. 다행히 운동신경이 좋았는지 입술이 찢어진 상처를 제외하고는 사내의 다른 부분은 무사했다.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서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자신을 후려친 사내를 쏘아보았다. 바라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말을 하기 전 그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냈다. 「미친 황제에 정신 나간 기사라...」 사내의 말에 길은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 미친 황제라... 그는 겁도 없었다. 「미친 황제? 겁도 없군.」 「그래. 여긴 제정신 가지고 사는 사람이 없는 거냐? 아침부터 주먹질이라.. 기가 막히는군.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일투성이에 미치겠구만.. 안지 그래?」 사내는 선선히 자신의 방안에 놓여있는 의자를 내밀었다. 길은 씩씩거리던 숨을 고르고 털썩 하고 의자위에 몸을 맡겼다. 사내가 잔을 내밀었다. 술이 아니고 차라는 점에서 달갑지는 않았지만 사내는 의외로 매우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도대체 황제폐하께 무슨 말을 한거냐? 너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죽게 생겼잖아!」 「이건........... 또 무슨 함정이지?」 사내의 여유 있던 표정이 순간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잡아 뺐다. 칼집을 벗어난 칼날이 얼마 되지 않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길은 무기를 들고 있을 수 없는 사내의 입장보다도 함정이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가 집은 단도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사내의 눈동자의 빛이 매서웠다. 「세이카의 사내를 말하는 것이다. 다들 함구하지만 너희들이 세이카를 쥐고 흔든 것은 사실이지 그 때문에 세이카의 왕자도 저기 별궁에 잡혀있는 사내도 제명에 못살게 생겼다. 이 미련한 작자야. 그 검은 치우시지? 기사가 폼으로 있는 줄 아시나?」 한동안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기가 흐르는 듯 공기조차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움직이지 않을 듯한 둘 사이의 침묵의 공간을 깬 것은 황궁기사 길이었다. 「말해봐라! 무슨 말을 했기에 황제가 별궁의 사내를 처형하는거냐?」 「참 희한안 일이군. 나도 알 수가 없다. 세르판의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레디미온은 자신이 죽으면 타이라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게 관계있는 것인가?」 「타이라?」 「그래. 세이카의 왕자라더군. 그를 보기 위해 나의 레디미온을 죽인다니.. 빌어먹을.」 「나의 레디미온?」 길은 그의 말속에 녹아있는 별궁의 사내에 대한 애정 어린 표현에 당황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 짚어도 단단히 잘못 짚었다. 그의 말 때문에 세이카의 사내가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일투성이에 길은 머리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의 말속에는 그렇게나 보고 싶던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름도 섞여있었다. 감격하고 기뻐할 시간이 없음이 한탄스러웠다. 「우크란의 귀족들이 죽었다. 그 방향을 보건데 점점 북으로 가는 듯했고 그 방향이 세르판을 향해서 세르판의 황제에게 알려주었지. 마침 내가 도착했을 때에 병사가 세르판 귀족의 죽음을 알려오더군. 그 후 황제가 레디미온의 처형을 말했다. 나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지.」 탁! 하고 검을 탁자위로 꼽으면서 레스터는 일어났다. 으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향을 맡았을 때에 생기는 고통처럼 지끈하고 무거운 두통이 머리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눈앞의 사내의 모습에 타이라는 낮게 신음했다. 그는 밤사이 한숨도 자지 못한 듯 초췌해보였다. 「밤새 그러고 있었나요?」 몸을 일으킨 타이라는 스르륵 미끄러지는 천 사이로 상반신이 벗겨져 있음에 놀랐다. 사내는 이제 별 감흥이 없는 듯한 무표정한 표정이었다. 「술을 엎질러서...... 옷을.. 젠장! 네 정체가 뭐야!」 「하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늦었어요.」 「마셔라. 머리가 아플거다. 네가 가진 것처럼 특효약은 아니더라도 효과는 있겠지. 옷을 구해 오마.」 오토가 밖으로 나간 뒤에 타이라는 조심스럽게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세르판 영지를 밟은 지 오래되었고 지금쯤이면 곳곳에 군사가 깔렸으리라는 자신의 생각을 비웃듯 거리는 한산하고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오토가 돌아온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멍하니 침대위에 앉아있는 타이라에게 옷을 건냈다. 옷을 받아들면서 타이라는 살풋 웃었다. 가리고 있을 때에도 당당히 잘만 바라보던 사내가 눈을 자꾸 피하는 모습에 짓궂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리젠하고 비슷한가요?」 「아니야! 헉.. 그런데 네가 리젠을 어떻게 알아?」 「글쎄요. 당신이 술만 마시면 부르는 이름을 어찌 잊을까요?」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순간 화가 나는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옷을 입는 타이라를 마주보았다. 「너야말로 아레슨가 뭔가 하는 놈은 누구냐!」 여유롭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였다. 조금 전의 미소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소년은 날카로운 눈빛을 품고 다가왔다. 금색의 머리칼과 어울리는 파란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만 가득했다. 가느다란 손을 들어 마주선 오토의 목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행동에 오토는 그 손길을 내치지도 못하고 빳빳이 굳었다. 스치던 손가락이 순간 멈추었고 지그시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아픔이 목으로부터 전달되었다. 「저처럼 가는 손가락을 가진 사람도 체중을 실으면 간단히 사람을 죽일 수 있죠.」 소년은 차갑게 내쏘듯 말하고 오토가 가져온 옷을 조심스럽게 입었다. 오토는 타이라가 짚은 목 부근을 잡고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목 부근의 그의 손가락이 닿은 안쪽으로 부드러운 뼈가 만져졌다. 여관의 홀로 내려와 늦은 아침을 주문한 오토와 타이라는 사람들의 시선에 한동안 몸살을 알아야했다. 최초 머리칼을 가려주었던 천이 재거되고 나자 사람들은 또 황궁으로 가는 또 다른 소년을 보며 저들끼리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눈두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타이라를 보며 오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그들이 오는 시간보다 궁으로 가는 쪽이 더 먼저이니 소문이 돌든 관계없습니다. 그것보다 이제부터는 빨리 궁에 도착해야겠습니다. 이맘때쯤 축제가 있는데 그 기간이 되면 더 일이 복잡해질 테니 빨리 가도록하죠.」 이맘때가 축제라.. 어찌 그것을 아는지 아니 어쩌면 자기 집 드나들 듯 편안한 마음인지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철썩 같이 여자라고 믿고 있던 일행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연이은 충격으로 인한 오토의 머릿속은 정상적인 생각을 거부했고 현실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여관주인은 담갈색의 차를 내왔다. 세르판에서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지만 사람들이 식사 후에 종종 마시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풍습인 듯 했다. 찻잔의 마지막 방울까지 입안에 털어 넣었을 때 해는 오후를 향해 그 밝은 빛을 아낌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릴 때마다 훅훅 하는 뜨거운 공기가 몰려들어왔다. 들어서는 사람들이 흘끗 시선을 던지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을 주문했다. 타이라가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한걸음 옮겼을 때에 마침 여행객인 듯한 사내 두 명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타이라와 오토 둘 다 갈 길이 황급했기에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평소의 자신의 외모를 안주거리 삼아 하는 이야기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내뱉는 말이 평범한 여행객들이 주고받는 말이었다면 분명 지나쳤을 타이라는 세이카라는 잃어버린 조국의 이름이 나오자 달라졌다. 「안 그래도 조용한가 싶더니만... 세이카의 병사들을 처형한다며?」 「뒤늦게 그것도 하필이면 축제 전에 할 것은 뭐람. 병사들이 좀 사라지나 싶더니.. 쯧.」 타이라의 발이 멈추자 오토가 재촉했다. 그리고 둘은 여관을 벗어났다. 벗어나는 순간 온 곳곳에 처형장과 사형수의 명단이 곳곳에 붙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욱.. 벽에 붙은 종이를 찢어 내리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죽여 버리겠어!」 파르르 떨리는 음성이 떨어지는 종이조각 사이로 흩어졌다. 체력적으로는 자신 있다고 자부했던 오토도 악으로만 달렸던 타이라도 황궁의 근처에서 뻗어버렸다. 숨을 몰아쉬는 커다란 갈색의 말도 그리고 죽을 듯이 신음하는 사내도 타이라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듯 뛰고 있는 심장은 불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가파르게 움직였고 오랫동안 잡고 있던 고삐를 놓는 순간 투두둑 소리를 내며 몸의 신경 마디마디가 끊어지듯 아파왔다.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신이 가여웠다. 한없이 원망스러운 그보다 그런 그를 끝없이 갈망하고 있는 자신도 증오스러웠다. 그 증오의 끝은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여행의 끝을 위해서라도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라도 커다란 대륙의 그가 살고 있는 궁으로 가야했다. 아직 처형일 까지 여유가 있었다. 촉박한 여유지만 그 안에 결판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내야만했다. 이제 더 이상 소중한 것을 잃을 수는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황금의 궁전으로 향하는 가장 단거리의 길을 목전에 두고 타이라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궁전의 길을 쉼 없이 달려온 오토에게 반짝이는 장신구를 내밀었다. 손안에 든 아름다운 장신구와 타이라를 번갈아보던 오토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꽤 값이 나갈법한 장신구였다. 아름다운 치장의 그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는 오토를 보며 타이라가 나직이 말했다. 「만약 위험에 처하거든.. 황제의 기사 중 길을 찾으십시오. 그에게 보여주면 됩니다.」 「이게 뭐지?」 제법 말이 늘었다 싶었는데 조개마냥 입을 다물었다. 그저 묵묵히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소년의 음성을 들었다. 리젠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전혀 달랐다. 예리한 단도의 그 칼날처럼 다가서지 못하게 날을 새운 소년의 모습은 오히려 아름다웠다. 절벽위의 꽃처럼 위태해보였고 꺾을 수 없기에 고귀해보였다. 「황제가 찾는 것이 너구나...」 오토는 자신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를 아련히 바라보았다. 뜨거운 바람이 그들 사이로 휘익 불어 나갔다. 여행의 목적이 순간 잊혀졌다.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냐?」 오토의 나직한 말에 소년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오토의 눈에 비치는 소년의 모습은.. 궁성의 육중한 문이 열렸다. 궁성으로 통하는 길목 앞에서 궁 안으로 전언을 한 오토에게 병사가 길을 안내했다. 들어서는 순간 커다랗고 웅장한 건물 앞에 시선을 잃어버린 오토를 바라본 병사는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리고 몇몇의 또 다른 궁인들이 오토의 마차 앞에 섰다. ‘ 되도록 천박한 말투 구사하십시오. 몸에 밴 습관도 가급적 신경을 쓰시고 앞으로 전 오토님의 노예입니다. 제가 일러드린 말씀 절대 잊지 마십시오. 제가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오토님은 놀라거나 어색해 하지 않으셔야합니다. ’ 순간 머리를 스치는 말이 생각이 났고 그리고 오토는 긴장했다. 병사는 오토와 타이라의 앞으로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한두 번이 아닌 일인지라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만 신기한 것은 사실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안내한 궁 안의 방에 그들을 두고 떠났다. 이윽고 상급 시녀가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은 없었다. 궁은 워낙에 넓었고 그리고 안면을 익힐 만큼 많은 시녀를 만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타이라의 얼굴은 얇은 천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오토는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긴장감에 말이 재대로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그렇게나 뻣뻣하게 굴던 자신의 일행이 고개를 푸욱 숙인상태로 발치에 엎드려있었다. 노예임을 표시하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운 옷과 등위로 흐트러진 금색의 머리칼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조건에 딱 맞을 경우는 일천 다니르입니다.」 「일천 다니르?」 오토는 놀라서 반문했다. 자신이 집시의 일행에게 준 돈은 장난 같아 보였다. 이러니 신종 사업이 생길만도 하다고 오토는 속으로 욕을 해댔다. 시종은 오토의 옆에 미동도 하지 않는 소년의 얼굴을 들어 바라보았다. 「나이는 어떻게 되지요?」 「제길... 어떻게 알겠수. 고아라는데.. 그래도 17세임을 노예시장에서 확인 했수다.」 오토는 자신의 얼굴이 벌겋게 변하지 않았기를 빌었다. 천박한 말투를 내뱉는 사내를 바라보는 시종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리고 늘 그랬듯 이런 치들은 돈을 주면 금방 나 몰라라 궁성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하급시종을 불러 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됐습니다. 돈을 받으시는 즉시 궁 밖으로 병사가 안내할 것입니다.」 「안돼!」 ‘ 궁 밖으로 나가라고 할 경우 반대하십시오. 어떠한 이유를 들어도 좋습니다. 오토님의 재주에 맞기겠습니다. 알려드린 퇴로를 기억하시고 제가 드린 물건을 잘 간직하십시오. ’ 「무슨?」 「저 애는 내가 아끼는 애야. 잘 있는지 확인 후에 떠나겠소. 젠장.. 돈은 나중에 줘도 된다고. 나도 사정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내 자식 놈과 같은 녀석이야!」 시종은 다소 당황한듯했다. 나이차이가 얼마 되지도 않아 보이는 작자가 방방 뜨면서 자식 같은 놈이라고 하면서 남겠다고 하니 당황할 만도했다. 그렇지만 그를 내쫓기에는 데려온 소년의 조건이 너무 좋았다. 금발의 머리에 17세의 소년이라면 황제폐하가 찾는 조건과 거의 비슷했다. 시종은 잠시 생각을 했고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하루 동안 머무실 시간을 드리지요. 내일 오전 중에 출발하십시오. 절대 궁 안을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하하핫. 그럼 이왕 온 김에 저쪽으로 보내주시면 안되겠수? 저기 경치가 제일 좋구만!」 서쪽궁을 가리키며 오토가 말했다. ‘ 서궁 뒤편에 라나궁이 있습니다. 서궁에 계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제가 알려드린 길을 잘 외우세요. 여차하면 퇴로를 타고 나오실 때도 그곳이 가장 좋습니다. 라나궁에서 밤이 되면 제가 리젠님을 구하겠습니다. 라나궁 앞에 두 명의 병사가 있습니다.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운이 좋기를 바라지요. 자 받으세요. ’ 오토는 허벅지 안에 숨겨진 단도를 생각하고 몸을 굳혔다. ‘ 비상용입니다. 만약 탈출이 어려워지시면 제가 알려드린 방으로 가시면 황제의 기사가 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 그리고 방을 나서는 오토에게는 병사가 서궁으로 가는 길안내를 타이라에게는 두 명의 시종이 함께했다. 사라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오토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려웠다. 들어선 방에서 바로 또 다른 건물이 보이는 특이한 구조를 보며 길을 잘 알고 있는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계획을 생각했다. 몇 번을 둘러보아도 복잡했다. 그리고 병사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상황과 아무것도 할 것 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도 답답했다.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밤은 쉽게 찾아왔다. 그 밤의 어둠을 틈타 오토는 시종을 불렀다. 귀족의 품위를 버린 고래고래 고성을 섞은 말투에 시종이 찡그린 얼굴로 들어왔다. 「여긴 술도 안주나?」 즉각 대령이었다. 그리고 오토는 밖을 내다보았고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흠흠... 이보시오 혼자 마시기 참으로 어색하구먼 잠시 들어와 보시겠소?」 병사는 주위를 두 번 둘러보고는 들어왔다. 그리고 탁자위의 술병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성 안을 지키는 병사는 커다란 긴박감이 없었다. 전쟁 중도 아니었고 일개 시민이라는 생각에 긴장을 푼 상태였다. 탁자위에 따라놓은 술잔을 집어 들면서 병사가 말했다. 「당신은 어쩌자고 노예를 파셨소? 쯧.. 분명 얼마 있지 않아 죽을텐데..」 「뭐요? 죽는다니?」 혹시 리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토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지 않았기를 속으로 빌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술잔의 술을 넘긴 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오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는 소년과 짠 계획이 잘 들어맞았다. 잠이든 병사를 자신대신 침대위에 올려놓고 머리까지 푸욱~ 모포를 덮고는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오토가 방을 빠져나온 때는 달빛조차 희미한 한 밤중이었다. 그는 유유히-마음은 그렇지 못했지만-서궁의 긴 복도를 빠져나와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며 걸었다. 최면 향에 익숙해졌다고는 하나 그것과는 또 다른 향기가 라나궁에 가득 흩어졌다. 어두운 복도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간혹 지나가는 발소리도 나지 않는 시종들은 이제 어두운 밤이 되고 나니 그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방안을 훑어 내렸다. 기억을 더듬자 괴로운 추억이 생각났다. 고요한 실내 곳곳을 돌며 방문을 살짝 열어 실내를 확인했다. 이곳의 하인들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의 인기척에 그 누구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다. 잠이 들었거나 자신만의 추억에 빠진 사람들.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기 힘들었다. 체력이 남아도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는 것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체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한동안의 탐험 후에 방 한구석 기대어 앉은 소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과 같은 머리색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슴한구석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에가 다가갔다. 들어서는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리젠?」 「누구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보며 라나궁의 소년이 대답했다. 「우크란으로 돌려보내줄게.」 반응이 있었다. 우크란을 기억하는 듯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그는 괴로워 보였다. 「일어나! 설수 있겠어?」 예전 라나궁에서 만났던 사내가 기억나 타이라는 그의 체력이 어디까지 버티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의 정신도 흔들리는 만큼 그를 업고 뛸 만한 힘은 없었다. 자신의 발로 서서 이 암흑의 궁전을 나가야만 했다. 리젠의 손은 차가웠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었다. 우크란으로 돌려보내준다는 말 한마디에 일어나기는 했어도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시달린 그에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한다는 사실이 그를 두려움에 젖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분명했다. 그가 일어섰고 방안의 불빛이 눈에 익어갈 무렵 타이라의 눈에 비친 소년의 흐트러진 모습에 타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파!」 순간 자신도 모르게 리젠의 손을 힘껏 쥐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타이라는 자조하듯 웃었다. ‘ 기다리세요. 그리고 시간이 되면.......... ’ 기다려도 리젠과 그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에 오토는 기다리라고 한 장소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고 그리고 조금씩 라나궁으로 발을 옮겼다. 어두운 밤이었고 병사의 옷차림인지라 자신의 심장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밤의 기운도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구름에 가린 달도 그를 돕는듯했다. 라나궁의 입구에서 두 명의 병사를 보았다.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초조한 마음에 병사에게 다가갔다. 잡혀간 노예들이 다 죽었을 것이라는 병사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오토의 신경은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제 겁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왜 어슬렁거리는 것이냐! 여긴 출입금지다.」 병사 하나가 어둠 속에 서있는 오토를 향해 소리쳤다. 멀리서 서있는지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 황제폐하께서 훈련장으로 집합하라고 하셨다.」 「폐하께서? 이상하군.」 「빨리 가지 않으면 참수형이다.」 목숨을 걸고 거짓을 고하는 오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의외로 그들은 허둥지둥 하더니 재빨리 뛰어나갔다. 그 길로 궁 안으로 들어선 오토는 숨을 쉴 수 없는 공기에 기침을 해댔다. 어두운 복도 끝으로 한참을 더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소리로 부를 수 없었고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오토의 온몸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 있어 끈쩍하고 불쾌한 기분이 온 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복도의 끝 즈음에서 걸어 나오는 리젠을 볼 수 있었다. 「리젠!!」 「오토님!」 타이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타이라의 반응으로 인해 오토는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리젠과의 상봉을 이름 부르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다. 「바보 같은! 죽으려고 작정한겁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 병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훈련장 집합이라고..........」 「젠장.. 시간이 없어. 빨리 나가요!」 화를 내는 타이라에 기에 밀려 오토는 황급히 밖으로 향하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복도 입구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곳의 시종은 절대로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병사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귀에 들려왔다. 다급한 나머지 타이라는 오토와 리젠을 바로 옆에 보이는 방문으로 밀어 넣었다. 「조용해지면 이 옷을 입혀서 밖으로 나가요. 어제의 시종에게 노예는 팔지 않겠다고 하시고 궁 밖으로 나가십시오. 절대로 위험하다 싶은 일은 하지 말아요.」 쿵! 하고 방문이 닫혔다. 자신의 옷을 벗어 주고 타이라는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폐하.. 이 시간에는 어인일로.」 라나궁을 찾은 그들의 황제를 보고 병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훈련장 그 어디를 둘러봐도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고 다급한 마음에 라나궁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잠시 후 황제가 나타났다. 그들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누르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긴 복도 끝으로 예의 그 방으로 황제가 걸음을 옮겼다. 울적한 밤이 계속 되었고 약속한 처형일이 하루 전이었다. 그의 음울한 기분이 전이된 듯 하늘은 달빛조차 내리지 않은 상태였고 라나궁의 공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마찰음과 함께 어두운 복도의 방문이 열렸다. 조용한 실내에 미동도 없이 누운 소년을 바라본 황제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덥혀진 모포 위로 금실의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9. 라나궁의 오묘한 구조는 세르판 궁전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밖으로 나가는 길이 미로처럼 어지러운 곳이었고 길을 찾기 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묘하게 흐르는 공기에 취해 쓰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라나궁을 두려워했다. 라나궁의 시종들은 라나궁으로 들기 전에 적어도 6개월에서 길게는 1년간 일정량의 향을 계속취해 어느 정도 몸의 내구성을 만들어 시중을 들기 부족함이 없게 몸을 단련했다. 필연적으로 라나궁에 머물러야 하는 황제에게는 어려서부터 그 향에 중독이 되지 않는 훈련과 독에 대한 훈련 그리고 여러 명의 의관이 황제의 건강을 살피게 되어있었다. 기실 그 라나궁에서 안전한 자는 황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때로 라나궁에 피우는 향의 재료는 고문용으로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황제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위협적인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방안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나무로 된 바닥으로부터 아름다운 실내 한편에 놓인 침상과 그리고 탁자. 라나들은 그렇게 자신의 생활공간에 익숙해져갔다. 그들에게는 그 공간에서의 생활이 전부였고 외부인과의 만남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자신만의 생활로 행복을 느껴야했다. 비록 단명할지라도 찾는 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꽤 빠른 속도로 뛴 탓에 기운이 탈진된 상태였다. 많은 생각이 일순 멈추었고 심장만 굉장한 속도로 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자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겉옷은 이미 리젠을 위해 벗어주었고 남아있는 옷가지로는 몸을 가리기가 여의치 않아 가급적 모포를 사용해 머리끝까지 감은 상태였다. 들어선 사람은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숨을 고르고 손안에 든 단도를 꽈악 그러쥐었다. 입술을 깨물고 감았던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실내에 감도는 향이 신체에 주는 효과는 상당했다. 떨리는 흥분감과 그리고 초조함. 미칠 것 같은 긴장감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깼으면 일어나지 않겠느냐?」 실내를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느낌도 잡을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매 순간순간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앞에 있다. 「훗.... 오늘은 나가고 싶다고 울지도 않는군.」 좀더 가까워진 그 목소리가 나를 흔들었다. 단도를 쥔 손의 힘이 풀렸다. 다가오지 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비명이 몸속에서 아우성쳤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나가주기를 바랬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우크란의 사내만 아니었다면 그와 이렇게 대면할 일이 없었다. 이렇게 라나궁의 침대에 누워 가슴을 졸일 필요가 없었다. 황제를 만나야 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이 상황은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했다. 이를 갈듯 오토를 원망해도 차라리 그가 아무 문제없이 탈출하기를 바라는 것이 나았다. 오토의 탈출을 도운 뒤에 레스터를 구하고 그리고 마지막 일을 마무리 지을 요량이었다. 괴로웠다. 남아있는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이 시간에 찾아온 황제의 의중을 굳이 생각지 않으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에 대한 증오가 피어올랐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그러니............ 다가오지 마! 한참을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의자의 움직임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움직임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는 그의 움직임을 가늠하여 문소리가 나길 바랐다. 그렇지만 또 한동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군.」 멀찍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귓전에 울리는 소리에 으앗 하고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의 손이 모포 자락을 거머쥐는 순간 심호흡을 했다. 휘익~ 하고 모포의 반이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비명과도 같은 날카로운 음성이 방안에 울렸다. 오른손에 쥐어진 칼날이 휘익하고 공기를 가르고 아레스의 심장으로 달려들었다. 아레스는 날카로운 칼날의 그 끝을 피하면서 소년의 팔목을 잡아 뒤로 꺾어 내렸다. 으드득.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소리가 울렸다. 뒤로 한껏 꺾인 팔을 내리누르자 반동으로 금색의 머리가 침상에 처박혔다. 가쁜 숨을 내쉬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아레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체가 흐트러져 얼굴을 가린 소년이 통증을 참지 못해 낮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소년은 꺾인 팔이 상당히 아플텐데도 검을 놓지 않았다. 자유로운 왼손은 고통으로 인해 침상위에 깔린 모포를 힘껏 그러쥐고 있었다. 「누가 검을 줬지?」 「으.......으........읏.... 내.......내 것이다.」 뒤로 꺾인 오른팔을 내리누르며 아레스는 흥겨운 기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울적한 기분이 달아나듯 자신 아래 잡힌 소년이 신음했다. 아플 것이다. 꺾인 팔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흐음... 그 검이 네 것이라니.. 시종들의 목을 쳐야겠군.」 「죽......여.............라...........」 「훗.. 소원인가? 죽여주지.」 뚜두둑.......... 「으으윽........」 비틀린 팔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왔다. 실신할줄 알았던 소년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레스는 손을 놓고 한발자국 물러났다. 챙그랑........... 맑은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아.............아읏..........」 타이라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삼키고 침상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내를 피해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어 올렸다. 굉장한 힘으로 비틀린 오른팔을 대신하여 왼손으로 검을 쥘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미성의 목소리가 울리고 마주선 황제는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몸싸움으로 끝이 나자 그에 따르는 고통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부어오른 팔은 움직일 때마다 굉장한 통증을 유발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여전히 변치 않은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렁이는 촛불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렸다. 「검을 치워라.」 낮은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얼굴이 보인다면 좋았을 뻔했다. 「치울 검이었다면 줍지도 않았습니다.」 휘익~ 하고 왼손의 검이 아레스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타이라의 머릿속은 엉망진창 이었다.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눈알가득 고여 안 그래도 어두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한발자국 비켜서는 것으로 자신의 검을 피하는 사내가 원망스러웠다. 검술의 기본이 비어있는 상대의 허를 찔러야 한다는 점이라던가 혹은 자신의 몸이 노출되었을 때에는 한발자국 물러서서 빈틈을 찾아야 한다는 것 등은 이미 있은 지 오래였다. 격하게 내뱉어지는 신음과 함께 거친 숨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몇 번을 찔러도 검은 허공을 가를 뿐 원하는 방향으로 꼽히지가 앉았다. 이윽고 맑은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렀다. 이를 악물고 목으로부터 울리는 소리를 삼키기 위해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우욱.. 하는 절규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아레스의 손이 흔들리는 타이라의 허리를 감아 올렸다. 바둥거리는 몸을 잡아 단단히 끌어안고 잔뜩 힘이 들어간 왼손의 팔목을 위로 잡아 올렸다. 투욱........ 챙그르르... 맑은 소리를 내며 검이 떨어졌다. 「죽여버릴..............흡!」 거칠게 삼켜버린 입술이 마지막 말을 삼켜버렸다. 「이자가 기사님의 명령으로 라나궁에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 뜬금없이 들이닥친 병사와 그리고 얼굴을 가린 금발의 머리에 길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됐다 나가봐라.」 「예!」 병사들이 대답하고 방을 나서자 길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두 명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얼굴은 처음 보는 자였다. 「내 이름을 대고 라나궁에서 라나를 빼다니.. 간이 부었군.」 「아닙니다. 이것을 받으십시오.」 자신에게 내미는 물건을 받아든 길은 사색이 되었다. 본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이 장신구는 라나의 장신구가 틀림없었다. 「네놈이 이것을 왜 가지고 있지?」 「도와주십시오. 이곳을 나가야합니다.」 길은 손바닥위에 놓인 아름다운 귀걸이를 바라보고 그것을 꼬옥 쥐었다. 그리고 사내와 그 옆에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소년의 머리칼은 너무 눈에 띈다. 천으로 가려라. 그리고 궁성을 나갈 때까지 가급적 고개를 들지 마라.」 밤과 새벽의 사이 그 어두운 시각. 왕의 기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본디 암기의 기사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때로 다가서는 자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달아 날 정도로 재빠른 기술을 구사하는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문을 나섰다. 뒤를 따르는 오토는 비로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궁성 밖으로 나오는 일련의 절차를 초조함으로 이겨내고 밖으로 달리는 마차에 몸을 실었을 때에 오토는 비로소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차 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텐데 사내는 굳은 석상처럼 움직임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토는 무릎을 베고 잠든 리젠의 손을 잡고 그를 마주 보았다. 순간 돌아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어색함에 오토는 감사의 인사를 건냈다. 「타이라는 어디 있지?」 「타이라? 아....... 그는 성안에 있습니다.」 「뭐??」 「리젠을 구해주기로 하고 시작한 여행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원래 저와 함께.......」 「마차 세워!!!!!!!!!」 마차는 덜컹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한달음에 뛰어 나가는 사내의 모습에 오토는 잠시 멍해졌고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 마부에게 다시 달릴 것을 명령했다. 어렵사리 빠져나온 곳이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생각나 그는 마부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길은 성안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그 안에 있다면 구해야만 했다. 최초 타이라가 사라졌을 때 마음속으로 그 허전함을 누를 수가 없어 괴로워했다.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도 했었고 그가 사라진 시점에 자신이 궁에 없었던 것을 자책하기도 하였다. 넓은 궁이라는 것을 실감은 했지만 이렇게나 막막하고 갑갑한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디있는거야!!!」 궁과 궁 사이 길도 아닌 곳을 누비면서 욕을 하던 그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새벽 무렵의 쌀쌀한 느낌이 들 법도 하건만 그에게는 찜통 같은 더위만 느껴졌다. 라나궁이다! 순간 사내와 소년이 생각났다. 소년을 구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그가 갔을 법한 곳이라고는 라나궁이 전부였다. 그길로 발도 보이지 않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에에? 여긴 어떻게....... 오늘 무슨 날입니까?」 「허....헉... 안..안에.......들..어..가.. 봐야겠다.」 「네? 그렇지만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합니다.」 「비켜!」 병사는 힘이 없었다. 덩치가 제일 큰 황제의 기사였고 그 성질도 괄괄한 그를 제어할 만한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단지 그 뒤에 벌어질 일이 두려워 말뿐이나마 들어서려는 황제의 기사를 말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길은 궁성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나오는 사내의 모습에 주춤 하고 뒷걸음질 쳐야했다. 「어수선하군.」 「폐.........폐하.」 「헤론에게 황궁으로 들라고 전해라.」 병사들은 대답도 못하고 선체로 굳었다. 황제의 어깨에 둘러매진 소년은 손과 발이 묶인 체 끙끙거리는 신음만 내뱉고 있었다. 입에 물린 재갈로 인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소년은 황제의 등에서 추욱 쳐져있었다. 그러나 길은 알 수 있었다. 그는 타이라였다. 다시 나타난 황제의 라나였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은 곳은 괴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행복한 꿈을 만들어주는 약초도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집시들도 그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부어오른 오른팔과 입을 가로막고 있는 하얀 천 그리고 묶여버린 다리가 타이라를 구속했다. ‘ 훗... 오랜만이구나. 안본사이 사나워졌군. 들고양이라도 되려는 거냐? ’ 자신의 입술을 가로막은 그 입술에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을 만큼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버린 타이라는 그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혀를 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손가락을 대신 입안에 쑤셔 넣고는 자유로운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묶인 천을 풀어 내렸다. 검은 머리칼을 묶고 있던 비단천은 곧바로 타이라의 입을 구속했다. 찌이이익........... 찢어지는 천의 소리와 함께 얇은 모포가 찢겨나갔다. 무슨 짓을? 그 천의 역할이 자신의 다리와 팔을 묶는 도구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단단히 결박하듯 묶어버린 사지를 바라보는 타이라의 눈은 커다랗게 떠졌다. 눈이 깜빡일 때마다 맑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 훗.. 길들이기 힘들겠군. ’ 그는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고 또다시 입을 맞추었다. 비록 천으로 막힌 부자연스러운 입술 위였지만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황제의 어깨에 들쳐 메진 상태로 황제궁에 도달한 타이라를 본 하인들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다.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부터 해서 황제를 바라보면 참수형이라도 당할까 바닥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었다. 타이라는 황제의 침상에 남겨졌다. 억지로 묶인 손이 안 그래도 아픈 팔로인해 더욱 통증을 유발했다. 내려놓는 손길이 부드러웠다고는 하나 입술 밖으로 신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쯧.. 많이 부었군.」 있는 힘껏 꺾어버린 팔이 붓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감상하듯 천천히 침대위에 앉아있는 타이라를 감상했다. 2년만이었다. 사라진 라나가 다시 돌아온 것은. 긴 시간의 여백을 체우 듯 천천히 그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은 만족감이 잔뜩 어렸다. 흡사 배를 체운 맹수와 같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헤론은 기이한 광경에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황제 궁으로 단박에 달려온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오래전 보았던 황제의 라나였다.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살아 돌아온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그는 기괴한 모습으로 커다란 침대위에 앉아있었다. 물려진 재갈과 묶여진 사지는 그가 입은 몇 가지 안 되는 옷보다도 더 눈에 띄었고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은 예전의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타이라님.」 자신의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타이라를 보며 조심스럽게 부어오른 팔을 살펴보았다. 치료를 위해서 묶여진 팔을 풀어야만했다. 황제의 허락을 구하고 풀어야만 할 것 같아 망설이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풀어도 좋다. 어차피 그가 갈 곳은 없어.」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는 명령처럼 단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헤론은 낮게 한숨쉬고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 내렸다. 올이 풀리는 그 하얀 천을 바닥에 버리고 부어버린 어깨관절을 살피기 위해 걸쳐진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등 뒤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종을 시켜 심부름을 보낸 헤론은 시종이 오기까지 마른침을 삼켜야했다. 어색함에 어떠한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런 말도 없는 타이라와 존재감만 잔뜩 풍기는 황제사이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예뻐지셨군요. 타이라님.」 재갈이 없다 해도 대답할리 만무했다. 헤론은 자신이 내뱉고도 어색한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차라리 궁 안의 수많은 의관 중 다른 의관을 보내고 자신은 빠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침착하기로 소문이 난 헤론이 허둥대고 있었다. 「뼈는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야.」 「예. 어깨 관절이 빠진 것 같습니다. 폐하.」 「그래.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이는군.」 자세히 볼 시간이 분명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을 때에 눈이 마주친 타이라는 흠칫 놀라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직은 생각을 정리해야만했다. 그래야만 저 오만한 사내가 함부로 휘두르는 목숨의 댓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회가 아니다. 「헤론. 꼬맹이는 괜찮아요?」 「흠흠.. 이제 꼬맹이가 아니더군. 아.. 이렇게 긴장해보기는 처음이야.」 「괜찮나요?」 길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재차 물었다. 황제궁 앞에 지켜 서서 밖으로 나오는 헤론을 단박에 끌고 간 길은 그를 달달 볶는 중이었다. 「괜찮지 않겠나. 어깨관절이 빠져서 맞춰주었지.」 생각보다 비명한마디 안 내지르는 모습이 독해보였다는 말은 길을 위해서 하지 않았다. 아직도 자신의 동료인 길은 최초의 소년만을 기억하는 듯 했으니 굳이 그에 대한 설명을 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랄 일이군.. 어떻게 찾았을까.. 흠흠.」 헤론의 혼잣말에 길은 화들짝 놀랐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들이 머무는 궁을 향해 걸었다. 둘은 서로 생각이 많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로 인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10. 하얗고 부드러운 모포위에 묶여진 다리를 늘어트리고 아무것도 없는 벽의 한 부분을 계속 바라보는 얼굴은 혈색이 없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픔을 호소하지 않으려는 듯 탈골된 관절을 맞출 때에도 소리조차 내지 않는 타이라를 바라보는 황제의 마음에는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아났다. 그것은 일종의 기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흥분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타이라의 눈은 벽을 지나쳐 미미한 공기가 들어오는 창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창을 바라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에 한곳에 둔 시선이 흘러가 창을 향하였을 뿐인데 틀어진 목의 방향을 가늠한 황제는 경고하듯 말했다. 「바라봐야 아무것도 없다. 그 길로는 나갈 수가 없어.」 허공을 울리는 목소리에 놀란 타이라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어느새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새삼 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 방안 어디를 가도 그의 시선을 피할 곳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묶여진 다리가 저리다는 것을 헤론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야 느낄 수가 있었다. 결박된 사지가 풀리면.... 이라는 상상으로 시작한 모든 일들이 이제 점차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처음 황제를 봤을 때의 격렬한 감정이 다소 사그라졌다. 이제는 단지 이 커다란 침대 위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타이라는 자유로운 왼팔을 들어 침대 위를 살짝 짚었다. 중심을 잃을까 두려웠다. 행여나 묶인 다리를 하고 흉한 꼴로 쓰러졌다가는 비틀린 오른팔로 곧바로 일어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바라보기만 하는 묵묵한 황제의 시선이 싫었다. 절대로 그에게 약점이 될만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으웃... 천 사이를 뚫고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라나궁에 다친 곳은 팔뿐인 줄 알았는데 땅을 딛는 왼발의 발목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라나궁에서 황제와의 실랑이 도중에 다친 것은 분명했다. 「움직이지 마라.」 그가 말했고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타이라를 처음 내려놓았던 모습 그대로 침대위에 앉혀 놓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날이 짧고 작은 단도로 발목에 묶인 천의 일부를 잘라냈다. 찌지직.. 하고 천이 찢기는 소리가 들리고 한동안 발목을 감고 있던 무명의 하얀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고는 있겠지만, 무모한 짓은 하지 말거라.」 경고하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무모한 짓이 무어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천으로 가린 입술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화가 난 타이라는 고개를 돌려 황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검고 짙은 눈썹아래 자리 잡힌 그의 검은 눈동자가 눈 안에 박혔다. 궁성에 와서 처음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었다. 흔들림 없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던 타아라는 다시 처음처럼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인내하는 법도 필요하지.」 황제의 목소리가 커다란 방안에 스며들어 귓가에 울렸다. 타이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몸속에 새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가 나를 죽일 만큼 강해진다면 정식으로 기회를 주겠다. 그전까지는 아무것도 허락할 수 없어. 그것에 동의한다면 별궁에 있는 사내에게도 그대 나라의 백성들에게도 똑같은 자유를 허락하겠다.」 타이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건데 그는 타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느 시점부터 세이카의 모든 이들을 죽였고 그리고 우크란의 반을 삼킨 대륙의 황제였다. 그는 일개 포로에게 기회를 운운할 자가 아니었다.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확신하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웠다. 내미는 카드는 결정적인 것이고 그것을 거역할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황제는 천천히 소년의 입에 물린 천을 풀어 내렸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이 얼굴에 스쳤고 이어 바라보는 소년의 턱을 살짝 쓸어내렸다. 그때까지도 황제의 말뜻을 생각하느라 멍해진 타이라는 입을 가렸던 천이 제거되고 자신의 입술 위에 부드러운 혀가 느껴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전까지 그대는 라나로서 임무를 행해야 할 것이야.」 부드럽게 스치던 입술이 떨어지며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타이라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굳건히 다짐했건만 처해진 상황은 최악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예전과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 수 없었다. 황제궁의 커다란 침대의 한편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무릎사이에 묻었다. 자신에게 내뱉은 말들을 곱씹어 보고 재차 생각하며 새삼스럽게 분노를 느끼고 또다시 불쾌감으로 치를 떨었다. ‘ 그대가 나를 죽일 만큼 강해진다면 정식으로 기회를 주겠다..........’ 결투할 기회를 준다는 것인지 아니면 정식 승부를 하자는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온한 어조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듯 건 낸 말속에는 모조리 가시가 들어있어 어느 것을 듣고 어느 것을 버려야할지 난감했다. 피곤한 신경이 날카로워져 커다랗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건만 주위는 한없이 고요하고 닫힌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인걸까.. 수많은 라나를 라나궁에 가두고 아쉬움 없이 사는 그에게 굳이 라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제 황제를 향하는 감정은 모두 버렸다고 믿었다. 아니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 수십 번도 더 넘게 손에 피를 묻혀야했던 자신을 상기했다. 그리고 여신의 강에 몸을 던질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 난 그레이스고 돌아가신 세이카이 왕이며 무참히 죽어간 세이카의 백성이다. ’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느낌을 정리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후회하게 해주겠어. 영원히 후회하게 해줄 거야. 한숨처럼 내뱉는 말은 가라앉은 공기처럼 무거웠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란 것을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한동안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이가 없었건만 우르르 몰려와서 우르르 사라지는 시종들의 손길은 익숙해지려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시종들의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그러기에 몸을 단정히 하는 과정은 굉장히 길었으며 그동안 노출된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던 예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현재로선 다 자라버린 몸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은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겨주던 시녀는 손목에 난 파랗고 커다란 멍 자국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기실 어깨의 붓기보다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멍 자국이 더 큰 상처로 아파보였는지도 몰랐다. 순간 팔목을 두른 멍 자국을 보며 간밤의 라나궁의 일이 생각났다. 굉장한 약력으로 팔목을 잡은 그의 힘은 매우 컸으며 칼을 피하는 황제의 반사 신경 또한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달리 기사가 아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는 자신을 죽이고도 남았다. 그 손에 목이 꺾였다면 지금쯤 숨을 쉴 수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리했다면 좋았을 것을. 「어깨는 좀 어떠신지요?」 헤론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앉아있는 소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말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소년을 보면서 어제보다 나아진 혈색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는 소년에게 웃음을 섞어 소식을 전했다. 「밖에 길이 와있습니다. 들라고 할까요?」 잠시 눈에 스치는 놀라운 표정을 헤론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천성이 밝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몰라보게 변한 분위기에 걱정도 많이 하였더랬다. 자신의 친우 길이 밤사이 많은 걱정을 하였음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조금 나아진 후에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건만 우격다짐으로 자신을 따라온 길은 방문 밖에서 허락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이다. 「........만나지 않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어찌 보인단 말인가! 타이라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자신의 처지와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걸치고 무능력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다 해당이 되었으나 길에게는 특히나 더욱 그러했다. 「흠...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에게는 전의로서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어디 어깨를 봐도 되겠습니까? 심하게 탈골이 되어서 바로 맞추긴 했어도... 아무튼 한동안은 조심해주십시오.」 조심스럽게 어깨를 살피고 그리고 다시 단단하게 천으로 여며주고는 헤론은 방밖으로 나섰다. 소년은 모르겠지만 라나가 돌아온 뒤 궁 안의 모든 경비가 삼엄해졌다. 사람이 지나갈 만한 모든 곳에는 그곳이 길이 아니라면 빠져나가지 못하게 장치를 하거나 아이라도 빠져나갈 공간이라면 세 겹 네 겹 병사를 단단히 배치해두었다. 강화된 경비로 인해 황궁은 물샐 틈이 없이 굳건하고 그리고 삭막해졌다. 헤론이 치료를 하고 나가자 타이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길을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고 나니 그와 함께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하나둘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만나고 싶은 마음과 만날 수 없는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다. 자신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인연의 고리들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아는 타이라는 선뜻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아니 두려웠고 겁이 났다. 이제는 누구와도 인연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타이라는 다짐하듯 내뱉었다. 「먹고 싶지 않습니다.」 시종들이 난감해하였다. 치료가 끝난 뒤에 아침을 꼭 올리라는 분부가 있었다고 사정을 해보아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시녀 한명이 울음을 터트렸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자의 눈물에도 차가운 얼굴을 한 타이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먹지 않아도 좋지만 시녀는 울리지 말거라.」 그것은 아침식사를 가지고 시녀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늦은 아침에 일이었다. 울음을 터트리는 시녀와 타이라를 바라보는 일부 시녀들의 뒤로 황제가 들어섰다. 방안에는 따뜻하게 차려진 식사와 시중을 드는 여러 명의 시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부러 시녀를 울린 것처럼 말을 하는 황제를 보며 타이라는 화가 났다. 시녀를 울릴 이유는 없었다. 단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뿐이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소년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가에 웃음이 어렸다. 어째 조용조용하게 방안에 머무른다 했더니만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억울했던 모양이군. 후훗.」 마음을 들여다본 것 마냥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타이라는 눈에 한껏 힘을 담아 황제를 노려보았다. 집무를 끝내고 온 것인지 몰라도 그의 옷은 매우 정갈한 느낌이었다. 공단의 천과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길고 펄럭이는 천이 가슴위로 길게 늘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는 차려진 식사를 치우라고 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처럼 시선을 한번 주고는 처음처럼 넓기만 한 공간에 두고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타이라는 또다시 고요한 침묵 속에 홀로 남았다. 궁성의 창 안으로 빛이 들어오고 그림자가 제법 짧아지자 또다시 방안의 문이 열렸다. 문 밖으로 보이는 병사들의 짧고 굵은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시종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들은 또 처음처럼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과는 달리 아침보다 몇 배에 달하는 식사가 차려졌고 그 차려진 음식의 양에 놀라하는 가운데 잠시 후 황제가 들어섰다. 침대의 한편에 걸터앉아서 들어서는 황제를 향해 타이라는 과감하게 소리쳤다. 타이라의 목소리에 시종들이 난감함을 표시하고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치우십시오. 내 나라 백성이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그대와 식사를 한다고 했는가? 손님을 불렀다.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좋다.」 이제껏 여유가 있던 목소리가 아닌 의외의 냉기어린 목소리에 타이라는 고개를 홱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선선히 먹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그의 말에 오히려 당황스러워진 타이라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화를 부추기는 듯 하였다. 「폐하. 그간 무고........... 타이라?!!」 창밖을 바라보던 타이라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뿌옇게 보였고 곧이어 그 모습은 자신이 그렇게나 보고 싶던 사람으로 변하였다. 작고 따뜻한 그였다. 반가웠다. 겉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이시여....... 정말 타이라입니까?」 방문의 입구에서 레디미온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타이라를 향해 조금씩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자신들의 앞에 황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소중한 왕자님만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만. 왔으면 앉아라.」 에에????? 놀란 것은 타이라와 레디미온이었다. 한가롭게 식사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비된 식사와 무표정한 황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레디미온은 식사가 차려진 탁자의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언제보아도 레디미온에게 두려운 인물이었다. 「불행히도 타이라는 식사를 거절했으니 그대와 둘이 할 수밖에 없군.」 황제는 느긋한 표정으로 정말로 음식을 먹고 있었다. 황제의 방에서 유일하게 그만이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저..폐하. 전.. 전 혼자 먹을 수 없습니다.」 「어찌 그대가 혼자이지? 짐과 함께가 아닌가!」 「그.....그것이 아니오라. 타.......타이라가..」 「그는 아이가 아니야. 먹고 싶지 않다면 굳이 강요하지 못하지.」 황제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타이라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혼자 식사할 수 없다는 그 말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더 나아가 얄밉게 옳은 소리만 골라하는 모습에 타이라는 화가 치솟아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그의 얼굴에 타이라는 급기야 다리를 절룩이면서 의자에 앉았다. 「저런~ 원한다면 안아줄 수도 있었거늘.. 쯧.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를 가는 소년과 여유로운 황제 사이에서 안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레디미온은 중간에 낀 죄로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며 수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야만했다. 차려진 음식의 화려함도 맛있는 향도 그리고 입안에 감도는 음식의 달콤함도 레디미온은 느낄 수가 없었다. 표정을 굳히고 자신 앞에 놓인 몇 가지 음식을 바라보며 눈 안에 잔뜩 살기를 담은 자신의 소년만 보였을 뿐이었다. 어색했다. 말을 걸 수 없을 만큼. 식사 후에 레디미온은 황제와 타이라 사이에 남을 수가 없었다. 무거운 공기의 흐름이 그러했고 어느 누구도 식사 후에 다정스러운 티타임을 연출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는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소년과 얼굴을 맞대고 손을 부여잡고 따뜻하게 체온을 나누며 포옹을 하기 바랐지만 그것 절대로 마음뿐이었다. 문을 열고나서는 레디미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타이라의 시선은 우울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어찌 반갑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고 즐거웠던 추억의 일부였으며 한없이 떨어지는 죽음의 그림자속에 삶을 끈을 잡게 해준 장본인이이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상황을 들킬 것만 같아 가슴이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의복의 모양이나 혹은 황제의 침상 위에 앉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그가 알지 못하기를 바랄뿐이었다. 황제의 손이 닫기 전에 타이라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창을 향해 걸었다. 이 창에서 바라보면 황급히 사라진 그가 보일 것도 같았다. 그렇게 말도 한마디 못하고 사라진 그를 다시보고 싶은 마음으로 창틀을 부여잡고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순 그의 뒷모습이 보이자 타이라는 커다란 창틀에 허리를 걸쳤다. 발이 부러진 것이 아니니 뛰어내리면 단박에 그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위태위태하게 걸쳐진 몸은 왼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더욱 바깥으로 쏠렸고 몇몇의 시종들이 히익~하는 비명을 속으로 삼켰다. 높지는 않으나 아래로 떨어질 듯한 소년의 모습은 보기에도 아찔할 지경이었다. 「놔!」 바닥이 멀어졌다가 그리고 흔들리기 시작했고 황제는 벽으로 늘어선 시종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황급히 사라지는 그들 뒤로 굳건하게 방문이 닫혔다. 「쯧.. 철창을 해야겠군.」 황제의 목소리가 울리자 타이라는 이를 갈았다. 바닥으로 내려지는 느낌과 그것이 최초 자신이 누웠던 황제의 침대라는 사실이 인식되자 타이라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왼손으로 마주선 사내를 밀쳐내었다. 불행히도 요지부동하지 않는 황제는 곧이어 자유로운 왼손의 팔목을 단단히 거머쥐었다. 「난 그대의 두 팔이 없어도 좋다. 언제든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죽고 싶은가? 아니면 죽이고 싶은가!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해도 좋아. 하지만 한번뿐이야. 두 번은 없어!」 파란 멍 자국이 가시지도 않은 그 팔목을 꽉 그러쥐고 나직이 속삭이는 사내의 눈에 타이라는 숨을 삼켜야했다. 황제는 변하였다. 기억에 남았던 그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늘하게 일갈하는 그 목소리는 그의 무색의 눈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눈빛의 책망이 두려워 타이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의 타오르는 열기가 전해지듯 화끈하고 아픈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감은 눈 위로 사내의 입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피해야겠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잡혀진 왼손이 더욱 세게 눌리며 침대 위쪽으로 꺾였다. 싫었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이 두려웠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이 침대위로 투욱 떨어졌다. 다급한 마음에 비틀어 빠져나오려던 다리는 그의 하체에 눌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싫어...... 라고 마음속이 울부짖었다. 한껏 벌려진 상의의 옷 사이로 그의 손이 밀고 들어왔다. 훑어지는 손이 지나갈 때마다 화끈한 감각을 남기기 시작했다. 목을 울리는 낮은 신음이 참았던 눈물을 대신해 짓눌리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벌려진 옷자락이 찌이이익 소리를 내며 머리위로 내던져졌다. 하아........ 하고 뒤늦게 한숨을 내쉬어도 그의 손길은 멈춤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더 격하게 남은 하의를 벗겨 내렸다. 간신히 버티던 마지막이 무너지듯, 자유스럽지 못한 팔을 대신해서 타이라는 버둥거리며 밀쳐내기 시작했다. 울고 싶어져 커다랗게 뜬 눈에 보이는 것은 성난 육식동물 같은 그였다. 한 치의 허술함도 없이 그가 자신을 닦달하는 모습이 한껏 눈 안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더욱 여실히 느껴지는 그 감각에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벗겨진 나체위로 그가 움직였다. 숨을 내쉬고 싶었는데 신체의 기관도 망가진 듯 허억...하는 낮은 신음만 방안을 에워쌌다. 그는 살아있음을 과시하듯 무계 감을 표출하며 만져지는 곳마다 푸른 상처를 남겼다. 급기야 절대 울지 않으려던 타이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둔탁한 고통이 하복부를 달렸다. 「그댄.......내 것이다.」 세뇌를 하듯 그가 말했다. 11. 수 일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아득한 시간도 따사로운 빛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모포의 질감도 눈을 떴을 때는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최초 머물렀을 때의 느낌처럼 생소하고 두려움이 가시지 않아 단박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귓가에 새소리라도 들려올 듯한 청명한 아침이었다. 익숙하지 않는 감각에 순간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순간순간 스치는 황제의 거친 숨결이 이내 서늘한 감각을 안겨주어 등가에 한기가 스쳐왔다.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서는 시녀의 모습에 자신에게 붙어있는 달갑지 않는 감시의 눈이 생각났다. 「일어나시는 대로 예복을 갖추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시녀의 정갈한 목소리에 8할쯤 돌아왔던 정신이 날카롭게 살아났다. 날로 따지면 그들의 축제 기간이었고 그에 따르는 괴로운 과거의 추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예복을 갖추라고 하셨습니까?」 「예. 오늘부터 세르판의 축제기간이옵니다.」 시녀는 물음에 대답하고 고개를 살짝 들어 생각에 빠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소문으로만 들었고 실물로 보기는 처음인지라 낯설기보다는 신기한 느낌에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순간 마주친 눈에 얼굴이 빨갛게 변하여 고개를 숙인 시녀는 곧이어 거동이 불편한 그를 위해 가만히 앉아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손대지 마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하..하지만. 팔이 불편하시니......」「됐습니다. 그보다도 세이카에서 온 사람을 불러주십시오」 「세이카......아. 그분은..」 자신이 우물쭈물 하는 모습에 그가 환한 웃음을 띠운다. 「살짝.. 아무도 모르게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동안 제 뒤를 살펴주실 수 있으시죠?」 달콤한 속삭임처럼 귓가에 들리는 미성을 시녀는 가만히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연스럽게 방 밖을 나섰다. 문 밖에 지키고 서있는 사내둘이 보였다.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단단하게 겹겹이 걸쳐진 결계가 못마땅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는지 병사는 곧바로 검으로 막아섰다. 「황제폐하의 부름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따르셔도 좋습니다.」 「폐하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믿지 않는다. 어떠한 말도 소용이 없다는 듯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호위를 섰다. 그러자 곧이어 나머지 사내가 따르려했고 커다란 사내는 고개를 돌려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하였다. 커다란 궁. 사람들의 눈이 사방팔방 따라 붙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으윽...........」 다리를 굽히며 아픔을 호소하는 황제의 라나의 모습에 병사가 황급히 부축을 하였다. 팔 안으로 가볍게 안기는 라나의 가벼운 몸놀림에 병사가 당황하는 사이 병사는 단발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커다란 덩치로 기절했다. 길게 이어지는 복도와 외부로 나가는 문의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 한편을 등에 지고 타이라는 조용하게 미소 지었다. 궁과 궁사이의 초목이 푸른 나무와 잔디의 향연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앗아가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하여 걸친 옷은 별 효력이 없을 것이 분명하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지만 조만간 자신을 잡으러 병사가 오기 전까지 레스터를 만나야했다. 그가 갈 법한 곳을 두리번거리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묻는 수밖에.. 타이라는 세 명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세이카에서 온 사람을 찾습니다.」 한 동안 자신들에게 말을 건 소년의 모습에 경직되었던 사내 중 한 사내가 인상을 구기며 답변했다. 「세이카의 책사 말인가?」 「........」 「그는 저쪽 별궁에 기거한다.」 답변이 끝나자마자 사라지는 소년의 모습에 사내들이 수군거렸다. 황제의 애첩이자 궁 밖을 거니는 라나가 실존한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한 사내들이 넌지시 입을 다무는 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자네가 데리고 온 그 아이와는 전혀 틀리군...... 그래도 실존하는 것이 분명하다니 허헛..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나중에 봅세.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말을 마치고 레스터 카이사르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타이라?」 「오랜만이야.」 「여긴 어떻게... 그보다도 다리는 괜찮은거야?」 「보시다시피 죽지 않을정도로..... 걱정 마. 이상 없어.」 날카로운 말투의 끝이 어눌하게 눌리며 타이라는 자신을 위해 눈물을 머금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작은 사내가 자신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여길 떠나. 당신이라면 떠날 수 있어. 여긴 당신 같은 사내가 있을 곳이 못돼.」 「타이라.. 너는 넌 어떻게 하고.」 「훗.. 묘책이 있어? 나만큼 이곳이 싫은 사람도 없지. 당신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거라 생각해. 예전의 타이라가 아니야. 난.」 「그런 말 하지마라 타이라. 넌.... 내 작은 왕자님이었어.」 「마음약하게 하지 마.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황제에게 간언하면 당신은 보내줄 거야. 그의 목적은 당신이 아니니까. 우크란으로 가. 그곳에 가면 내가 모아둔 돈....... 누구냐!! 나와라!!」 일갈하는 목소리에 레스터의 눈물이 멈추었고 곧이어 창 밖으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쉿! 감시자가 있어. 레스터. 길게 말 못해. 내가 사라진 것을 황제가 알았을 거야.」 「넌... 넌 아무렇지 않은 거야?」 「..............」 대답이 없는 타이라의 팔을 붙잡고 사내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말을 마친 자신의 어린 아이는 이미 어른이 되어있었고 잠시 무방비하게 흐트러졌던 눈빛은 이내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리고 잡혀진 팔을 푸르고 낮게 일갈한다. 「난.. 타이라가 아니야. 그러니 여기서 사라져줘. 날 괴롭히지 마.」 방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병사들의 무리 속에 한발자국 걸어 나온 레스터 카이사르가 울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혹시나 했지. 렌 나와 같이 우크란으로 떠나자. 황제폐하께 허락을 구했어.」 「싫어. 타이라를............... 두고...가....갈 수......없어.」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방에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는 레디미온의 눈은 빨갛게 변했다. 그의 말처럼 앞으로 타이라 세이카는 절대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 계속해서 귓전에 돌며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듯 미동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처음으로 원하는 것을 얻은 아이처럼 레스터카이사르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숨기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마주보며 그가 답변했다. 「좋아. 되도록 빨리 준비하지.」 「눈을..... 뗄 수가 없어.」 불만을 내뱉는 것도 아닌 평온한 어조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내의 모습에 타이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해도 그의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이 싫었다. 약한 모습을 자신을 알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폐하께서 자유롭게 해주신다면 그런 피곤한 일도 없을거라 사료됩니다.」 「훗.......」 마지막 보루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할 때의 사내의 오기가 발동하는 알면서도 꼭 그리하는 자신이 싫었다.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에 질리면서도 오기로 일부러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를 마주보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좋아. 변하지 않았어.」 찡그림으로 대신 답변을 하는 자신을 보며 무엇이 좋은지 기분은 가벼워 보여 기회를 포착한 타이라는 말을 건냈다. 「그를........ 성밖으로 내보내주십시오.」 「조건은?」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타이라세이카. 그대가 특별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그것뿐이야. 더 이상은 없어.」 「그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폐하.」 「좋아. 단 그대는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중에.」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 긴 서류의 끝에 무엇인가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끌려온 황제의 서재 한쪽 그 긴 의자를 보며 타이라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어떤 것도 과거와 자신을 이을 단서를 주어서는 안 되었다. 「저녁에.. 제가 꼭 나가야합니까?」 「훗.. 그대가 사라진 이후로 변한 궁이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하지 않았다. 가진 자의 승리한자의 여유 따위 바라보며 즐겁게 여흥을 즐기고 싶은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준비하고 저녁에 뵙겠습니다. 폐하.」 「가라고 하지 않았다.」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 서류를 바라보며 집무를 하는 황제의 곁에 어정쩡하게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해진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길이 단호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한숨이 우러나올 정도로 청명한 날씨가 마음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한참을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하고 지루한 작업을 반복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환하게 열려있는 창 밖으로 섰다. 길고 긴 그림자가 등 뒤로 늘어지며 커다란 방안에 길게 늘어설 때 즈음에 업무를 거의 마친 황제가 일어나는 기척이 보였다. 발소리가 울리고 등 뒤에서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타이라의 심장은 터질 듯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냉정을 찾아 그에게 말을 걸기위해 심호흡을 하고 그리고 몸을 돌렸다. 너무 가까웠다.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묻지 않겠다.」 「.........」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야. 그대의 목숨은 내 것이다.」 대꾸하려고 벌어진 입술에 황제의 입술이 조용하게 내려왔다. 거칠게 항변하려는 손을 거센힘으로 잡아 누르고 부드러운 혀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반항하며 밀어낸다. 그리고 지겹도록 싫어하면서 결국은 허탈하게 쓰러지는 그 모습이 자신에게는 소름끼치도록 흥분감을 가져다준다. 흥분감과 성취감으로 인해 황제의 심장은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쾅!!!!!!!!!!!!!!!!!!!!!! 부서지도록 문을 닫고 붉게 물든 눈을 하고 사라지는 아름다운 소년의 뒷모습에 황제는 슬며시 웃음을 삼켰다. 긴 시간을 황제와 같이 있었기에 준비해야할 시간이 촉박해졌다. 그로인해 울먹이는 시녀들 사이에 단장을 한 타이라는 한걸음 발을 뗄 때마다 사지로 발을 내딛는 기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문에 이끌려 나왔다. 이미 평화를 얻은 대지와 넓은 땅과 그리고 넘쳐나는 부로 인해 귀족들은 소문을 찾아 궁안에 든지 오래였다. 무엇보다도 황제의 라나다. 쉬쉬 하지만 황제가 그를 찾기 위해 들인 돈과 노력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만 안절부절하고 좀 앉게나. 오늘 나온다했으니 오겠지.」 「타이라가 온다는 거 맞아요?」 「그래. 길. 자네가 파티에 온 것도 기적이군. 저쪽에 귀부인이 아까부터 자네에게 눈길을 주고있네만..........」 「에잇! 헤론. 그만해요. 타이라가 조금만 얼굴을 보여줬어도 이런 광대차림을 하고 여기 안오는건데...」 아까부터 불만을 토로하는 길을 달래며 헤론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많은 귀족들이 연회장을 돌며 삼삼오오 말을 섞는 중이었다. 「오오~ 휴리아님도 오셨어요.」 「어머어머.. 키리온님이 돌아가신 뒤로 궁에는 오시지도 않던 분께서.. 역시 그 라나는.........」 소문 속에 등장한 휴리아 실버리안의 곁에 많은 귀족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바르시아 공의 외동딸인 그녀가 유일하게 선왕의 마음에 들어 황비감이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기에 미래의 황비에게 모두들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긴 검은머리도 화려한 드레스도 사람들의 호감을 주기 충분했다. 그녀가 들어서고 연회장은 점점 활기를 띠워갔다. 그리고 황제가 들어섰다. 황제에게 예를 올리는 귀족들과 이어 축사가 시작되고 그들의 긴 축제가 시작되었다. 「폐하. 그동안 무고하셨나이까.」 나긋한 그녀의 목소리에 많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 같은 황비와 황제를 축복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공께서 안 오셨군.」 「네. 몸이 좋지 않으셔서 오지 못하셨어요. 폐하께 늘 감사드립니다.」 황제와 미래의 황비 사이의 돈독한 분위기에 귀족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길은 멀찍이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며 나타나는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실체를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연회장가 계속 이어지도록 나타나지 않는 그를 사람들은 하나둘 잊어버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춤과 노래의 아름다운 향연이 이어졌다. 「헤론. 폐하께 여쭤봐. 왜 안 오나.」 「그러지 말고 나처럼 술을 마시던지 아니면 아마드처럼 춤을 추던지 하지? 멍하니 기다리니 시간이 더 안 가는 것 아닌가!」 「에잇. 노인네. 나갈래!」 길은 재빠른 발놀림으로 연회장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거친 발걸음에 헤론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삼키고 술을 입안으로 넘겼다. 쿵!!! 뭐야~ 제길............. 욕을 삼키며 앞을 바라보던 길은 작은 목소리에 커다랗게 눈이 떠졌다. 「실례합니다.」 「타이라?!!」 길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타이라의 뒷모습에 발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으며 예전과는 다르게 몰라보게 성장해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매에는 웃음이 사라져 서늘한 기를 뿜어내며 다가설 수 없도록 울타리를 친 상태였다. 황제의 라나는 단아한 걸음으로 황제를 향해 걸었다. 길고 아름다운 머리칼이 흔들리며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공단천이 매끄럽게 몸에 감겨있는 황제의 라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에게 몸을 굽혀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늦게 인사 올려 죄송합니다.」 황제의 눈이 매섭게 변하고 곧이어 날카롭게 반문했다. 「누가 말해주던가.」 「폐하께서 여신의 딸로 친히 임명해주시고 제게 이렇다할 말씀을 아니하시다니 서운하옵니다. 휴리아님께 제가 인사를 못 드리는 무례를 범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저를 사/랑/한/다 하셨지만 후사는 꼭 두셔야합니다.」 미소를 띠며 말하는 라나의 말에 궁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큰일났군. 라나께서 적을 만드셨다. 길. 골치아파지는군. 저분은 역시 순순히 나올 분이 아니었던게야. 저리 말하면 후사를 위해서라도 꼭 위험한 존재를 제거하려할 걸세.. 휴우~~~ 간단한 게 없구먼...」 「그..그럼 저 녀석 일부러 저렇게 말한거란말입니까?」 「그래. 오래살기 힘들겠군.」 길은 자신을 스쳐지나갔던 타이라의 서운한 감정이 사라지고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미 귀족들은 황제의 라나에게 칼을 갈기 시작했다. 12. 섬세하게 깎아놓은 조각이 돋보이는 벽에서는 아름다운 횃불이 일렁이고 높은 천정아래 은은하게 들어오는 달빛도 황홀한 연회를 빛내기에 충분했다. 빛이 일렁일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에 따르는 어두운 그림자가 흔들거렸고 그 음영의 어둠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황제의 라나에게 향하는 달갑지 않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영악한 것.」 귓가에 스치는 그 낮은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황제의 원망이 전해지는 듯 했다. 굳게 다짐했던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발끈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향해 대꾸하려던 목소리는 순간 맞은편에 서있는 공녀로 인해 가로 막혔다. 「아~ 갑자기 목이 마르군요. 술 한 잔 마시고 얘기를 나누죠.」 휴리아 실버리안이 시종을 시켜 몇 개의 잔을 사람들에게 돌리는 동안 타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의 외벽으로 기대섰다. 홀 안의 무수한 시선이 달갑지 않았고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황제의 라나’로서 할 말만 끝나면 돌아가려 했었으나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심히 올려다본 천정은 둥근 돔 형식이었다. 커다랗고 웅장한 천정에 무수히 작은 창이 세밀하게 나있어 은은하게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저런 은은한 달빛은 본 적이 없었다. 세이카의 사막의 모래 속에서 바라본 하늘은 뿌옇고 때로 붉어서 은은하기보다 작열하는 불꽃같아 보였다. 달빛이 들어오는 창에서 다시 그 벽으로 그리고 차츰차츰 아래로 향하던 시선이 곧이어 맞은편에 선 사내에게 닿을 무렵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던 것처럼 묻지 않는다. 억지로 편안한 웃음을 지을 만큼 넉넉한 성격의 사내도 아닌 그가 걱정을 담아 묻는 질문에 자연스러운 대답을 돌려줄 수 없어 불편했다. 「돌아오기.... 싫었지?」 결국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겨우 얼굴을 들어 시선을 맞추는 황제의 라나를 바라보는 길의 기분은 약간의 취기와 함께 들뜨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길.」 「그래. 너무 오랜만이네. 몰라볼 뻔했어.」 거짓말이었다. 그 머리색이 아니었다 해도 언제든 다시 만난다면 멀리 있다 해도 알아볼 것임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기이한 악기소리가 홀 안에 퍼지고 사람들의 흐르는 듯한 목소리와 멀리 장단을 맞추듯 흔들리는 횃불의 한편에서 길은 자신이 그렇게나 보고 싶어 했던 그가 돌아왔음을 다시 인식했다. 「변하지 않았구나!」 커다랗게 떠지는 눈도. 밝게 흐르는 금빛의 머리칼도 그리고 고혹적인 눈매도 그대로였다. 「재미있는 말을 하네. 모두 내가 변했다고 하던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황제의 모습을 보였다. 비록 그가 자신을 등지고 선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타이라는 초조했다. 「밖으로 나갈래?」 어색한 웃음으로 외부로 향하는 문을 향해 시선을 주면서 그가 물었다. 벽에 기대고 서있던 몸을 일으켜 들고 있던 잔을 지나가는 시종에게 건네주고 조심스럽게 발을 땠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과를 훔쳐 달아나는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행여나 자신이 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아 첸 왕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콱 채 갈 것만 같아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헤론! 아마드! 꼬맹이를 데려왔어요.」 길의 목소리가 밝고 크게 울리자 건물의 한편 풀밭의 저만치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미 목까지 체운 단추를 풀어헤치고 술판을 벌이고 있던 황제의 기사 둘은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은은하게 오른 취기가 달아나는 중이었다. 「헉!! 정말로 데려왔군.」 「폐하께서는?」 아마드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대답을 구하듯 황제의 라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도 돌아온 황제의 라나를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소 황궁에 드나드는 헤론만 즐거운 표정이 역력한 채로 술을 삼키고 있었지만 아마드는 그리 기분이 편치 못했다. 「흠.. 답답해하는 것 같아서.. 별일이야 있겠어?」 「폐하께 고하고 오겠습니다.」 아마드가 벌떡 일어나 길과 타이라가 왔던 길로 걸어 나갔고 그 모습을 보며 투덜거리듯 두어마디 내뱉은 길은 잔 그득 담긴 술을 타이라에게 건냈다. 「어깨는 좀 괜찮으십니까?」 헤론이 타이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받아든 술을 목 뒤로 넘기고 타들어가는 취기를 가라앉히며 타이라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부러진 것이 아니니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럭저럭 좋습니다.」 「아직도 아파?」 「괜찮아....... 손대지마!」 타이라의 팔을 잡으려던 길이 쌀쌀한 그 끝말에 움츠려들어 들었던 팔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싸늘하게 내뱉는 목소리와 눈빛이 순간 자신이 알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느낀 길은 고개를 돌려 술을 따랐다. 「돌아가야겠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돌아가십시오. 폐하께서는 눈앞에 당신께서 사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십니다.」 헤론이 말을 끝내고 술을 삼켰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돌아가야 한다. 원하든 원치않든.. 한숨을 내쉬며 타이라는 일어섰다. 길은 술을 마실 뿐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거리는 옷의 한편에 붙은 작고 어린 풀잎들을 털어내며 타이라는 돌아왔던 길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분명 싫었는데 그리도 가슴 아프게 잊기를 소망했던 그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누구냐!」 홀로 향하는 긴 길목 주변은 온통 어둠이 깔려 의식하지 않고는 주위의 풍경이 분간이 잘 안가는 시간이었다. 축제로 인한 모든 병사들이 일부의 보초를 푼 상태라 딱히 큰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요한 길목이었다. 「후훗... 여전하군요. 더 사나와졌어요.」 어두운 한편에 서있는 사람이 서서히 앞으로 얼굴을 드러내자 타이라는 기분이 오싹해졌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지?!! 「어쩌죠? 전 반가운데 왕자님은 그렇지 않아 보이니.... 마마께서 서운해 하고 계세요.」 「어떻게 들어왔지?」 「후후훗..... 그게 궁금하던가요? 홀 안에서 계속 당신을 지켜보았는데 모르시더군요. 서운하던데요? 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를 때마다 그 짜릿한 기분이란!!」 「집어치워! 용건만 말하고 빨리 사라져!」 사내의 손이 볼을 스쳐 머리칼을 잡아 내리자 불쾌한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기 시작했다. 그다! 어찌 잊겠는가. 라투야의 오른팔.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 일행들을 돌려보내고 궁 안에 있는 자신의 소식이 그녀에게 벌써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마마의 전언입니다. 아름다운 분. 그대의 목숨이 걸렸어요. 하긴~ 이 방법도 좋군요. 황제의 라나라..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에게 잘 보여 두는 건데. 아름다운 왕자님. 일주일입니다. 라투야의 눈이 당신을 지키고 있어요.」 「일주일?」 「왕자님이 하지 않으면 제가 합니다. 아! 그리고 좋은 소식!」 「뭐지?」 「이런 성격도 급하셔라~ 휴리아 실버리안. 그녀가 없어지는 게 당신에게 더 도움이 되겠지요? 내일 아침 일찍 승마를 할 겁니다. 그녀의 안장을 모조리 끊어놓을 겁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불필요한 존재겠지요? 제발 머리부터 떨어지길.. 하하하핫!!」 피곤해. 지금 난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찬미를 담아 읊어대는 시도. 막바지에 이른 파티도 흥겹지 않았다. 아마드가 어떻게 말을 전했는지 몰라도 한동안 길에 서있는 자신을 아무도 찾지 않았다. 달리.......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일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니 갈 곳이 없는 것을 알지도 모른다. 몇 번을 올려다보아도 막막한 어둠만 눈 안에 들어왔다. 분명 환하고 아름다운 횃불이 벽을 지키고 있는데도 어두운 암흑에 떨어진 것 마냥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화려하게 웃는 귀부인들의 웃음도 광대들의 재롱도 흔들리는 드레스의 문양도 이제 모두 지긋지긋해졌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마음 가득 들어찼다가 이내 가야할 곳이 그 곳임이 생각나자 다시 실망과 함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하지? 흠칫!! 볼을 스치는 손이 따뜻한데도 일순 그 느낌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깨에 걸린 아름다운 천의 일색과 그리고 이제야 들어오는 그의 단아한 옷차림이 눈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만지지마! 난 당신의 것이 아니야. 불만 섞인 목소리는 항상 목 아래로 눌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수없이 연습하고 그렇게나 이를 갈 듯 외쳐댔던 원망의 말들이 그를 향하지 않는다. 원망스럽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오늘밤은 특히!」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가벼워 오히려 놀람을 안겨준다. 한손에 들고 있던 얇고 아름다운 유리잔에 투명한 음료가 출렁거렸다. 황제는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고 그리고 자유스러운 나머지 손으로 타이라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궁 밖으로 나가면서 바람에 흩어졌던 머리칼이 황제의 손에 쓸려 제자리를 찾아갔다. 「폐하. 그간 무고하셨나이까. 휴리아님의 호의를 맡은 카야르입니다.」 「오랜만이군. 그대도 잘 지냈는가?」 「예. 옆에 계신 아름다운 분은 누구십니까.」 웃음을 띠고 사내가 말을 걸었다. 잠시 평온하다 생각했는데 타이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얼굴색이 좋지 못하군. 이만 들어가야겠어.」 머리를 쓸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황제가 앞장섰다. 뒤이어 시종이 따르고 곧이어 비틀대는 걸음으로 간신히 발걸음 떼던 그에게 사내가 다가왔다. 「후훗...... 잘가요. 아름다운 분.」 어떻게 라투야가 그 사내를 공녀의 호위로 집어넣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경고는 경고가 아니라 현실이 될 가까운 미래에 불과하다는 것이란 것을. 공녀가 죽을 것이다. 왜지? 공녀의 호의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왜 바르시아 가문에 그가 접근하지? 일주일이라고 했나? 「........라」 「타이라 세이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현실로 끌어내어진 타이라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사이에 자신이 황제궁의 그것도 그렇게나 있고 싶지 않던 황제의 침소에 서 있다는 사실에 암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오늘은 그만 쉬는 것이 좋겠군.」 「........」 황제가 하는 말들이 공중에 흩어지듯 사라져 그 의미가 정확히 들리지 않고 머릿속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사항들로 인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마는 결코 자신의 배신을 눈감아줄 여자가 아니었다. 그 자 또한 웃음으로 일관된 표정으로 그 칼을 겨눔에 망설임이 없는 냉혹한 자가 분명하다. 왜 그자가 공녀의 호위를 서는 것인가! 혹! 바르시아 가문이 왕권을? 그 보다.......... 왜 그렇다면 공녀를 살해하려는 거지? 「팔은 움직일 만 한가? 공녀가 아침 승마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전해 달라하더군. 그 팔로는 무리..」 「하겠습니다!」 흐음........... 황제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져 못마땅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다급한 타이라는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그 앞에 엎드렸다. 「됐다. 일어나라. 아침 일찍 준비하라 하겠다. 쉬어라.」 사라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고 타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밤이 깊어갈수록 황제가 자신을 홀로 두고 사라진 이유를 생각했고 순간 그를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고 놀라 눈을 감았다. 이른 아침부터 종종거리는 시종들이 공녀와 황제의 라나를 위해 말을 살피는 동안 타이라는 끊임없이 의구심에 빠져들었다. 밤새도록 생각해보아도 라투야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종내는 피곤함에 가뜩이나 어지러운 머릿속이 정돈되지도 못하고 눈을 떠야만했다. 「피곤해보여요.」 공녀의 얼굴은 환한 햇살처럼 눈부시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챙이 넓은 모자 아래로 넓고 아름다운 천이 흔들렸다. 그녀를 태울 아름다운 흰색 갈퀴의 말이 시종에 손에 의해 이끌려오자 밝은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사실 예전에 우리 만났었죠?」 「아!!」 비로소 자신의 머릿속에 눈물을 흘리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눈매로 사람을 위로할줄 아는 그녀의 예쁜 웃음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리고 타이라를 위해 준비된 암갈색의 아름다운 말이 투래질을 하며 앞발을 초원에 비벼대었다. 그녀처럼 웃을 수는 없었지만 타이라의 기분은 조금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불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 파티 사실 지겨워요. 가끔 이렇게 초원을 달려보는 것이 더 좋아요.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렸답니다.」 「잠시 만요.」 말위에서 자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간밤에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안장을 모조리 끊어놓을 겁니다.......... 제발 머리부터 떨어지길..’ 공녀의 말이 달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공녀의 손에 잡힌 채찍이 번쩍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타이라는 다급한 몸짓으로 하얀 말 앞에 섰다. 「잠깐! 그 말에는 제가 타겠습니다.」 「이 말을요?」 「네.」 「하지만....... 팔이 아프시다 해서 일부러 폐하께서 그 말로 준비시키셨는데...」 「아뇨. 전 괜찮아요. 제가 그 말에 타겠습니다.」 고집을 부리듯 잠시 멈춰 서자 시동들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에워쌌다. 그리고 잠시 후 공녀가 머뭇거리듯 말에서 내려 갈색의 말에 옮겨 탔다. 공녀의 채찍이 말의 둔부를 치고 말이 드디어 넓은 세르판 궁의 한편으로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타이라의 말이 뛰어 나갔다. 그리고 호위하듯 병사들이 따랐다. 「꺄아아아아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초록의 벌판에 긴 비명소리가 울리고 갈색의 말이 두 다리를 치켜 올리며 몸을 흔들어댔다 공녀의 안장이 말의 몸과 분리되며 투툭하고 소리를 내었고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공녀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빛이 환하고 영롱한 이슬이 빛나는 축제의 아침. 황제의 라나는 살인죄로 궁성의 깊은 지하 감옥으로 호송되어졌다. 「분명히... 라나께서 공녀와 말을 바꿔서 타시길 간곡히 요청 하셨습니다. 바르시아 공의 따님이신 휴리아님께서 지금 중태십니다. 이건 분명히 반역입니다. 폐하와 공녀님의 약혼을 분명 반대하는 간악한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로 라나께서는 엄중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폐하.」 황궁 안 사내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그리고 무겁게 시작되어졌다. 집무를 보던 귀족들은 심려와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궁 밖으로 향하는 황제의 모습에 대신들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궁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13. 철컹--! 문을 닫고 돌아서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감옥 안은 검은색의 어둠에 휩싸였다. 들어설 때부터 그들은 황제의 라나로서의 그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긴 시간동안 황제는 라나를 죽여 왔다. 풀숲에서 그 작은 아이들이 끌려갈 때마다 그들은 찢어지는 비명과 살려달라고 바둥거리는 팔다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장소만 다를 뿐 이미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황제의 라나에게 느꼈다. 반항 없이 얌전히 따라오는 것이 다소 이상했을 뿐 아마도 라나는 생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철창을 뒤로 하고 나올 때는 오히려 임무가 끝난 듯 기분이 가벼워졌다. 「불쌍하군.. 나이도 어린것 같은데..」 「예끼! 이사람. 그렇다면 자네가 살려 줄 건가? 어줍지 않은 동정은 그만두지 그래. 어차피 이번 황제폐하 이전에 선대 황제들도 라나를 다 죽였어. 자신들의 치부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저러나 불쌍하군 가만히 있었으면 죽지는 않았을텐데...」 「자네도 그 라나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 「훗.. 글쎄. 하지만 라나가 개입됐을 거라는 생각은 해. 쯧....」 병사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바닥의 축축한 흙을 발로 짓이겼다. 한동안은 어둠.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과 잠시 귀 기울여보니 들려오는 자잘한 소음 속에 타이라는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꼈다. 황궁의 아래 음습한 기운이 도는 곳에 끌려왔다는 사실과 그리고 와 본적이 없는 장소인 만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카야르는 자신에게 기한은 일주일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을 때 분명 황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상황의 어느 부분까지가 우크란 외각에 있는 마마에게 전해졌는지 몰라도 이쪽에서는 알지 못하는 내용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시간을 보내던 중 바닥의 찬 기운에 더불어 이미 한기를 느껴버린 몸이 추위를 타기 시작했다. 덜덜 떨려오는 어깨가 정말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일어날지 모를 두려운 일들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쉽지는 않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타이라는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꽤 긴 시간동안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다 흐트러졌고 이제 자신이 가진 감정조차도 혼란스러워져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꽤 시간이 흐른 것이 분명했다. 「시끄럽게 일을 벌였더구나.」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철창 밖에 있는 사내의 움직임을 쫓았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보였고 익숙한 다른 몇몇의 얼굴이 보이자 타이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대가 나에 대한 감정 때문에 공녀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열려진 문으로 황제가 들어섰고 따르려는 병사들을 손짓으로 막은 병사는 타이라가 앉아있는 곳으로 성큼 걸어들어 왔다. 불빛이 흔들림에 따라 황제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려 타이라는 그의 얼굴을 그의 마음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제가 진심으로 당신의 믿음을 얻고 싶을 때 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 「어떠한 말을 하던 폐하는 저를 믿을 수 있으십니까?」 황제의 몸짓이 잠시 멈추었고 이내 낮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진실을 말할 생각이 있는가?」 황제가 물었다. 휴리아 실버리안의 부상소식은 전령을 통해 재빨리 바르시아 가문의 가장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노했으며 금방이라도 그 장본인을 죽을 듯 노성을 터트렸다. 무신집안인 그가 선대의 황제와 친구인 그가 현 황제를 따르고 모시는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아들을 잃은 슬픔을 상기하고 뒤이어 중태에 빠진 딸의 생사에 미칠 듯한 노기를 잠재우지 못하자 집안의 하인들은 난감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하인들에게 입궁한 채비를 서두르라 이르고 자신의 방에 모셔진 커다란 장검을 허리에 찼다. 가장 빠른 말과 하루속히 빠른 입궁을 위해 모든 일들을 다 버려두고 호위무사 하나만을 대동한 그는 자신의 딸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이틀 만에 궁으로 출발하였다. 그가 말의 옆구리를 피가 나도록 휘갈기며 도착했을 때는 궁 안은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또다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입성한 그의 소식을 알리러 궁의 시종이 알현실로 들어갔고 곧바로 바르시아 공은 자신의 딸을 위해 붙여둔 호위 무사를 찾았다. 「찾으셨습니까?」 고개를 숙인 사내에게 휘익 하고 칼날이 들어왔다. 사내는 칼날의 끝이 자신을 향해 있음에도 움직임 없이 푸욱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이었음을 용서하십시오.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도대체 누구냐!! 나의 딸이다. 라나 주제에 어찌 감히 공녀에게 손을 댈 수 있다는 말이냐!」 노성이 쩌렁쩌렁 울리자 병사들은 당혹해 하였다. 무릎을 꿇은 사내는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르시아공의 칼 아래 용서를 구하였고 뒤이어 시종이 알현실로 노장의 사내를 이끌었다. 「이 일에 대한 라나의 처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폐하.」 왼편 허리에 길게 내려트린 검 집 위로 손을 올린 바르시아 공이 황제에게 간언하자 알현 실에 있던 가신들이 놀라서 수근거렸다. 그들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감히 황제에게 처형을 논할 수는 없었다. 「그가 여신의 딸의 칭호를 받은 라나임을 기억하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그렇다면 처형할 수 없다는 사실도 그대는 알고 있겠군.」 「아들인 키리온이 죽었을 때 그 범인에 대한 색출을 폐하께 일임하였고 제 여식을 위해서 약조하신 모든 사항에 대해 폐하께서는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매우 어둡게 변하였다. 「라나를 태형에 처한다. 그리고 라나궁에서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명한다. 또 다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경 우에는 그의 생사를 그대에게 일임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공녀의 생명이 지장이 없다는 것과 그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범인이 라나의 소행이라는 증거가 없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공의 분노를 짐작하는바 더 이상의 간언은 듣지 않는다.」 황제의 말에 바르시아 공이 문 밖으로 나갔고 황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커다란 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보이는 궁의 뒤편 또 다른 궁을 바라보았다. 「태형을 거행하라!」 황제의 말에 병사가 재빨리 알현 실 밖을 빠져나갔다. 「진실은......... 애초 폐하께서 듣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여신의 강에 몸을 던질 때 다시는 세르판에 오지 않기로 신께 맹세했습니다. 원치 않는 이 상황을 탈피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황제의 손이 덥석 타이라의 목 부근을 향했다. 주저앉은 타이라의 몸은 순식간에 위로 올려졌다. 황제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시험하지 마라. 타이라 세이카.」 자신의 말에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어버리는 모습에 황제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늘 그랬다. 한순간도 마음 편히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존재를 눈앞에 그를 확인하면서도 항상 없는 것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그가... 「해볼 테면 해봐. 할 수 있다면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잊지 마라. 결코 그대를 놓지 않을 테니!」 황제가 나가고 묵직한 철창문이 닫혔다. 쿵! 소리와 함께 횃불이 멀어지고 뒤이어 한숨소리가 나듯 나직하게 공기가 가라앉았다. 몇 번을 병사들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두 명의 병사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감옥 밖 복도를 걸었다. 긴 복도의 끝 부분 즈음 새로운 방에 들어가자 뒤이어 쿵 하고 문이 닫혔다. 병사들은 뒤돌아 나가고 안쪽의 방 한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비릿한 웃음이 불쾌하도록 눈 안에 들어왔다. 「킥킥.. 이왕이면 소리를 많이 질러라!」 촤악.. 소리를 내며 채찍이 휘감겼다.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런 표정을 본적이 있었다. 세이카에 머물렀을 어린 시절에 형들의 기분이 저조할 때면 끌려가 매를 맞곤 했다. 그들은 상처를 내지 않게 하기위해 두껍게 덧댄 천을 등위로 휘감고 내려쳤다. 상처는 적었지만 아픔이 덜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채찍소리를 일깨우듯 타이라의 등에 아픔이 내려왔다. 그리고 달아나지 않게 하기위해 기둥에 묶은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후훗...... 보기 좋군요.」 방의 한편에서 들어서는 사내의 모습에 타이라는 눈을 떴다. 「아아~ 오해 말아요. 집행이 잘 되는지 증인을 서려고 왔으니까.」 「원하는 게 뭐야!」 「피차 오해할 발언은 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뭐라고 항변하려던 타이라의 말은 촤악~ 소리를 내며 감기는 채찍에 의해 가로막혀졌다. 휘익~ 촤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형벌을 가하는 병사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독하군요.」 「허억...........으.....읏.. 네 놈이..... 아악!!!!!!」 등을 가리고 있던 얇은 천이 찢겨 나간 지 오래였고 뒤이어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자 입을 가리려 해도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악물은 입술이 터져나가 입가에 피가 흘렀고 가늘게 떠진 눈앞에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카야르........ 그자가 지켜보고 있다. 「궁금하실까 알려드립니다. 휴리아 실버리안께서는 생명에 지장이 없으십니다.」 「으으........읏.........」 아쉽게도. 라는 말이 귓가에 나직이 울렸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촤악--!! 몸을 덮는 차가운 물에 정신이 들었으나 눈이 감겼다. 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피 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아!」 무감각한 손이 풀려진 밧줄과 함께 통증을 유발했다. 자신의 힘으로 곧바로 서려 했던 다리가 풀려 꼴사납게도 마주선 사내의 몸에 안겨버렸다. 소리 없이 눈물이 떨어진다. 마음이 몸을 떠난다. 「추워....」 가뜩이나 적응되지 않는 차가운 공기가 몸을 짓누르자 비명처럼 한숨처럼 입 밖을 통해 나오는 말이 사내의 품에 묻혀 들어갔다. 「폐하. 제가..」 「됐다. 라나궁으로 간다.」 황제가 라나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가자 황제의 라나를 채찍질하던 병사는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황제는 라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노성이 자신에게 쏟아져 나와 혹시나 해를 가했던 자신에게 책망이 돌아올까 두려웠으나 황제는 가만히 바라보고 그리고 라나와 함께 사라졌다. 「재밌군요. 쉽지 않은데요? 오히려 일은 더 쉽게 풀리겠어요.」 카야르가 슬며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황제와 휴리아의 관계가 나빠질수록 자신의 편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라나궁의 한편 시종들이 분주해졌다. 때 아닌 황제의 방문은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들려진 사내아이의 모습은 어두운 가운데 잘 보이지 않았으나 축축한 피비린내는 충분히 그들에게 전해졌다. 병사들이 드나들고 곧이어 황제의 기사인 헤론이 찾아왔다. 라나궁의 공기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우려의 말을 건내려 했던 헤론은 황제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라나를 살펴야했다. 등에 아로 새겨진 그 핏줄기를 닦아낼 때에 아픔에 뒤척이던 가냘픈 등을 바라보며 헤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프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헤론은 약초에서 낸 즙을 천에 묻히고 벌어진 상처를 닦아냈다. 매우 쓰라릴 것이 분명한대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손톱을 당혹스럽게 보고 있다가 별다른 방법이 없어 상처치료에 열중했다. 황제가 다가왔다. 쥐고 있던 손을 푸르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그대의 마음이 어떻게 하면 돌아설까를......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생각한다. 이미 떠나고 없는 마음을 내게 돌리려 할 때마다 상처 나는 그대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 라나의 등이 떨리는 것을 헤론은 느꼈다. 라나의 모습에 헤론이 치료하던 손길을 멈추고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라나궁의 미묘한 향기와 그 기운이 남아.. 아찔한 흥분 감을 남기기 시작했다.